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高麗) 김용(金鏞) 사건을 다시 읽는다는 것

역사 재 해석

by 김희곤

김용(金鏞)이 이미 죽임을 당한 뒤에도, 왕(王)은 그를 잊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며 다시 탄식하였다. “이제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鏞旣誅, 王追念不已, 爲之泣下, 再嘆曰, 誰可恃者).”


고려 후기(高麗 後期)의 정치사는 늘 두 얼굴을 지닌다. 겉으로는 충절(忠節)과 역모(逆謀), 공신(功臣)과 역적(逆賊)의 이름이 선명하게 갈리는 듯 보이지만, 그 안으로 한 걸음만 더 들어가면 사정은 전혀 단순하지 않다. 궁정(宮廷)의 기록은 언제나 사실을 남기지만, 동시에 그 사실의 배열과 의미를 권력의 질서 속에서 정리한다. 그러므로 사서(史書)는 진실의 보관소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승리한 자의 언어가 굳어진 자리이기도 하다. 김용(金鏞)이라는 이름을 둘러싼 오랜 악명 역시 바로 그 경계선 위에 놓여 있다.


김용은 단순한 무장(武將)이 아니었다. 그는 공민왕(恭愍王)이 원(元)에 머물던 시절부터 곁을 지킨 측근이었고, 귀국 이후에도 왕권(王權)의 핵심 가까이에서 군사와 정무를 함께 다루었던 실력자였다. 그런 인물을 후대의 통설처럼 한낱 간신(奸臣)이나 역적(逆賊)으로만 밀어 넣는 것은, 정치의 복합성을 지나치게 평면화하는 독법일 수 있다. 물론 그가 권력의 중심에 있었고, 또한 그 권력을 사사로이 휘둘렀을 가능성 역시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한다. 권력의 심장부에 있던 인물은 대개 충신(忠臣) 아니면 역적(逆賊)이라는 두 극단의 이름으로만 남기 쉽고, 그 사이의 회색지대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특히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이후 정세운(鄭世雲)·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김득배(金得培) 등이 군공(軍功)을 세우고, 그 뒤 다시 연이어 제거되는 과정은 오늘날 통설이 말하듯 김용 개인의 시기심(猜忌心) 하나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고려사(高麗史)는 사건의 결과를 명료한 인과(因果)로 정리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실제 정치의 현장은 그처럼 깔끔하지 않다. 공민왕대(恭愍王代)의 정국은 반원(反元) 개혁, 군권(軍權)의 재편, 원로 대신(大臣)과 신진 세력, 왕권과 측근 정치가 첨예하게 교차하던 시기였다. 그런 국면에서 거대한 군공을 세운 장수들과 왕의 최측근이 마찰 없이 공존하리라고 보는 편이 오히려 더 순진하다. 그렇다고 해서 곧장 김용의 단독 음모를 확정하는 것 또한 지나치게 단순하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선악(善惡)의 판정이 아니라, 권력 구조 전체를 보는 눈이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김용 사건을 다시 읽어야 한다고 본다. 그를 무조건 변호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역사 속의 인물을 섣불리 결백한 피해자로 만드는 것 또한 또 하나의 낭만적 왜곡(歪曲)일 수 있다. 다만 우리는 너무 오래 승자(勝者)가 정리해 놓은 문장만으로 그를 읽어 왔다. 사서가 김용을 역적이라 적었다고 해서, 그 모든 사건의 인과가 자동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역적이라는 명칭은 종종 사건의 결론이지, 사건의 전모는 아니기 때문이다.


흥왕사(興王寺) 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다. 통설에 따르면 김용은 부하를 보내 공민왕(恭愍王)을 시해(弑害)하려 하였고, 왕은 미리 피신하였으며, 대신 침소(寢所)에 있던 환관(宦官) 안도치(安都赤)가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그 직후 김용은 관련자들을 신속하게 잡아들여 국문(鞫問)도 충분히 하지 않은 채 처단함으로써 비밀을 덮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서술은 너무 매끈하다. 정치적 사건이란 흔히 매끈하게 정리될수록 더 많은 것을 감추고 있다. 왕이 미리 피신했다는 사실 하나만 놓고 보아도, 이 사건은 단순한 칼부림의 차원을 넘어선다. 누가, 어느 시점에, 어떤 경로로 위험을 알렸는가. 왜 왕은 살아남았고, 안도치(安都赤)는 그 자리에 남아 있었는가. 그리고 사건 직후의 급박한 처분은 과연 증거 인멸이었는가, 아니면 혼란 속의 과잉 대응이었는가. 오늘 우리에게 남아 있는 기록만으로는 이 모든 질문에 단정적으로 답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 쉽게 “김용의 음모”라는 완성된 표제 아래 이 장면을 읽어 버린다.


