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가 빨라야 절에 가도 새우젓을 얻어먹는다.
우리 집에도 ‘鷄同鴨講’이 찾아왔다.
닭과 오리가 마주 보고 서서 각자 제 말만 늘어놓는 형국이다. 분명 같은 마당에 서 있는데, 서로의 언어 체계는 전혀 다르다. 예전에는 이 말을 외국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상황에 빗대어 썼다. 여행지에서 현지어를 몰라 손짓 발짓으로만 대화할 때, 그럴 때나 등장하는 고사인 줄 알았다.
그런데 요즘, 이 사자성어가 우리 집 거실 한복판에 버젓이 앉아 있다.
“그거 있잖아.”
내가 운을 떼면,
“그게 뭔데?”
아내는 단호하다. 예전 같으면 “아, 그거?” 하며 정확히 집어냈을 문장을, 이제는 끝까지 설명하라며 따박따박 되묻는다. 마치 법정에서 증인신문을 받는 피고인 심정이다.
한때는 내가 “그거”라고만 해도, 아내는 날짜와 장소, 등장인물, 심지어 내 감정 상태까지 복원해냈다. 개떡처럼 던진 말도 찰떡처럼 받아내는 능력. 나는 그걸 사랑이라 불렀고, 속으로는 ‘이 정도면 동시통역사 자격증을 줘야 하는 것 아닌가’ 감탄했다.
그런데 요즘은 다르다.
“그거 있잖아, 지난번에 그… 그 사람…”
“어느 사람?”
“아, 그… 거기서 만난…”
“어디?”
질문이 꼬리를 문다. 나는 점점 구체성을 강요받는다. 날짜, 장소, 사건의 맥락을 차례로 진술하지 않으면 대화가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는다. 예전엔 직관으로 처리되던 일이, 이제는 증거 제출 단계로 넘어간 셈이다.
눈치가 빨라야 절에 가도 새우젓을 얻어먹는다는데, 이 집에서는 눈치 대신 설명서가 필요하다. 혹시 아내의 총기가 떨어진 걸까. 아니면 내 말이 점점 추상명사로 변해가는 걸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문제는 아내가 아니라 나일지도 모른다. 나는 점점 ‘그거’, ‘그 사람’, ‘그때’ 같은 대명사로만 세상을 설명하려 한다. 주어도 목적어도 없이, 맥락을 통째로 상대에게 떠넘긴다. 과거의 아내는 그것을 다 받아내 주었지만, 이제는 말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어쩌면 이것은 소통의 퇴화가 아니라 진화인지도 모른다. 대충 말해도 통하던 시절은 감각의 시대였고, 지금은 논리의 시대다. 닭이 “꼬끼오”만 외쳐도 오리가 알아듣길 기대하는 건, 솔직히 무리다.
그래도 가끔은 서운하다.
“그거 있잖아” 한마디에 눈빛으로 통하던 그 시절이.
오늘도 나는 문장을 완성한다.
“지난주 토요일에, 우리 동네 마트에서, 김치코너 옆에서 만난 그 이웃 말이야.”
그러면 아내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 그 사람?”
그 순간, 우리 집의 ‘鷄同鴨講’은 잠시 휴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