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화를 마주하기
나는 평소 아이와 함께 동화책을 고를 때 '감정'이라는 주제에 유독 더 관심이 간다.
함께 골라온 책 더미 속에서 나는 내가 찾아온 '감정호텔'이라는 책을 슬쩍 내밀어 본다.
'감정은 다 역할이 있지, 버려지거나 미움받아야 할 감정은 없어'. 함께 감정동화를 읽으면서 나는 그런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었다.
이토록이나 감정조기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우리 아이와는 감정대화를 나누는 것이 어렵다. 아이는 부정적인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마음이 들었구나"하고 감정 읽어주기를 하면, 아이는 "그거 아닌데"로 되받아친다. 내 가슴은 또 부글거린다. 머리를 콩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소리 지르지 마, 화내지 마' 속으로 외친다.
2주 전에 아이는 전화 기능이 있는 어린이용 워치를 잃어버렸다. 맞벌이를 하게 되면서 아이의 위치나 상태를 파악하는 수단이 필요해졌다. 그것은 아이에게 온전히 맡긴 물건 중 가장 값비싼 물건이었다. 물건을 수시로 잃어버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되어도 크게 개의치 않는 아이였기 때문에 나는 걱정이 되었다. 당부에 당부를 거듭하고, 손목의 일부라고 생각하라는 험한 다짐까지 받아냈다. 그런데도 이미 두어 번 학교에 두고 왔고, 액정이 깨져서 한번 갈아 끼운 상태이다. 그런데 또 잃어버렸다는 말이다. 정말 속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여차저차 장황한 잔소리를 늘어놓고 2주에 걸쳐 우여곡절 끝에 학교에 두고 다니는 에코백에서 워치를 찾았다.
그런데 어제저녁 워치는 또다시 손목을 이탈해 신발주머니 구석에서 발견되었다. 나는 폭발했지만 온 힘을 다해 '아이에게 소리 지르면서 겁주지 마'라고 되뇌며 이성을 붙들었다. 아이가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손목에서 빼지 말라는 말에 끄덕여놓고는 하루 만에 빼버리고 함부로 다룬 것이 몹시 화났다. 나는 화가 난 자신이 너무 당황스럽다. 이 억눌러야만 하는 화가 너무나 번거롭고 밉기도 하다. 나를 화나게 한 것이 아이라고 생각해서 아이를 향한 원망도 했다. '이렇게나 감정에 흔들리다니' 그런 생각에 짜증이 더 솟구쳤다.
"엄마가 몇 번이나 이야기했지, 손목에서 빼놓지 말라고"
(잠시 쉬고)
"엄마가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지. 신발주머니에 다른 물건 넣어 다니지 말라고"
(잠시 쉬고)
"신발주머니에 넣었던 인형 빨래통에 넣고 와, 신발이랑 같이 있던 거니까 더러워"
(잠시 쉬고)
"워치 충전기에 꽂아놓고 숙제 가지고 와"
나는 잔소리를 멈출 수가 없는 기분이었다. 억누른 탓에 소리를 지르지 않았지만 내 목소리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아이는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내 눈치를 살피다가 나의 명령어에 따라 신속하게 움직였다. 아이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아이가 긴장했고, 혼날 것을 예상하고 위축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표정을 보니 '아차!' 싶었다. 잔소리를 멈추기 위해 온 힘을 기울여 브레이크를 밟았다. 정적이 찾아오자 숙제를 마친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아주 서러운 표정으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는데 우는 소리가 무음이었다. 그 순간 마음 어딘가에서 나사가 풀려버린 듯 덜컹하고 내려앉았다. 어제 종이 접기가 안된다고 짜증 내며 우는 아이를 비난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6살 아니고 8살이니까 울지 않고 말로 하는 거야. 네가 그렇게 하면 주변 사람 기분도 안 좋아지는 거야. 더 놀이를 할 수 없게 돼".
엄마의 목소리가 떠올랐을 아이는 마음 놓고 우는 게 어려워져 버렸다.
내담자들에게는 오감을 기울여 집중하고, 혹여 상처될까 단어하나도 신중히 골라 말하면서. 가장 소중한 아이에게는 마음껏 울지도 못하게 했다. '미움받아야 할 감정은 없어' 그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 책을 읽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정작 아이의 모든 감정을 그대로 인정해주지 못했다. 그중 일부는 내가 아주 미워하고 절대로 튀어나와서는 안된다고 엄포까지 놓지 않았던가.
아이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가 가만히 등을 다독였다. 그제야 아이는 소리를 내어 울었다. 아마도 아이는 엄마가 아주 화나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안도하면서 비로소 울게 된 것 같다. 한참을 울다가, 아이 물었다
"엄마는 다른 사람의 마음이 보일 때가 있어요?"
그렇다고 하면, 아이가 내 마음이 어떤지 아냐고 물어보려나? 내가 말하면 또 아니라고 하겠지?
"아니, 그 사람한테 물어봐야 마음을 알 수 있어. 그리고 그 사람이 솔직하게 말을 해 주어야 엄마가 알 수 있지."
그러니까 나는 아이가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말해주기를 바랐다. 그때 아이가 말했다.
"나는 사람들의 마음이 보일 때가 있어. 지금 엄마 마음이 어떤지 알아."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뜻밖의 말에 호기심이 발동되었다.
"엄마 마음이 어떤데?"
"엄마가 여러 번 얘기했는데도 내가 잊어버려서 답답해하고 있는 것 같아."
아... 그랬다. 들켰다. '답답해', '화났어' 직접 말하지 않아도 감정은 전해진다. 입 밖으로 꺼내지만 않으면 '나 화난 적 없어'하고 잡아뗄 수 있을 것 같아 온 힘을 다해 참았지만 고스란히 아이는 내 마음을 모두 느끼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했구나.. 사실 엄마도 어릴 때 너만큼 물건을 자주 잃어버렸어. 그래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사실은 지금도 가방을 뒤지다가 '이게 여기 있었네?!' 할 때가 있어"
마지막 대목에서 아이는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자기도 그런 경험이 있었던 모양이지. 왜 아니겠어. 사실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못 했다.
'그 생각은 못하고 화내서 미안해'
화나는 내 감정을 아닌 척하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하면 사실 정말로 화났었다고 인정해야 할 것 같아 그 말도 못 했다. '아이가 상처받을까 봐'라는 이유였지만 내 감정을 말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미움받아야 할 감정은 없어.'
내 마음의 한 부분에게 다가가 슬며시 말해주었다.
그 마음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안다.
내 생각대로 주변과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을 때 나는 무력감을 느낀다.
화나는 마음은 내가 무력감을 느끼지 못하도록 막아주고 있었다.
성실하게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며 살아왔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누군가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던 순간 고통스러운 무력감을 느꼈다.
그 무력감이 점점 자존감을 갉아먹었고, 생기 넘치던 의욕이 텅 비어버린 경험은 더욱 힘들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불같이 화가 나는 마음은 그 순간을 전후로 나타났다.
'나의 취약하고 연한 마음을 지켜주려고 했구나. 지금 나는 내 힘을 느낄 수 있어. 이제 너무 애쓰지 마. 왜냐하면 나를 지키느라 소중한 사람들을 아프게 할 때도 있거든'
수고한 마음에게 감사를 전한다. 이제 좀 쉴 수 있도록 다독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