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크리트 티라바니자의 먹는예술
인생에 있어 중요한 순간엔 음식이 빠지지 않는다. 탄생, 생일, 결혼, 그리고 장례식까지, 무언가를 축하거나 기념할 때 우리는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대화하고 사회적 관계를 맺는다.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데이트 신청을 할 때도, 오래간 만에 연락이 닿은 친구의 소식이 궁금할 때도, 새로운 사람들을 알아갈 때도 우리는 '밥 한번 먹자'라고 말한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음식을 씹으며 맺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SNS에서 서로의 게시물에 좋아요를 남기고 댓글을 주고받는 추상적인 관계와는 다른 차원인 것 같다.
이렇듯 먹는 행위는 모든 문화권에서 인간관계를 시작하고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었다. '이다'가 아닌 '이었다'. 과거형으로 서술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몇 개월간, 여럿이 모여 함께 무언갈 먹고 들뜬 분위기에서 대화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코로나 19는 언택트(비대면) 시대의 도래를 가속화했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언택트는 이미 진행되어왔지만, 추진 동기 부족으로 일상생활에 적용은 더디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코로나 19로 리스크를 직면한 사회는 생활 방역이 일상화될 것으로 전망됨에 따라 언택트 사회가 새로운 모델로 제시된다. 사람들은 불특정 다수가 모이는 영화관이나 전시장, 공연장을 기피하게 되었고 회식이나 모임, 뒤풀이 또한 사라졌다. 사실상 '사람들이 모이고 만나는 것' 자체를 자제하고 있어 올해 대학교에 입학한 새내기들은 한 학기가 끝나도록 같은 과 학우들의 얼굴도 알지 못하는 현실이다.
대신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고립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화상 미팅이나 데이팅 어플, SNS를 통한 디지털 연결이 주류가 되고 있다. 관계 맺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것 같다. 사람들과 맛있는 걸 함께 먹으며 서로를 알아가던 방식은 이제 구식인 걸까?
리크리트 티라바니자의 먹는 예술
앞서 말했듯, 먹고 마시는 행위는 삶을 유지하는 기본적 기능이자 굉장히 사회적인 행위이다. 다른 감각들은 혼자서 즐기는 게 흔하지만 음식은 여럿이 먹어야 더 맛있고 즐겁다. 영어에서 벗을 의미하는 'companion'도 라틴어로 '함께'라는 뜻의 '캄'과 이라는 뜻의 '파니스'가 합쳐진, 그 어원이 '함께 빵을 먹는 사람'이다. 태국 출신의 현대 미술가 리크리트 티라바니자는 전시장에서 음식을 대접했다. 오프닝 세리머니를 위한 간단한 절차로서의 음식이 아니었다. 작가가 음식을 대접하고 관람객들이 이를 먹으면서 서로 대화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고, 예술이었다.
리크리트 티라바니자는 1992년 뉴욕의 화랑에서 열린 <팟타이>를 시작으로 음식 대접하기 시리즈를 진행해왔다. 사람들은 작가가 직접 요리하고 공짜로 음식을 대접한다는 소문에 전시장을 찾았고 전시장은 각종 식자재와 요리 도구, 사람들이 먹다 남은 음식과 음식을 먹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때 요리는 함께 먹는 옆 사람과 담소를 나눌 수 있게 하는 촉매제였다. 티라바니자는 2년 뒤 <공짜(free)>라는 전시를 열어 이번엔 팟타이 대신 그린 카레를 요리하고 대접했다. 엄숙한 미술관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낯선 사람들과 함께 먹고 대화하는 행위가 예술이 되는 상황은 관람객들에게 일종의 들뜸과 해방감을 제공했고 티라바니자의 전시는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전시는 1995년 같은 장소에서 <여전히(still)>이라는 제목의 앙코르 전시로까지 이어졌다.
