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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

수동 운전을 회피했던 지난 10년의 수동적인 삶. 그것에 마침표 찍은 날

by 파리외곽 한국여자


지난 10년

수동은 몰 생각도 못하는

수동적인 삶, 그 자체였다


이걸 이제라도 벗어나려면

저 싸가지없는 수동 스틱을 내가 꽉 잡고

내가 원하는 데로 가고 싶은 곳으로

가고 싶은 그 어느 때라도

내가 조종해서 가면 된다


내 삶의 주인은 나였는데…

맞아..

내 삶을 누가 이따구로 만만히 취급하는 걸

알고도 가만히 있다면 바보천치요

몰랐는데 이제 깨달았다면 천만다행이다


차 스페어 열쇠 어딨어?



십 년간 못한 말이 안 한 말이

그다음 데케이드의 초입에 나왔다


키를 넣고 돌려서 어찌어찌 시동은 걸었는데


내리막길에 세워둔 자동차

설상가상으로 딱 붙어 있는 앞 차

뒤로 후진을 해야 한다


R-1-2-3-4-5-6


R

아무래도 이것이 후진 기어인 것 같은 데

아무리 스틱을 흔들어 봐도

R 쪽으로 절대 기어가 잡히지를 않는다


어떻게 하면 스틱을 R 쪽으로 움직여?


이 이후에 벌어진 일은 나중에 시간이 되면 다시 한번 기록으로 남겨야겠다. 오늘 아침 차를 주차해 둔 그 좁은 거리에서 일어난.. 눈만 베릴라나. 그래 그냥 없던 일로 내 머릿속에서 빠져나와 세상을 어지럽히지 못하도록 깊은 그 어딘가에 그냥 파묻어 버리자.


내입만 아프다


밤새 뭐 하느라 잠을 거의 자지 않아서 어제 저녁에 마신 술도 덜 깬 상태에서 겨우겨우 정신줄 잡고 회사로 가던 저 덜떨어진 인간의 오늘 하루 첫 순간부터.. 저녁에 땀과 술에 취해서 “내 차는 어디 있냐 다 부서졌냐”며 혀 꼬인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내뱉으며 비틀비틀 피곤과 알콜과 담배 그리고 커피에 쩔어서 들어오는 순간까지. 오늘도 정말.. 참 대단했다. 하지만 기록하지 않고 싶다.


내 손만 아프다.



소파에 쓰러지든 누워서 눈을 감고 정신 줄을 스르르 풀어놓다니 도저히 안 되겠는지 이 층으로 올라가서 본격적으로 잠을 자려나보다.


오늘은 오후 5시, 1시간 더 일찍 왔다.

겨우 버텨낸 거지.


이제 자유를 느끼면서 살겠네
네 삶이 좀 달라지겠어


저 말을 꼬리처럼 질질 끌며 뱉어내곤

그는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소름이 돋았다.




R로 어떻게 스틱을 움직이는지 절대 가르쳐 주지 않았고, 그 틈바구니 속에서 아이 등교시간은 지나 버렸다.


그렇게 최초로 아이는 황당한 이유로 결석을 하게 되었다. 8시 30분에 교문이 닫히면 그걸로 끝이다. 난 적어도 그렇게 알고 있다. 이러면 찍히는 것도 알고 있다. 부모들이 모지리들이라 아이가 입는 피해가 크다.


이왕 학교도 못 가는데 아이와 나는 운전학원에 가서 도로 연수를 신청했다.


R로 어떻게 바꾸는지는 유튜버가 1초 만에 가르쳐주었다. 바로 실행되었고, 일단 끌고 수퍼주차장에 주차해 두었다. 수동적인 삶의 청산을 위해 수동 차를 운전해야 하는 아이러니. 십 년을 미룬 일이 아이 스케이트장 데려다주는 미션에 바로 실행된 것이다.


결국은 다 핑계였던 걸까
+
가스라이팅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인간의 백지수표 한 장을 뜯어서 사용했다.

이건 네가 내라.


이 놈의 착한 여자 컴플렉스인지 머시기인지 때문에

1시간 65유로 밖에 신청하지 않았지만


뭐..

나름의 ‘작은 복수’라고 해 두자




2025년 9월 26일 금요일 오후 7시 30분


저녁도 먹고 수퍼 지하주차장에 주차해 둔 차를 좀 가져오라고, 한잠 자고 있는 이 하나를 깨웠더니 내려와서 땅콩만 잔뜩 집어먹고 너무 피곤한 거 안 보이냐며 찌질이 토사만 뿌려놓고 올라가 버린다.


이제 반시간도 안되어 문을 닫을 텐데 민폐는 끼치지 말자 싶어 차키를 가지고 문을 나섰다. 딸아이도 같이 가겠다고 따라붙는다.


걸어도 십 분도 걸리지 않는 짧은 거리이지만, 한참을 오르막길로 올려서 또 내리막길에 주차를 해야 하고, 오전에 후진기어 작동법과 페달 세 개의 사용법과 클러치 동력전달 방식 정도만 유튜브 비디오를 몇 개 본 것이 다인 상황이라 좀 부담스럽긴 했다.


그래도 첫 수업이 월요일 오후 세시에 있는데, 그전에 기본적인 것을 직접 해 볼 필요는 있겠고, 일단 차를 빼내야 하니까 혹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면 수퍼 매니저에게 부탁해서 하룻밤 거기서 재우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또 점멸등을 켜서, 그냥 1단을 넣어서 엑셀 브레이크 클러치 이 삼종세트를 대충 밟아가면서 언덕으로 올리고 오르막길을 쭉 올라가서 내리막길 주차까지 성공했다.


내일도 또 예습모드에 들어가야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십 년 전에 도전해야 했고, 그랬다면 내 삶도 이따구로 수동적으로 찌그러지지 않았을 텐데

뭐, 후회'는 내 스타일이 아니고.. 그렇게 발전에 더딘 지난 십 년이었다.


됐다.

다 지난 일이다.

일단 마음이 동해야 되는데, 그것이 10년이 지났을 뿐이다.

널뛰기하듯 하는 굿판에서 나는 그래도 여전히 살아있다. 그럼 됐다.

다시 관 속에 캄캄하고 춥고 습한 그 안으로 기어들어가지 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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