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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식 Mar 02. 2023

분황사 모전탑은 왜 안산암으로 만들어졌나?

문화유산 지질학


분황사는 선뜻 들어가기 힘든 절이다. 일반인 눈에는 들어가 봐야 탑인지 건물인지 하는 게 하나 덩그러니 있고 별로 볼만하게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심지어 담 너머로 탑이 다 보인다. 이번 답사 길에도 어떤 아이가 아빠에게 “저거 보려고 2,000원씩 내고 들어온 거야?”라고 묻는데 아빠의 대답이 궁색했다. “천년 전에 우리 조상이 돌로 저걸 쌓았다는 거 대단한 거야.”


분황사 안내석 ⓒ 전영식


분황사 입구 주차장에는 엄청난 안내석이 있다. 누구의 아이디어 인지 모르겠지만 몇십 톤은 됨직한 변성암인 대리석으로 만든 안내석에 놀라운 경험을 한다. 사선으로 결이 예사롭지 않은 이 대리석은 두께도 거의 반미터는 됨직하다. 분황사 안내석이 저 정도로 크면 황룡사는 얼마나 큰 걸로 해야 하나 하고 생각해 본다. 아무튼 안내석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주차장으로 쌩 들어간다. 분황사가 여러 가지 암석으로 되어 있는 암석학의 백화점 같은 곳이라 그걸 완성하는 화룡점정 같다. 


분황사의 역사와 모전석탑


분황사(芬皇寺)는 지금은 보광전 하나, 석탑과 요사채 하나의 단출한 사찰이지만, 운영되던 때에는 자장(慈藏, 590년 ~ 658년)과 원효(元曉, 617년 ~ 686년)가 주석했던 유서 깊은 사찰이다. 분황(芬皇)이라는 말은 ‘향기로운 임금’이라는 뜻으로 선덕여왕을 뜻한다. 당초 황룡사의 약 68% ~75%  정도의 규모였지만, 2번의 중창으로 오히려 면적이 1/5 이하로 줄어들었다. 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분황사 모전석탑 ⓒ 전영식


<삼국사기>에 따르면 선덕여왕 3년(634년)에 분황사가 완공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여성 지도자인 선덕여왕이 왕권의 당위성을 확보하고자 왕위 계승 직후 황룡사 근처에 지어졌다고 보고 있다. 창건 후에도 자장과 원효를 주석시킨 것은 불교진흥을 통한 왕권 강화를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선덕여왕은 재위기간 15년 동안 불사를 크게 일으켜 25개나 되는 사찰을 건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재위 14년에는 황룡사에 9층 목탑을 건립하기에 이른다. 


모전석탑은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남아 있는 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미륵사는 선덕여왕의 동생인 선화공주와 서동의 전설이 깃들어져 있는 사찰인데 미륵사지 석탑은 무왕 40년(639년)에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석탑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분황사 모전석탑,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분황사 모전석탑은 임진왜란 때 반쯤 파괴된 것을 또 일재강점기인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 수리하였다. 이때 2층과 3층 사이에서 사리함을 발견했는데 각종 옥류, 가위, 금은바늘, 침통 및 숭녕통보, 상평오수 등 고려시대 중국 주화가 발견되어 고려시대 숙종, 예종 연간에 중수한 적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사리함에서 바늘이 나오는 일은 흔치 않는데 여왕의 시대에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고도 회자되고 있다. 


현재 탑은 한 변의 길이가 약 13m, 높이 약 1.06m인 넓적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가지런히 쌓아 올린 형태이다. 본래의 층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7층 내지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화강암으로 그랭이 기법을 이용하여 만들어져 있고, 윗면은 자연석으로 어수선하게 덥혀 있다. 강점기 때의 사진에는 없는 것으로 보여 그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는데 수컷이 두 마리 암컷이 두 마리이다. 암석종류별로 보면 정면에서 좌측의 두 마리는 화강암이고 반대편 두 마리는 응회암이다(이정은 외, 2005). 돌사자는 원래 6구가 있었는데 크기가 작은 2구는 일제 강점기 때 경주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 


분황사 모전석탑의 동쪽 인왕상 ⓒ 전영식


화산암인 암자색 안산암(安山巖, andesite)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 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에 비해 2층부터는 높이가 상당히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 탑신에는 네 면마다 감실을 만들고 문을 달았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仁王像)을 역동적인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남쪽의 문안에는 후대에 만들어진 부처상이 모셔져 있다. 


