危座
우리는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게 세워 앉은 뒷모습에서 단정함과 공경을 읽어낸다. 한국에서는 이를 정좌(正坐)라 하고, 일본에서는 세이자(正座)라 부른다. 겉모습은 쌍둥이처럼 닮았으나 그 속에 흐르는 역사의 맥락은 판이하다. 이 차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동양 유학의 수양론이 머물렀던 자리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정좌(正坐)는 중국 송대(宋代)에서 시작된다. 유학자 주돈이(周敦頤)는 고요함을 지키는 주정(主靜)을 강조했는데, 이는 단순히 멍하게 앉아 있는 상태가 아니라 마음의 흩어짐을 거두어 중심을 세우는 치열한 공부였다. 주희(朱熹)는 “하루의 절반은 독서, 절반은 정좌”를 권하며 이를 수양의 필수 궤도로 올렸다. 다만 여기서 짚어둘 것이 있다. 당시 중국은 이미 의자 생활이 보편화된 사회였으므로, 주희가 말한 정좌는 반드시 무릎을 꿇는 고통스러운 자세만을 가리키지 않았다. 의자에 앉든 바닥에 앉든, 허리를 펴고 사사로운 욕심(人欲)을 걷어내는 성찰적 태도가 본질이었다. 중국의 정좌는 자세 그 자체보다 마음의 중심을 잡는 거경(居敬)의 방편이었던 것이다.
이 사상은 고려 말 안향(安珦)과 백이정(白頤正)을 통해 한반도에 상륙하며 조선 선비들의 마음공부로 뿌리내렸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경(敬)을 중심에 두고 정좌를 통해 내면의 산란함을 경계했다. 조선의 정좌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용 예법이 아니었다. 스스로 천리(天理)를 보존하고 인격을 벼리는 지독한 자기 검열의 시간이었으며, 무릎을 꿇는 행위는 외부의 압력이 아니라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한 자발적 선택이었다. 조선의 무릎 꿇기는 하늘 앞에 단독자로 서기 위한 구도(求道)의 자세였다.
반면 일본의 세이자는 전혀 다른 토양에서 형식화되었다. 무릎을 꿇는 자세 자체는 고대부터 존재했으나, 이를 올바른 앉는 법으로 제도화한 것은 에도 시대(江戶時代) 막부 정치의 산물이다.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는 권력 질서를 시각화하기 위해 세이자를 의례화했고, 참근교대(參勤交代) 제도로 에도성(江戶城)에 모인 다이묘(大名)들은 쇼군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이 자세는 물리적으로도 의미심장하다. 무릎을 꿇고 오래 앉으면(危座) 다리가 저려 갑작스러운 공격이나 돌발 행동이 어렵다. 결국 세이자는 쇼군에 대한 절대적 복종과 충성을 상징하는 정치적 장치였던 셈이다.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들어서며 이 무가(武家)의 예법은 학교 교육을 통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근대 국가 건설을 추진하던 정부는 통일된 국민 예절이 필요했기에 이때 비로소 ’세이자(正座)’라는 명칭이 보편화되며 일본 고유의 전통으로 재포장되었다. 고대부터 이어진 관습이라기보다 근대적 필요에 의해 재구성된 문화적 기획에 가까웠던 것이다.
결국 같은 자세라도 그 안에 담긴 심장은 달랐다. 한국의 정좌가 나를 향한 성찰이자 도덕적 확신을 얻는 과정이었다면, 일본의 세이자는 타인을 향한 예법이자 집단 질서에 편입되는 과정이었다. 한쪽은 내면의 자유를 위해 무릎을 꿇었고, 한쪽은 집단의 규율을 위해 무릎을 꿇었다. 우리가 전통이라 믿는 많은 모습은 사실 시대가 빚어낸 사상의 결과물이다. 자세의 닮음보다 그 속에 담긴 철학의 차이를 볼 때, 비로소 문화의 깊이가 보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