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좀 빼라. 피부과도 좀 다니고. 다들 이것저것 많이 한다던데, 넌 어쩜 그리 아무것도 안 하니."
"뭐 좀 먹어. 피죽도 못 얻어먹고 다니는 애처럼 얼굴이 그게 뭐냐. 피부과도 좀 다니고."
어머니의 잔소리 1절이다. 애국가처럼 각 소절의 주제가 뚜렷하다. 십수 년간 들어오다 보니, 함께 줄줄 외고 있다. 살이 찌면 찌는 대로, 살이 빠지면 빠지는 대로 엄마의 걱정은 끝이 없다. 기승전 "예뻐야지."가 핵심ㅇ;다. 그리고 그 해결책은 '피부과'다. (응?)
엄마의 시선 속에 딸의 외모 기준은 아나운서 초년생이었던 스물셋, 딱 그 시절의 모습이다. 방송은 서툴렀지만 마냥 파릇파릇하고 싱그러웠던 그 시절, TV를 보면 한없이 자랑스럽고 예뻐 보이기만 했던 그 모습이 엄마의 기준점이 되었다. 속일 수 없는 게 세월이라는데, 나라고 별 수 있었을까. 엄마도 나이 드시고, 저도 나이 먹었는데, 엄마의 눈 속에는 마냥 스물셋이다. 아니, 정확히는 늘 스물셋처럼 싱그럽길 바라신다. 잔주름이 제법 보이기 시작하는 수준(?)이 달가울 리 없다. 엄마의 기준점은 평생 넘을 수가 없다.
마흔이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들 한다. 나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얼굴에 주름이 꼭 생겨야 한다면, 미간에 깊게 팬 주름 말고, 눈가에 웃음의 흔적이 남은 잔주름이었으면 좋겠다, 늘 생각했다.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나는 정말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나이듦이란 무엇일까. 늙는다는 건 내 인생에 어떤 의미인가.
"92살의 최고령 박사, 이상숙."
이상숙 선생님의 도전과 성취를 담은 기사가 뇌리를 울린다. 5년 동안 밥 먹고 공부하고 논문 쓴 것밖에 없다고 하셨다. 공부는 체력이라지. 주 3회 러닝머신을 하며 학교 앞에 공부방도 얻어 수학하셨다고 한다. 92살에 박사라니. 석·박사에 5년이 걸렸다고 하시니, 여든일곱 즈음에 도전장을 내민 셈이다.
나는 마흔에 '간신히' 석사를 마쳤다. 포기할까, 말까 수없이 고민했지만 그동안 낸 등록금이 아까워서 정말 가까스로 마쳤다. 졸업하던 날, 내 생에 공부는 여기서 끝이다!라고 외쳤던 내가 한없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낡은 생각이었다. 이런 마음가짐이라면 이상숙 선생님처럼 여든일곱은커녕, 마흔일곱이 되어도 도전을 겁내고 현실에 안주하는 '낡은이'가 되어있을 게 자명하다.
나이를 잊은 열정은 또 있다. 64살의 주부, 정윤선 선생님은 최근 토익시험에서 990점 만점을 받았다. 대학원 입학을 계기로 토익시험에 도전했고, 5번 만에 만점을 받으셨다고 한다. "단어집을 통째로 외울 만큼 철저하게 공부했다. 문법도 문제집이 닳도록 공부했다."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가 생각났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너에게 묻는다> 中
나는 한 번이라도 책을 통째로 외울 만큼 철저하게, 처절하게 공부한 적이 있었던가. 문제집이 닳고 닳도록 들여다 보고, 만점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KBS <봉숭아학당> 개그맨 장동민
"그 까이거, 대~충"
예전에 이런 유행어 있었다. 딱 나였다. 보고 또 보고 돌다리를 두드리기보다는 대강 이해하고 넘어간 탓에 중요한 길목에서 실수하는 경우도 많았다. 문제집도 자주 찢어졌다. 너무 많이 봐서 닳고 닳아 찢어진 게 아니라, 스트레스로 휙- 휙- 종이를 넘기다 찢어지는 경우였다. 만점에서 5점 모자란 985점을 받은 뒤 절치부심해 만점에 도전하는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만점에서 5점 모자라지만 이만하면 되었다, 다시 시험 봐서 무엇하리, 결과에 순응하는 사람이었는지를 되돌아보게 됐다. 나는 당연히 후자에 가까웠다. 역시나 '낡은이'였구나. 확인사살을 해본다.
물론 나도 인생에서 가장 뜨거웠던 순간은 있었다.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20대, 취업준비생일 때였다. 별 보고 집에서 출발해 도서관에서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다 별 보고 하교하는 일이 일상이었다. 당시에는 '학창 시절에 이렇게 공부했다면 하버드 갔겠다.' 얇디얇은 자부심을 뽐내던 때도 있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그렇게 공부는 못 하겠다, 입방정도 제법 떨었다. 과거에 대한 회상이었기에 가능한 허세였다. 과거의 빛나던 순간만을 좇는 조명에 불과했다. 과거에만 빛을 비추니, 지금은 빛날 수가 없다. 낡은 생각 탓에, 지금은 왜 그렇게 못 살아?라고 자문하지 못했다. 어쩌면, 다시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게 겁이 나는 '겁쟁이'일 수도 있겠다.
'늙음'과 '낡음'이란 무엇인가를 곱씹어 본다. 모음 하나 다를 뿐인데, 의미는 천양지차다. 늙었다고 낡은 것이 아니었다. 젊은이도 낡은이일 수 있음을, 날 보고 깨달았다. 늙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낡아지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두 선생님의 기사를 보고, 다시 무언가에 도전할 동기부여를 얻은 것처럼, 독자들께서도 지금 망설이고 있는 그 일을 시작하셨으면 좋겠다. 그 일이 무엇이든, 아직 늦지 않았고, 여러분의 나이가 몇 살이든 아직 늙지 않았다. 물 타지 않은 순도 높은 인생을, 지금부터라도 살아보면 어떠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