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대 영문과
아내는 지적인 남자에 약했다.
적어도 그때의 나는 그렇게 믿었다.
근육도, 패션도, 돈도 아니었다. 두툼한 영어 원서를 아무렇지 않게 읽는 남자. 신문 대신 《TIME》이나 《Newsweek》를 펼치는 남자. 소개팅을 주선한 친구가 은근히 귀띔해 주었다.
“그 친구, 그런 스타일 좋아해.”
문제는 내 영어 실력이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어딘가에 정직하게 멈춰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기회는 왔고, 나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약속 장소는 신촌 독수리 다방.
소개팅 날짜가 잡히자마자 나는 전날부터 준비에 들어갔다.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을 앞둔 직장인처럼 긴장했다.
서점으로 직행했다.
최신 《TIME》 한 권.
그리고 두꺼운 영어 원서 한 권.
제목은 거창할수록 좋았다. 국제정치, 세계경제, 법철학 비슷한 냄새가 나면 더할 나위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두께였다. 얇으면 신뢰가 떨어진다. 지성은 물리적 부피에서 나온다고, 그때의 나는 진지하게 믿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의식을 치렀다.
붉은 사인펜을 들고 여기저기 밑줄을 그었다. 단어 뜻은 몰랐지만 줄 긋는 손놀림만큼은 그럴듯했다. 페이지를 몇 번이고 넘겨 가장자리를 살짝 구겼다. 표지도 일부러 조금 눌러 꺾었다.
읽는 시간보다 연출 시간이 훨씬 길었다.
당일, 나는 약속 시간보다 스무 분 먼저 도착했다.
창가 자리. 조명도 적당했다.
책은 중간쯤 펼쳐두었다. 너무 앞이면 방금 시작한 티가 나고, 너무 뒤면 다 읽은 사람처럼 보일까 봐 어색했다. 나는 세밀하게 계산했다.
쌍화차를 시켜놓고 책을 읽는 척했다.
스스로도 꽤 괜찮은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여유 있게 책갈피를 끼웠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니요. 그냥 읽던 게 있어서요.”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책으로 향했다.
아주 미묘하게, 입꼬리가 움직였다. 그때는 그것이 감탄인지 웃음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대화는 나름 흘러갔다.
나는 아는 범위 안에서만 말했고, 모르는 것은 최대한 추상적으로 처리했다.
국제 정세는 “복잡하죠.”
경제 문제는 “구조적인 이슈가 있죠.”
구체를 피하고 개념으로 도망치는 기술을, 나는 그날 처음 배웠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관계는 빠르게 진전됐다.
나는 속으로 환호했다.
지적 이미지 전략, 성공.
결혼은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졌다.
문제는 신혼여행 첫날 밤에 터졌다.
아내가 가방에서 영어책 한 권을 꺼냈다.
호텔 침대 위에 앉아 태연하게 말했다.
“이거 좀 해석해줄래?”
나는 책을 받아 들었다.
첫 문장을 더듬더듬 읽다가 멈췄다. 두 번째 줄에서 이미 길을 잃었다.
결국 고백했다.
“사실은… 반쯤은 연출이었어. 아니, 거의 전부.”
아내는 한참을 웃었다.
“알고 있었어.”
“뭘?”
“사인펜 줄이 전부 문단 첫 줄에만 있더라. 진짜 읽는 사람은 그렇게 안 해.”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독수리 다방 그날,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미 들킨 김에 물었다.
“그럼 왜 결혼했어?”
아내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책 읽는 척하면서 그렇게까지 공들여 준비한 게 귀여웠어.”
치밀하게 설계한 브랜딩 전략의 결말이 ‘귀여웠다’라니.
나는 웃어야 할지, 부끄러워해야 할지 몰랐다.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나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내 인생 최고의 프로젝트는 브랜딩이었지.”
아내는 웃으며 받아쳤다.
“브랜드는 과장이었지만, 사람은 괜찮았어.”
그 말이 오래 남았다.
그래서였다.
퇴직 후 나는 방송통신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사기 결혼은 했어도, 지성은 후천적으로라도 갖추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공부는 쉽지 않았다.
젊은 시절 미뤄둔 영어가 빚처럼 돌아왔다. 건강도 조금 해쳤다. 그래도 끝까지 했다. 졸업장을 받는 날, 나는 독수리 다방의 창가 자리를 떠올렸다.
그때 펼쳐놓았던 영어 원서.
이제는 문장을 절반쯤은 이해할 수 있다.
사인펜 줄이 아니라, 실제로 밑줄을 긋는다.
가끔 아내가 묻는다.
“지금은 진짜 읽는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응. 이제는 진짜야.”
지성은 연출로 시작했지만,
공부는 결국 진심이 되었다.
독수리 다방의 TIME지는
내 인생에서 가장 솔직하지 못했던 물건이었지만,
가장 오래 나를 밀어준 책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