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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고양이 Sep 29. 2021

Glass

와인잔이 어울리는 시간은 단연 늦은 저녁, 밤 시간일 겁니다. 밤이라고 해서 시끌벅적한 회식자리 말고요, 분위기 좋은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때라던 지 고독한 인간이 하루를 마감하는 장면에 어울려요. 낮보다는 밤이, 활기찬 온기보다는 차분한 습기가 저와 잘 맞는다는 느낌이 들어요. 딱 차가운 글라스에 한 두 방울 이슬이 맺힐 정도의 습기요. 저는 생동감 넘치게 뛰어다닐 때의 열기보다, 가만히 머리를 굴리며 시간을 최대한 느긋하게 늘이고 있을 때의 감각을 사랑합니다. 오늘같이 저녁 공기가 서늘한 날이면 창문을 반쯤 열어 두고 글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하며 분위기를 잡는데요, 지금 보니 저는 마침 아끼는 보라색 티셔츠를 입고 있네요. 여기서 고개만 좀 까딱이면, 와인을 반쯤 채운 잔이 휘 휘 돌아가는 모습과 꼭 겹쳐 보일 것 같네요. 


주류를 담는 잔들, 이를테면 소주잔, 맥주잔, 막걸리잔 등 여러 잔들 사이에서 와인잔은 뭐랄까, 가장 약해 보여요. 목이 길고 가는데다 얇어서 조금만 힘주어 닦으면 톡 하고 금이 가버립니다. 분위기 잡고 있다가도, 실수로 떨어트리기라도 하면 과한 존재감을 뽐내며 사방팔방으로 쨍그랑 깨지는데 이럴 때 보면 관심에 목마른 성격인가 싶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살짝 남은 손자국조차 허용하지 않는 투명함은 은근히 꾸준한 애정을 바라고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레스토랑에서 서빙하던 시절 수 없이 많은 와인잔을 나르고 닦고 광내면서, 아, 얘들은 진짜 예민하구나. 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민한 기질이 단점이 아니라 와인잔이 가진 탁월함이라는 점도 알았고요. 절대로 깨지지 않는 튼튼한 와인잔은 아름다울 수 없어요. 조심조심 다뤄야할 것 같은 포스를 풍길 때만이 애정을 사고, 빛을 내고, 특유의 분위기를 휘두르니까요. 


불안하기 때문에 완전한 존재. 허나 그 모순을 숨기지 않고 무기로 삼아 되려 애정을 요구하는 도도함을, 와인잔은 가졌습니다. 빛깔 좋은 와인을 찰랑이고 있을 때면 스스로 흠뻑 취해 빙글빙글 움직이는 게 자아도취가 따로 없어요. 예민한 천성과 새파랗게 물결치는 감수성, 때로 파도에 먹혀버릴까 두려워하면서도 파도가 내어놓는 결과물에 만족하고 자신을 흠뻑 사랑해버리는 나르시시스트, 제 얘기입니다. 스스로의 예민함을 받아들이고 불안을 껴안고 살고 있습니다. 바로 그곳에 저 만이 그릴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을 거라 확신하거든요. 특히 글쓰기를 시작한 이래로는 예민한 기질을 축복으로 느낍니다. 스스로를 연약하다며 연민하면서도 뭔가 있어 보이는 ‘와인잔’을 가져와서 닮았다고 하는 자기애도 참, 와인잔 같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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