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를 죄악시하는 사회에서 자본은 국경을 넘는다.

경제의 순환 구조

by 김희곤

우리 사회에는 부를 드러내는 행위에 유난히 엄격한 시선이 따라붙는다. 고가의 소비를 하면 ‘과시’라는 비판이 뒤따르고, 정치권은 평등을 내세우며 고소득층의 소비 행태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댄다. 그 결과 부유층은 국내에서조차 눈치를 보며 지갑을 닫게 되고, 상당한 소비가 해외로 빠져나가는 현상이 반복된다.


이 문제의 본질은 감정이 아니라 경제의 순환 구조다. 자본주의에서 소비는 단순한 사치가 아니라 소득과 고용을 만들어내는 동력이다. 특히 고소득층의 소비는 규모가 크고 파급효과 또한 크다. 고급 외식, 문화·예술 후원, 관광·호텔·서비스 산업, 프리미엄 제조업 등은 고가 소비가 뒷받침되어야 유지되고 성장한다. 이 소비가 국내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해외로 향한다면, 일자리와 세수, 산업의 성장 기회 역시 함께 빠져나간다.


물론 한국의 자본 축적 과정에서 일부 기업과 재벌이 정책적 특혜를 발판 삼아 성장한 측면이 있었음은 사실이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이 공정성 논의를 정당화하는 배경이 된다는 점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과거의 특혜 문제를 이유로 현재의 모든 소비 행위를 도덕적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또 다른 왜곡이다. 공정 경쟁 질서를 바로잡는 일과, 합법적으로 형성된 자산의 소비를 위축시키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경제는 도덕 감정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자본이 국내에서 투자되고 소비되어야 산업이 확장되고, 세수가 늘고, 고용이 유지된다. 부를 가진 이들이 국내에서 당당하게 소비하고, 투자하고, 기부하고, 문화적 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때 경제는 더 큰 활력을 얻는다. 반대로 사회적 비난과 정책적 압박이 소비를 위축시키면 자본은 조용히 국경을 넘는다. 글로벌 이동이 자유로운 시대에 자본은 언제나 가장 편안한 곳을 선택한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부유층을 제약할 것인가’라는 이분법이 아니다. 공정한 제도 안에서 형성된 부가 국내 경제 안에서 순환하도록 만드는 환경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있다. 탈세와 불공정 특혜는 엄격히 규제하되, 합법적인 부의 형성과 소비를 죄의식의 대상으로 만드는 분위기는 경계해야 한다. 소비가 국내에서 이루어질 때 그 혜택은 고급 산업에만 머물지 않는다. 연쇄적으로 중소업체와 지역 경제 전반으로 확산된다.


건강한 자본주의가 지향해야 할 것은 ‘평등한 가난’이 아니라 ‘공정한 기회와 활발한 순환’이다. 부를 통제하는 사회가 아니라, 부가 책임 있게 쓰이고 다시 경제로 돌아오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생산적인 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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