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극장의 기억과 아이린 던에 관한 단상

마지막 30분

by 김희곤

EBS에서 우연히 흘러나오던 영화 한 편이 나를 반세기 전 골목으로 데려갔다. 제목은 《러브 어페어(Love Affair)》. 화면 속 여주인공은 아이린 던(Irene Dunne)이었다. 주름 한 점 없이 고요한 얼굴, 단정한 눈빛, 절제된 미소. 나는 순간 숨을 고쳤다. 리모컨을 내려놓았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난 배우이고, 내 할머니보다도 나이가 많았던 여인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내 가슴은 아직 그 이름에 반응한다. 어린 시절 이유도 모른 채 설레던 감정이 다시 미세하게 흔들렸다. 마치 오래 닫아두었던 창문을 열었더니, 바깥에는 여전히 그 골목의 냄새가 남아 있는 것처럼.


내가 자라던 동네에는 '태평극장'이 있었다. 간판의 페인트는 벗겨지고, 전구 몇 개는 늘 꺼져 있었지만, 그곳은 내게 세상의 창문이었다. 우리는 극장 앞을 서성이며 마지막 상영 시간을 기다렸다. 문 앞에 서서 안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빛과 소리를 훔쳤다.


기도 아저씨는 가끔 마지막 삼십 분 남겨 둔 무렵에 우리를 들여보내 주었다. 아마도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빈 좌석에 아이들을 들이는 일이 극장에 손해일 것도, 이득일 것도 없다는 사실을. 그것은 일종의 온정이었다. 혹은 그 자신도 젊은 시절 어디선가 마지막 삼십 분을 훔쳐보던 아이였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늘 영화의 끝만 보았다. 시작도, 맥락도 몰랐다. 이미 한창 진행된 이야기의 결말 부분.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다시 만났다. 줄거리는 몰라도 표정은 기억했다. 특히 여배우의 얼굴은 오래 남았다. 맥락 없는 감정들이 오히려 더 순수하게, 더 강하게 피부에 닿았다. 이유를 모르니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받아들였다.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나이에 사랑 비슷한 감정을 품었다. 그것은 소유가 아니었고, 욕망도 아니었다. 그저 화면 속 인물이 웃으면 나도 따라 웃고, 그녀가 슬퍼하면 이유 없이 가슴이 먹먹해지는 그런 종류의 동경이었다. 그 감정에는 이름이 없었고,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사라지지도 않았다. 이름이 붙으면 경계가 생기고, 경계가 생기면 소멸이 시작된다.


어쩌면 그때의 나는 이야기를 본 것이 아니라 '빛'을 본 것인지도 모른다. 영사기에서 쏟아지던 하얀 빛, 스크린 위에 맺히던 서양 여인의 얼굴, 그리고 그 빛을 바라보던 내 눈동자. 세계는 흑백이었지만 감정은 선명했다. 무지갯빛보다 선명한 흑백이라는 것이 있다. 태평극장의 스크린이 그랬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흑백의 화면이 오히려 상상의 여지를 넓혀주었는지도 모른다. 색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각자의 색을 입혔다. 아이린 던의 드레스가 어떤 색이었는지, 그녀의 입술이 어떤 빛이었는지, 극장을 나온 뒤에도 한참 궁금해했다. 완성되지 않은 그림이 더 오래 기억에 머무는 법이다.


전체 줄거리를 모른 채 본 영화들은 내 기억 속에서 늘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미완성 덕분에 오히려 더 오래 남았는지도 모른다. 온전히 이해한 것들은 이해의 순간 끝난다. 이해되지 않은 것들은 평생 가슴속 어딘가에서 계속 질문을 던진다. 마지막 삼십 분만 본 영화들은 내 안에서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앞부분은 내가 채워 넣었고, 앞부분이 달라질 때마다 영화 전체가 달라졌다.


삶도 비슷하다. 우리는 대개 결말을 모른 채 중간 장면들만 건너다닌다. 타인의 삶이란 결국 우리가 우연히 들어간 그 마지막 삼십 분이다. 처음도 모르고 끝도 모른 채 잠깐 옆에 앉았다가 각자의 극장 문을 나선다. 그래도 어떤 얼굴, 어떤 눈빛은 마음 어딘가에 박혀 평생을 따라온다. 이름 모를 사람이 준 온기가 수십 년을 버티게 해주기도 한다. 기도 아저씨처럼.


오늘 EBS 화면 속 아이린 던은 여전히 단정했다. 세월은 배우에게 주름을 남겼을지 모르지만, 내 기억 속의 그녀는 늘 마지막 삼십 분 속 여인으로 남아 있다. 흑백 스크린 위에, 영사기 불빛을 등에 지고, 고요하게 미소 짓던 그 얼굴. 그것은 필름 위에 새겨진 이미지가 아니라, 열두 살 소년의 망막에 새겨진 빛의 기억이다.


태평극장 앞에서 어정거리던 아이는 어느덧 노인이 되었지만, 가슴을 뛰게 했던 그 감정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첫사랑이라 부르기에는 어설프고, 추억이라 하기에는 아직도 미묘하게 현재형이다. 동경이라 하자. 혹은 그냥 '빛을 향해 몸을 기울이는 식물의 성질' 같은 것이라 하자. 살아 있는 것들은 빛 쪽으로 자란다. 나는 태평극장의 빛 속에서 자랐다.

영화는 끝났지만, 극장은 내 안에 아직도 문을 닫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