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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도 지능순이라면

오늘도 나는 또, 바보 천치

by 파리외곽 한국여자


호텔을 알아보고

에어비앤비를 알아보고

기차 편을 알아보다가는


오늘 저녁만 피해볼까 싶어

근처로 잠자리를 알아보고

수동차운전은 엄두도 못 내는 버스충 뚜벅이였던 내가

며칠 전 처음 사용해 본 우버앱도 가만히 쳐다본다


끝없이 반복되는

무한 루핑의 현실에

울화통이 치밀어 올라서

심장이 풍선처럼 훅 부풀어 올랐다


작은 바늘이라도 스치면

이내 펑하고 터질 것 같아


이대로는 안 되겠다 급하게 위층으로 올라간다


아무런 쓸모없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배란일

이 또한 지난 지 한참이다.

언제 들이닥칠지모르는 불청객을 대비하여

급하게 생리대 몇 개를 챙긴다.

혹시라도 이 나이에 호텔 시트에 얼룩이라도 남길까 조금 끼는 듯한 속옷도 하나 챙겨 놓고.

위의 잠옷은 티셔츠 안에 미리 입고 바지 잠옷만 깨끗한 작은 면 trousse 안에 넣는다.


머릿속으로는 클렌징워터와 칫솔 치약.. 십여 가지 기본용품이 다 생각이 나지만 일단은 파리 주변을 벗어나지 않는 가까운 곳에 갔다가 내일 저 인간 없을 때 집으로 다시 와서 짐을 챙겨야 될 것 같은데


왜 하필이면 오늘 까르프를 들러서 무겁게 양손 가득 장을 봐 왔을까?


아이 방에 좋은 공기청정기는 못사 주더라도 공기청정 식물은 하나 사주고 싶어서 고르고 골라서 버스에서 혹시 잎이 하나라도 눌리거나 할까 봐 얼마나 신경 써서 갖고 왔는지..


아이가 이가 흔들려서 고기를 부드러운 부위로 사줘야 해서 소고기 부드러운 부분인 côte de bœuf 두 덩어리, 생선도 오븐에 구워주려고 고등어 작은 거 여섯 마리와 dorade royale 서너마리. 돼지찌개를 좋아하는 저 인간을 위해서 돼지고기 일 킬로, 호박 양파 마늘 파 기타 아보카도 생강 큰 거 한 덩어리 등등 여러 가지를 바리바리 양팔 가득 사 왔는데


오늘 저녁에 이 집을 탈출하면 이것들은 어떡하나..



학교 담임이 며칠 전 상담을 요청해 왔다. 아이 찾는 시간은 오후 4시 30분 상담 시간은 오후 4시 40분으로 잡았다.

아이 아빠가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내가 준비해 놓은 간식을 먹이고 있는 동안, 나는 선생님과 얘기를 하고 이렇게 하면 피겨스케이팅장으로 모두 함께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학부모 상담’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알콜기에 알딸딸하게 담겨져 있던 그가 급변했다. 더러운 말을 쏟아 내는 괴물로 순식간에 변신했다. 이게 또 치트키였다 오늘은.



아이 오늘 스케이트장 수업 가면

수강료 수표를 내야 하는데

그러면 또 1년을 여길 벗어나기 어렵다

수강료가 아까워서 또 참을 게 분명하다


그래서


아이에게

말했다.


오늘 가지 말자.
오늘 가면 상황이 좀 복잡해질 것 같아

왜?

몸이 좀 안 좋네 엄마가.
둘만 보내기도 그렇고.

가자. 조금만 힘내봐 엄마.



어제 끓여 놓은 미역국도 있고…

일단 오늘은 생선구이부터 해서 먹이고….


음….





다른 사람들은 잘 먹고 잘살더구먼

난 참 모지리….

아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것도 글이랍시고

발행을 누르 다니

쯧쯧..


아..

마음이 쪼그라져서

또 구독자 0으로 했다

그냥 외롭게

그냥 구석탱이에서

존재감없이 있다가

가볍게

떠날

그런

준비….

프랑스를 떠나는 거보다

브런치를 떠나는 게 아마 더 쉬운 줄 아는 나

그러다 또 돌아올 거면서

철없이

이렇게

비워본다


술이 좀 깼는지 좀 덜 피곤한지 먹으라고 뼈를 발라놓은 포도. 니 정신이나 챙겨라

11년째가 되어도 아무 일도 일으키지 못할 것 같은..

이러다 지난 10년을 되풀이할 것 같은..

조련된 동물에게 나타나는 그런 증후군이 있다면

이것과 비슷할 터이다


최대한 빨리 소비하면 가볍게 뜰 수 있을거란 착각 속에.. 단백질을 두 종류로 했다가 남은 것들은 일단 냉장고 안에 넣어 둔다. 며칠 나간다해도 음식 상할 염려가 줄긴 하겠구먼.


그런데 아이가 학교 갔다 오고 나서 계속해서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다


My little soda pop

You're all I can think of, every drop I drink up

You're my soda pop, my little soda pop

Cool me down, you're so hot, pour me up, I won't stop

You're my soda pop, my little soda pop

My little soda pop


아무래도 도망을 가더라도 하루 이틀 넘기긴 힘들 것 같디. 일단 호텔에 처바를 돈도 내 돈이 아니면 더 걱정이 되는 법인데 다행히 700유로 며칠 전에 일한 것 그것이 있으니 일부 사용은 하면 되겠지만.. 이것을 보일러 기름 값에 보태기로 했는데.. 이것도 써버려면 약속을 못 지키는 것 같아 기분이 좀 찝찝하기도 하고.. 하지만.. 주말 동안 말끝마다 부정적인 기운이 가득한 그런 오물을 뒤집어쓰고 있고 싶진 않다. 정말 미쳐버릴 것 같다.


저 노래를 부르는 내 작은 아이에겐 학교가

- 귀엽고, 맑고 해맑고 상냥한 혹은 가끔은 짓궂은 친구들도 있고,

예쁘고, 착하고, 꽃같이 향기로운 미소가 있고, 바람직한 어른의 모델을 보여주는 귀한 담임 선생님도 계시고,

세상에 모든 웃음소리와 넘치는 에너지를 담은 학교 운동장이 있는 -

그런 파라다이스 같은 곳으로 보인다


내일 학교 가면

친구들과 무슨 놀이를 할지 기대하고

함께 만질 몰랑한 장난감도 몰래 가방에 넣고..


내일이 벌써 오늘에게 찾아와

함께 내일로 손 잡고 가려는 듯

다정하기만 하다..


그 아이의 그 행복을…

나의 도피를 위해서..

다음 주 전체나, 기약 없는 시간을..

통째로 주저앉힐 수는 없. 다.

특별한 대책이 확고히 마련되지 않았다면 더더욱.


똑똑한 엄마라면 위자로 계산도 하고 살 길을 빠르게 찾아낼 텐데.. 왜 이렇게 결단을 내리기가 힘들까..


11 년째에는 지난 십 년과 좀 달라야 하지 않을까

십 년간 바뀌지 않았는데 11 년째 바뀌는 게 분명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타의든 자의든 지난 십 년이라는 시간 동안 너무나 수동적이고 비루한 삶에 길들여져 버리기도 했다.


일단 오늘은 다시 이곳에서 지난 10년처럼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내 새로운 하루를 기다리며 그렇게..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 해야겠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그런 하루하루 또 하루의 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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