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자리는 먼 곳에 없다.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by 김희곤

말하자면,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살기 좋은 곳”은 지도 위의 다른 좌표에 찍혀 있는 이상향이 아니라, 지금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자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입만 열면 “헬조선”이라 자조한다. 그러나 막상 해외에 나가 보면 다른 장면이 펼쳐진다. 한국 여권의 위상, 길거리에서 흘러나오는 한국 음악, OTT를 점령한 K-콘텐츠, 외국 서점에 꽂힌 번역 한국 문학. 아직 일본의 문화적 저력에는 미치지 못한다 해도, 1980년대 미국에서 내가 받던 대접과 견주면 분명 격세지감이다. 그때의 우리는 변방이었고, 지금의 우리는 더 이상 주변이 아니다.


이 변화는 외국인들의 경험을 통해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한국에서 1~2년 살다 본국으로 돌아간 이들이 겪는 이른바 ‘역문화충격’은 상징적이다. 서울의 촘촘한 지하철망, 밤늦게까지 불 켜진 편의점, 당일·익일 배송의 속도, 고장 나면 곧바로 달려오는 서비스 기사. 이런 환경에 익숙해진 사람이 미국이나 유럽의 중소도시로 돌아가면, 자동차 없이는 이동이 어렵고, 가게는 일찍 문을 닫고, 행정은 더디고, 수리 하나도 예약부터가 일이다.


한국에서는 테이블 벨을 누르면 곧바로 직원이 온다. 팁을 고민할 필요도 없다. 밤늦게 혼자 걸어도 비교적 안전하다는 감각이 있다. 그런데 본국으로 돌아가면, 웨이터를 한참 기다려야 하고, 팁 계산이 신경 쓰이고, 밤거리는 조심스럽다. 음식은 각자 접시에 나눠 먹고, 공공장소는 지나치게 정숙하거나 오히려 공격적이다. 한국에서 느꼈던 ‘관계의 밀도’가 사라지면, 그 공백은 어느새 외로움으로 번진다. 어떤 이는 우울감을 호소하고, 어떤 이는 결국 다시 한국행을 선택한다. 적응에는 몇 달, 때로는 몇 년이 걸린다. 한국 생활이 일종의 ‘중독’처럼 느껴진다는 고백도 나온다.


우리가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 사이, 누군가는 이 사회의 편리함과 안전, 관계의 온기를 그리워하고 있다. 물론 문제는 있다. 과로도, 경쟁도, 불평등도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나 장점 또한 실재한다. 한 단면만 확대하면 현실은 왜곡된다.


가정도 마찬가지다. SNS 속 타인의 삶은 언제나 윤이 난다. 여행, 성취, 화목, 고급 레스토랑의 사진들. 그러나 우리는 그 이면의 갈등과 고독, 결핍을 알지 못한다. 과도하게 자랑하는 이는 어쩌면 무언가를 보상받고 싶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비교는 타인의 편집본과 나의 생방송을 견주는 일이다. 애초에 공정하지 않다.


못나도 내 아내가 최고이고, 속 썩여도 내 자식이 아픈 손가락이다. 남의 집 잔디가 더 푸르게 보여도, 정작 내 무덤가에 와서 기일을 기억해 줄 사람은 그들이다. 인생의 말미에 남는 것은 화려한 평판이 아니라, 관계의 결이다.


구상 시인의 구절이 떠오른다.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가시방석은 관점의 언어이고, 꽃자리는 깨달음의 언어다. 같은 자리, 다른 해석. 우리는 자꾸 어딘가로 떠나야만 꽃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꽃은 이미 발밑에서 피고 있는지도 모른다.


살기 좋은 곳은 멀리 있지 않다. 아름다운 세상도 은밀한 골짜기에 숨겨져 있지 않다. 한 걸음 물러나 돌아보는 순간, 있는 자리에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다. 문제는 장소가 아니라 시선이다. 우리가 바꿔야 할 것은 주소가 아니라, 마음의 초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