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된 미움에게 말걸기
“인내심이 많은 상담자네요”
그 말을 듣고 처음에는 ‘열심히 했고, 열심히 하세요’ 같은 격려인 줄 알았다.
“그렇게 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나는 감사인사를 했다.
슈퍼바이저는 내가 정리한 상담사례를 보고는 ‘상담자의 무력감’을 느꼈다고 했다.
나도 그 대화를 나누던 순간에는 ‘내가 상담자로서 무엇을 더 할 수 있나’ 자포자기한 마음이었기에 무력감을 느낀다는 피드백에 반가운 동의를 표했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엊그제부터 무력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그보다 훨씬 전의 기록이 담겨있는 나의 보고서인데, 도대체 어디에서 무력감이 묻어났을지 궁금해졌다.
‘무력감을 찾자’
미션을 가지고 보고서를 다시 한번 읽어 내렸다.
아. 가엾다.
쉽지 않은 내담자를 만나 ‘무능감’을 매일 자극받고 좌절하여 무력해진 상담자가 보였다.
이토록이나 무력할만한 상황인데, 놀랍게도 나는 그 상담을 진행하면서 무력감을 인식하지 못했다. 상담을 마치고 나면 ‘내담자인 아무개 씨가 답답하겠다. 본인도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닐 텐데,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생각만 했다.
그 생각만이 전면에 나와있어서 나는 그런 마음만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구석에 찌그러져있는 무력감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보다 더 깊이 '미움'이 있었다. 미움을 느낄 바에야 무력감을 택한 거였다.
내가 만나는 모든 내담자들처럼 나에게도, 관심 밖으로 밀려난 나의 작은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그 부분은 ‘나 저 사람때문에 힘들어’ 또는 ‘저 사람이 싫어’하고 말하고 있다.
‘남을 미워하면 안 돼, 그 사람을 탓하면 안 돼, 다른 사람 때문에 힘들다고 하면 그 사람을 탓하는 거야’라는 마음의 훈계 때문에 평소에는 ‘힘들어, 미워’ 부분의 소리는 무시되거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아져 있어서 나는 거의 신경 쓰지 못하고 지낸다.
영원히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 부분이 견디다, 견디다가 폭발하는 날이 온다. 쌓여있던 미움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버리는 것이다.
나의 아이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진다. ‘좋은 엄마는 아이를 사랑해야 해. 아이 때문에 힘들어하면 안 돼, 아이를 탓하거나 화내면 안 돼’라는 훈계를 듣느라, 나는 참을 인을 가슴에 새기고 새기다가 피가 날 지경이 되어서 폭발해버리고 만다. 그렇게 분출하고 나면 ‘너는 좋은 엄마가 아니네, 좋은 엄마는 너처럼 화내지 않아’하는 비판자가 나타난다. 나는 작아지고, 슬퍼진다. 내가 한심하고 미워진다. 다행스럽게도 나에게는 ‘평소 좋은 엄마인 모습도 많아. 나아지려고 매일 노력하고 있잖아.’ 이야기해 주는 부분도 있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 사람을 탓하면 왜? 남을 탓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들면 왜? 무슨 일이 벌어지지?’
생각해 보니, 미워하는 마음으로는 돌보아야 할 사람들에게 응당 주어야 할 것(도움이나 사랑)을 주지 못할 것 같은 위기감이 느껴졌다. 힘듦이 잠깐이거나 순간 왔다가는 것일 수도 있는데, 영원히 그 사람을 미워하고 꼴도 보기 싫어질 것 같았다. 미움이라는 감정은 나에게 참 힘들었다. 내가 열심히 믿었던 교리에서도 타인을 사랑하라고 했고, 내 눈의 티끌을 먼저 보라고 했다. 나는 그 교리의 기준에 미치지 못할 때면 마음의 죄를 짓는 ‘죄인’이 된 기분에 자주 사로잡혔다.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이 나타나면 나의 마음의 부분들에게 혹독하게 비난 받았다.
‘감정은 언제나 정당하다.’
나는 그 말이 너무 좋다. 감정을 수용하라는 말보다 훨씬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쉽다.
내 미움도 정당하다.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나는 ‘누군가가 미워지는 마음’의 부분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본다.
‘미울만하다. 힘들만했다’
미움이 나타나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 먼 곳으로 추방되어 있던 부분이 갇힌 나의 마음속 감옥에 햇빛이 비치는 것 같다. 언젠가 감옥에서 풀려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