물론 사료(史料)에는 김용에게 불리한 대목도 분명히 있다. 계림부(鷄林府)에서 국문을 받을 때 그는 “나는 상(上)을 범할 마음은 없었고 다만 홍 시중(洪侍中)을 제거하고자 했을 뿐”이라고 진술한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렇다면 어찌하여 안도치(安都赤)를 죽였느냐”는 추궁에는 답하지 못했다고 적혀 있다. 이 대목은 김용을 전면적으로 변호하려는 논리를 어렵게 만든다. 적어도 그는 자신이 완전히 무관하다고 끝까지 밀어붙이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가능한 해석은 둘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는 그가 실제로 일정한 정치적 제거를 기도했으나 왕 시해(王弑)까지는 의도하지 않았다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사건의 판이 그에게 불리하게 짜인 상태에서 부분만 인정하는 식의 방어에 몰렸다는 경우이다. 문제는 어느 쪽이든 사태가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사실 정치의 비극은 언제나 여기서 시작된다. 처음의 목적과 마지막의 이름이 서로 달라질 때이다. 누군가는 경쟁자를 제거하려 했을 뿐인데 역적이 되고, 누군가는 왕권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가장 위험한 측근을 숙청한다. 한 사람의 행위는 결코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 행위는 늘 더 큰 질서 속에서 해석되고, 그 해석은 대개 살아남은 자의 몫이 된다. 그러므로 김용 사건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단지 개인의 악의(惡意)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 악의가 어떤 구조 속에서 확대되고, 어떤 기록 속에서 확정되었는가를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한 사람의 죄를 읽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써 놓은 문장의 최종본만을 반복하게 된다.


김용 사후(死後) 공민왕(恭愍王)이 그를 잊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 역시 그런 점에서 예사롭지 않다. 이 장면을 곧장 김용의 무죄(無罪)를 입증하는 증거로 삼을 수는 없다. 왕이 죄인을 잊지 못한다고 해서 그 죄가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 장면을 단지 왕의 변덕이나 연민(憐愍)으로만 축소해 버리는 것도 충분한 독법은 아니다. 정치의 중심에서 함께 움직였던 자가 제거된 뒤, 왕은 누구보다 먼저 자신이 제거한 세계의 공백을 본다. 공민왕의 눈물은 한 충신(忠臣)에 대한 애도라기보다, 이제 더는 누구도 쉽게 믿을 수 없게 된 권력의 황량함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래서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誰可恃者)”라는 한마디는 김용 개인을 넘어, 공민왕대 정치 전체의 붕괴된 심리를 보여 주는 말로 읽힌다.


임용한의 가설처럼, 이 사건을 공민왕(恭愍王)이 김용(金鏞)을 활용해 군부 실력자와 부담스러운 대신들을 제거한 뒤 다시 그 책임을 김용에게 전가한 친위적 정변(政變)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 해석은 흥미롭고, 적어도 “통설을 흔드는 질문”으로서는 가치가 있다. 그러나 아직 그것을 확정적 사실처럼 쓸 단계는 아니다. 새로운 사료가 없는 한, 우리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층위를 나누어 말해야 한다. 다만 이 가설이 제기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존의 통설이 얼마나 쉽게 인물 하나에게 모든 악의 무게를 집중시켜 왔는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가장 쉬운 서술은 한 사람을 절대악(絶對惡)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서술은, 그 사람이 왜 그런 자리에 놓이게 되었는지를 구조 속에서 읽는 일이다.


결국 김용(金鏞)은 결백한 순교자(殉敎者)도 아니고, 모든 악을 혼자 꾸민 악마(惡魔)도 아니다. 그는 고려 후기(高麗 後期)의 권력 구조가 빚어낸 가장 불길한 인물 가운데 하나이며, 동시에 그 권력 구조의 희생자일 수도 있는 존재이다. 이 두 가능성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 속의 실력자는 흔히 가해자(加害者)이면서 피해자(被害者)이고, 충신(忠臣)이면서 역적(逆賊)이며, 왕의 칼이면서도 결국 왕에게 버림받는 존재이다. 김용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를 둘러싼 기록을 다시 읽어야 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우리가 다시 묻고자 하는 것은 “김용은 정말 역적이었는가”라는 단순한 물음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역적이라는 이름은 누가 붙이는가. 그리고 그 이름이 붙는 순간, 그 이전의 복잡한 정치적 맥락은 얼마나 빠르게 지워지는가.


역사(歷史)는 판결문(判決文)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판결문이 작성되기까지의 긴 협상과 생략과 두려움 위에 서 있다. 그러므로 김용 사건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단지 한 인물의 명예를 회복하자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서(史書)를 믿되 맹신하지 않는 태도, 기록을 따르되 그 기록의 문장을 구성한 권력의 손길까지 함께 읽어 내려는 태도를 요구한다. 나는 김용(金鏞)을 무죄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또한 그를 너무 쉽게 유죄라고 확정해 버리는 독법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역사 앞에서 필요한 것은 섣부른 단죄(斷罪)가 아니라, 끝내 사라지지 않는 의문을 붙들고 오래 바라보는 인내다. 김용이라는 이름은, 어쩌면 그 인내를 우리에게 요구하는 고려 말 정치사의 가장 음울한 시험 문제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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