공짜로 음식을 나눠주는 행위는 자본주의의 경제논리에서 벗어나는 행위라는 점에서도 의미를 갖는다. 모두에게 나눠주는 태국 음식은 불교문화의 박애주의적 성격을 띠면서 미술이 일부 부유층을 위한 상품가치를 가진 물건이라는 관습을 탈피한다. 전시를 찾은 관객에게 가리지 않고 친절하게 음식을 나눠주는 이 프로젝트는 이기주의와 합리주의가 극화된 현대 도시의 상식을 전복하고 미술이 상업적 이익을 위해 작품에 경제적 가치를 매기는 관행을 벗어났다. 1992년 시작한 요리 접대 프로젝트는 이후 라이프치히, 도쿄, 베니스 등 다른 국제적 도시로 연장되었고 세계 곳곳에서 주목받는 비엔날레와 국제 전시에 단골로 등장하였다. 이 나라 저 나라를 오가며 거주하고 작업하는 유동적인 그의 삶의 방식 또한 지극히 포스트 내셔널(post-national)하다.
먹는 행위가 가진 사회적 기능을 떠올려 보자. 타라바니자의 먹는 예술이 의도한 건 전시장을 찾은 불특정 다수 관람객 사이의 상호작용이었다. 함께 먹고 마시는 연회적인 분위기는 타인과의 격식 없는 소통을 가능하게 했고 같이 먹는 행위를 통한 이런 만남은 낯선 이들 사이의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전시를 찾은 관람객 사이에 '우리'라는 공동체의 연대 의식을 발생시켰다.
티라바니자는 예술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맺는 작업이라고 이야기했다. 예술이 소외를 조장하는 현대사회의 생활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대화 공간으로 기능하도록 의도한 것이다. 티라바니자의 먹는 예술은 직접적인 만남과 대화, 접촉과 교류를 장려하는 장을 제공하여 예술이 인간성을 회복하는 도구로 기능하는 가능성을 열었다. 90년대 시대적 상황의 산물인 티라바니자의 음식 프로젝트는 결국 빠르게 변모하는 글로벌 시대에서 공동체적, 사회적 문제를 직접 만나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장을 제공하여 사람들 사이의 직접적인 접촉을 지향했다.
한 공간 안에서 북적거리는 사람들, 피어오르는 수증기와 음식의 냄새, 떠들썩 한 분위기에서 낯선 이들과 같이 먹는 행위는 '먹는 쾌감'과 동시에 대화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는 쾌감'을 제공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어우러지고 소통하며 상호작용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들뜬 분위기 속에서 티라바니자가 대접하는 음식을 나눠먹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예술은 시대를 반영한다
비평가 니꼴라 부리오는 예술적인 활동을 '시대와 사회적 맥락에 따라 형태와 양상이 변화하고 가능성이 확장되는 게임'이라고 정의했다. 1990년대 이후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서 함께 변화를 감지하던 예술계는 다양한 형식으로 나타났고 더불어 새로운 담론들이 등장했다. 부리오의 '관계 미학'도 그중 하나다. 그는 현대 예술가들이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작업을 전개한다고 파악하고 "예술은 만남이다 (art is state of encounter)"라고 현대 예술을 정의했다. 티라바니자도 관계 미학을 실천하는 작가 중 하나다.
전시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관객 참여형 전시에 익숙할 것이다. 21세기의 예술은 시각적으로 거리를 두고 작품을 감상하는 방식을 넘어 관객이 직접 참여하고, 작품과 상호작용하며 창작 과정에 참여하는 '인터렉티브 아트'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관객은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이 아닌 창작의 과정에 함께하는 참여자가 되고 관객들의 적극적 개입으로 작품의 의미가 비로소 완성되었다.
예술에서 소통의 가능성을 열었던 관계 중심의 예술은 언택트 시대를 맞아 필연적으로 변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티라바니자가 음식을 접대하며 제공했던 공간은 불특정 다수가 모여 접촉하는 것을 의도하는 것인데 이는 앞으로의 삶의 방식에 있어서 가장 의도적으로 피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대학에 입학한 첫 해, 형식적인 오리엔테이션이 끝나면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뒤풀이 장소로 갔다. 우리는 그곳에서 옹성 옹성 모여 무언갈 먹고 마시며, 들뜬 분위기 속에서 서로를 알아갔다. 당연하게 여겨졌던 만남의 방식은 이제 당연하지 않다. 예술은 시대를 반영한다. 언택트 시대의 도래에 발맞출 예술은 어떤 형식으로 다가와 우리에게 어떤 가치를 전해줄지 고민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