지붕 돌은 아래 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고, 맨 위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장식이 올려져 있다. 탑의 높이는 9.3m 정도이다. 완전했을 때 전체 높이는 아마도 20~30m에 이르렀을 것이고, 남쪽의 황룡사 목탑이 60m를 넘었을 것으로 보여 장관을 이루었을 것으로 보인다. 


경주 황룡사(좌)와 분황사(우)의 복원도, 출처: 경주시


분황사의 그 밖의 유물로는 조선시대에 지은 보광전, 약사여래상, 세 마리의 용이 물고기로 변했다는 삼룡변어정, 원효대사를 기리는 화쟁국가비석 받침, 당간지주가 있다. 삼룡변어정에서는 목이 부러진 부처가 여러 구 출토됐다. 

 

분황사 모전탑은 왜 안산암으로 만들어졌나?


분황사에서 남쪽으로 바라보이는 남산은 화강암으로 구성된 산으로 다수의 마애불과 조각상들이 분포하고 있다. 불국사 일원에서 발견되는 화강암은 지질학계에서는 백악기 불국사 화강암으로 명명하여 부르는데 그만큼 경주 일원에서 흔하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황사 모전석탑의 몸돌로 사용된 안산암은 분황사 부근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분황사 모전석탑은 기단부와 인왕상, 석물 등은 화강암으로 제작하였고, 그 위에 탑신부는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암회색 또는 암자색의 안산암은 중성 화산암으로 입자를 육안으로 관찰이 가능한 현정질 조직으로 사장석과 각섬석 반정(유리질 조직인 석기가 둘러싸는 큰 결정)이 확인된다고 한다.


분황사 모전석탑의 1층 지붕과 2층 부분, 백화현상이 보인다. ⓒ 전영식


그렇다면 신라인들은 왜 흔치 않은 암석인 안산암으로 모전탑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 산지가 어디였는지도 궁금증을 가질 만한 이슈이다. 안산암은 화산암이기 때문에 심성암인 화강암에 비해 가볍고 가공성이 좋다. 그리고 철 성분이 화강암에 비해 많이 포함되기 때문에 화학적 풍화에는 약한 편이다. 따라서 불상이나 마애불을 만드는 데는 적합하지 않지만 바닥재로 사용하기는 무난하다. 또한 색상이 검은색 계열로 나오므로 기와나 전돌과도 잘 어울리는 재료이다. 따라서 돌의 물성에 밝은 신라인들이 안산암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분황사와 울산 당사동까지의 거리, 출처: 네이버지도


황창한(2019)의 연구에 따르면 분황사 탑신에 사용된 안산암은 울산 북구 당사동 일대에 분포하는 제3기 장기리층 당사리 안산암으로 추정하고 있다. 분황사 모전탑까지는 직선거리로 26km 정도에 가깝지 않은 거리이다. 하지만 울산 무룡산 계곡만 넘어가면 경주까지 울산단층이 지나가는 평지로 이어져 어렵지 않게 운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사리 안산암의 노두 사진, 출처: 황창한(2019)


윤성효 등(2000)에 따르면 울산 동부지역 당사리 지역에 신생대 마이오세(2303만년~600만년 전)의 화산암류가 존재하는데, 다량의 안산암질 화성쇄설암류 내에 안산암 용암류가 교대로 쌓여 산출된다. 안산암은 유상구조(흐른 흔적)와 판상구조가 특징으로 나타난다. 일부 관입상에서는 소규모 주상절리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안산암류는 반복되는(호층) 구조로 층상구조(5~15cm)를 나타내는데 이를 절단하여 사용하면 모전탑을 만들기에 좋은 부자재가 얻어진다. 또한 이 지역의 암석이 깨어진 면(절리면)에는 암자색의 산화면이 나타나는데 분황사의 그것과 일치한다. 산지에서 적절한 크기로 자르면 이동에도 편리했을 것이다. 다만 황창한의 연구는 본인이 밝힌 바와 같이 육안으로만 분석된 것으로 대자율 등의 다른 측정 방법을 추가하여 보다 면밀한 조사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분황사 모전석탑을 구성하는 안산암, 석재의 크기가 대체로 유사하다 ⓒ 전영식


경주시 건천읍 신경주역 뒤편 단석산에는 신선사 마애불상군이 있다. 7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마애불은 안산암 암벽 틈에 10구의 불상과 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암석은 안산암이어서 마멸이 심해 디테일은 보이지 않는다. 이 마애불과 분황사 모전석탑과의 선후관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 분황사에서 서서남쪽으로 14.5km 정도 떨어져 있다. 


