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 한 시간 뒤에 밀게요.
-응. 적어둘게. 몇 번?
-157번이요.
세신 이모와 나는 초면이다. 이모도 아니지만, 모두가 이모라고 부른다. 랜선 이모를 현실에서 만나도 이리 친근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희한하기도 하지. 이모의 반말이 낯설지 않고 친근하기까지 하다. 목욕탕에 오면 왠지 그렇다. 서로 숨길 게 없어서 그런가.
체면 차릴 것도 없다. 벗고 만나면 다 똑같아서 좋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이브들의 만남 속에서 비생산적인 상상을 하는 시간이 참 흥미롭다. 같은 탕에 몸을 담그고 있는 저 어르신이 실은 대단한 자산가가 아닐까? 안경 쓴 내 또래의 여성은 혹시 긴급 반차를 쓰고 교실을 박차고 나온 선생님이 아닐까? 뚫어져라 쳐다보는 무례함은 고이 접어두지만, 0.5초 마주친 시간을 벗 삼아 눈을 내리깔고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겨울인데 겨울답지 않은 날, 내 몸인데 내 몸이 아닌 듯 천근만근인 날, 목욕탕을 찾았다.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린 영혼을 좀 지지고 싶었다. 45도씨.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못 같은 곳에 설레는 마음으로 선녀처럼 발을 담갔다. 인두에 닿은 듯, 얼음장에 담긴 듯 이질적인 고통이 다리를 휘감지만, 언젠가부터 이게 참 시원했다.
깊은숨과 함께. 그렇게 잠시 잠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정말 피곤했나 보다. 그 뜨거운 곳에서도 눈이 저절로 감겼다. 살이 벌겋게 익어가는 동안 이모는 나를 불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셨다고 했다. 힘없이 등을 기댄 채 꾸벅꾸벅 흔들리는 고개가 계속 신경 쓰이셨나 보다. 그래서 이모는 칭찬을 많이 하셨나.
-몇 살?
-마흔한 살이요.
-오마. 애기네, 애기. 우리 막내가 마흔다섯인데. 때를 참 잘 불렸네!
'애기' 소리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새삼 내가 파릇해지는 것 같았다. 파워 E라면 꺄르륵 했을 테지만, 소심한 i는 화들짝 놀란 감정을 감추고 어디선가 잠들어 있을 티끌 하나 없는 목소리를 최대한 끌어모아 화답했다. 새싹처럼.
-한 시간 불렸어요!
-잘했네, 잘했어. 그래야지. 다들 때도 안 불리고 와서 힘들어 죽겄어. 때가 불어야 나오지, 들어오자마자 때부터 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 나라고 별 수 있나? 그렇게 급하면 어제 오지 그랬어.
'이모는 충청도 출신이 틀림없다.' 가만히 생각했다.
툭툭.
이모는 무심히 발목을 때린다. 몸을 돌리라는 신호다. 나는 석쇠 위에 올려진 통삼겹처럼 세신 베드 위에서 몸을 45도 틀었다.
-결혼은 했는가?
-그럼요. 애기도 있어요.
-오메, 그래? 배가 하나도 안 텄어. 돈 벌었네.
칭찬일 거다. 배에 살이 튼 흔적, 임신 흔적이 없어서 혹시나 하셨단다. '애기' 소리에 이어지는 칭찬에 정신이 혼미해지며 몸이 더욱 나른해졌다.
툭툭.
몸을 또 한 번 돌려 엎드렸다. 삼겹살이 잘 구워지고 있다는 걸 이모의 반응으로 알 수 있었다. "좋다, 좋아. 그래, 이래야지!" 이모는 연신 탄성을 발사하며 성스러운 노동 행위에 집중하셨다. 땀을 뻘뻘 흘리며 "돈 버는 보람이 있네." 해맑게 웃으셨다.
-저도 돈 쓰는 보람이 있네요.
눈은 감았지만 오롯이 느끼 수 있는 탈각의 소리. 안 그래도 수줍은 상황이라 나는 더욱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화답했다. '그래, 이 맛이야.' 김혜자 선생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얼굴에 오일 발라줄까?
-네, 발라주세요.
직장 생활하는 딸 생각이 난다며 이모는 어미의 마음으로 마무리까지 세심하게 어루만져주셨다. 어느 목욕탕을 가든 이모님들의 손맛은 늘 신뢰하는 편이다. 세신하다 유방암을 발견한 사례도 있지 않은가. 오늘도 난 사회에서 난사당한 영혼을 이 작은 베드 위에서 치료받았다. 상쾌함을 만끽하기 위해 45도의 뜨거운 물속에서 한 시간을 견뎠다. 견디고 버티니 때가 술술 나온다.
'그래. 누구나. 다. 때가 있다.'
불리면 된다. 버티면 된다. 무거운 몸을 한 꺼풀 벗겨내니 신생아가 되어 세상에 방생된 기분이다. 내일도 나는 잘 견뎌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