일반적으로 석재문화재에 사용된 석재의 산지를 추정하는 것은 보존을 위한 부재의 확보뿐만 아니라 인문학적으로도 중요하다. 석재의 교류, 생활범위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암석 확인을 위한 지질학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유물의 단면을 잘라 시편을 제작하여 편광현미경, 전자현미경 등의 관찰을 하여야 정확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유물을 파괴할 수는 없다는 점, 석재의 표면이 깎여 나가 있거나 풍화되어 있어 육안 관찰로 쉽게 판별이 어려운 점 등 애로사항이 있다. 따라서 최소한 육안 관찰을 통해 유물의 대응 석재를 채집, 분석하여 산지를 추정하는 것이 차선의 방법일 것이다. 


분황사의 흔적을 따라서


분황사 정문 앞에는 당간지주가 서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고 떠난다. 당(幢)이란 부처나 보살의 공덕을 나타내는 깃발로 불전이나 법당 앞에 결렸다. 따라서 사찰의 신성한 영역을 표시하는 구실을 하므로 분황사의 영역이 이곳까지였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두 기둥 사이에 당간을 받쳤던 간략한 귀부형 간대석이 온전하게 남아 있다. 기단은 없이 땅속 깊이 박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123호로 지정되어 있다.


분황사 당간지주 ⓒ 전영식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1965년 분황사를 발굴 조사할 때, 우물 속에서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석불이 출토되어 8점이 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다. 한결같이 머리가 없는 형태로 나왔는데, 이는 머리 부분이 구조적으로 약한 이유도 있겠지만 몽고나 일본의 침입 때 일부로 파괴되었거나 불교가 탄압받던 조선시대에 고의적으로 훼손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어두워질 무렵이나 비 내리는 날에 방문하면 섬찟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분황사 머리 없는 석불 ⓒ 전영식


이 밖의 당시의 출토 유물은 경주국립박물관 내의 경상도 지역의 수장고 역할을 하는 ‘신라천년보고’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이 공간에는 대구, 진주, 김해 박물관의 소장 발굴품도 보관되어 있다.  참고로 문서자료는 ‘신라천년서고’에 보관되어 있다. 


경주국립박물관 신라천년보고에 전시 중인 분황사 유물 ⓒ 전영식


분황사는 크지 않은 평지 사찰로 가벼운 마음으로 관람하기에 제격이다. 경주 시티투어의 대표코스로 항상 관람객이 북적인다. 사찰 내에서는 공식 해설사와 사설 해설사가 어우러져 법당의 불경소리보다 더 많이 크게 울려 퍼진다. 하지만 어디서 들었는지 누군가가 안산암을 소개하면서 바다에서 나온 돌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물론 일반인의 눈에 암석을 구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암석의 이름이라도 정확하게 알리는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틀린 이야기를 부지불식간에 이야기하는 것은 누군가 지적해줘야 하는 사항이다. 이집트에 피라미드를 관람할 때, 안내인이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고 이야기한다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문화재에서 암석은 단지 암석이 아니고 당시의 건축, 문화에 대한 정보를 가득 담고 있는 사료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1.     김준영, 2014, 분황사 석탑 연구, 영남대학교 박사 논문

2.     박대남, 2009, 사찰구조와 출토유물로 본 분황사 성격 고찰, 한국고대사탐구, 제3권, p.39-85

3.     윤성효, 고정선, 박기호, 이영애, 2000, 울산 동부 마이오세 당사리화산암류에 대한 암석학적 연구, 광물학회지, 제9권 제3호, P.169~186

4.     이정은, 이찬희, 김광훈, 2005, 경주 분황사 석탑의 훼손도 평가와 부착생물종의 다양성, 한국문화재보존과학회 2005년도 제21회 학술발표집

5.     황창한,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석재의 산지 연구, 2019, 야외고고학 제34호, 147~168


전영식, 과학 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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