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를 잘 두어야 이긴다.
나는 아직 산둥성(山東省) 취푸시(曲阜市)의 '공자(孔子)'를 모시고 기리는 사당(祠堂)인 문묘(文廟)인 '공묘(孔廟)'를 가 본 적이 없다. 성균관 한림원 재학 시 기회를 놓쳤다
가 본 사람에 의하면 공자 사당에는 一聖四配라 하여 1성(聖): 공자(孔子). 4배(配): 맹자(孟子),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가 함께 배향되어 있다고 한다.
공문 십 철(孔門十哲)이라 해서 공자 제자 삼천 명 중 열 명을 꼽는다. 논어를 처음 읽다 보면 자(字)와 호(號) 이름이 뒤섞여 헷갈린다.
나의 남고 스승님으로 부터
“ 孔子對曰 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공자대왈 유안회 자호학하여 불천노하며 불이과하더니….”로 읽다가 근본 없는 놈이라고 찍혔다.
아성의 이름은 ‘모’로 읽어야 하는데 공자처럼 이름을 입에 담았기 때문이다.
논어에는 공자 외엔 이름을 부른 구절은 없다. 논어를 편찬 한 제자들 입장에선 십 철도 다 스승이나 선배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앞은 자(字)이고 뒤는 이름이다. 안연은 자이고 안회는 이름이다. 자공은 자이고 이름은 단목사이다.
덕행: 안연(顔淵:안회顔回), 민자건(閔子騫:민손閔損) 중궁(仲弓:염옹冉雍), 백우(伯牛:염경冉耕)
정사: 계로(季路:중유仲由), 염유(冉有:염구冉求)
문학: 자유(子游:언언言偃), 자하(子夏:복상卜商)
언어: 재아(宰我:재여宰予), 자공(子貢:단목사端木賜).
자로(子路)는 계로(季路)도 자(字)이지만 주로 자로로 불렸다. 무식한 나는 서로 딴 사람인 줄 알았다.
이야기가 빗나갔지만 공자 사당에는 그 많은 제자 중 특히 자로, 자공을 젖히고 공문십철에도 들지 못했던 자여(子輿)가 어이하여 떡 하니 버티고 있나?
공자가 띨빵한 놈(參也魯)으로 평한 증삼(曾參, 子輿)
“魯, 鈍也.”
노(魯)는 노둔함이다. 아둔한 놈이다.
사마천의 [중니제자열전]에는 “증삼은 남무성 사람이다. 字는 자여이다. 공자보다 46세 연하이다. 그는 [孝經] 을 지었다. 노나라에서 생애를 마치었다.”라고 되어 있다.
程子曰 “參也竟以魯得之.”
정 명도가 “증삼은 마침내 노둔함으로 터득했다.” 말했다지만 증자의 《대학(大學)》, 자사의 《중용(中庸)》을 공부한 맹자 덕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결론은 ‘적어야 산다.’ 그리고 ‘제자를 잘 두어야 스승이 빛난다.’이다. 안연의 저술이 없는게 아쉽다.
사상은 천재가 만들고, 학파는 편집자가 만든다
역사에 오래 남는 영향력은 대개 사상의 창안(創案) 자체보다 그것을 기록하고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더 크게 확장된다.
새로운 사상은 한 사람의 통찰(洞察)에서 시작될 수 있다. 그러나 그 통찰이 기록되지 않으면, 한 세대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기 쉽다. 반대로 기록되고 정리된 사상은 개인의 생애를 넘어 시대를 건너 전해진다. 역사 속에서 영향력이 지속되는 사상들은 대부분 이 두 과정을 거쳤다. 창안과 전승(傳承), 통찰과 기록의 결합이다.
유학(儒學)의 전통에서도 이 점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공자(孔子)는 스스로 책을 저술한 인물이 아니다. 그의 사상은 제자들의 기억과 기록을 통해 전해졌다. 그 가운데 안회(顔回)는 공자가 가장 아끼던 제자로 알려져 있지만, 독립적인 저술은 남기지 않았다. 그는 공자의 도(道)를 가장 순수하게 실천한 인격적 제자로 기억된다. 그러나 후대의 학문 체계 속에서 사상이 확장되고 정리되는 과정에서는 다른 유형의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기록하고 정리하는 사람들이다.
증자(曾子)의 경우가 그렇다. 공자가 “노둔하다“고 말한 제자였지만, 후대 유학 전통에서 그의 위치는 결코 작지 않다. 증자 계통의 학맥(學脈)은 공자의 가르침을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논어(論語)》의 편찬 전통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예기(禮記)》 속에 있던 《대학(大學)》이 후대 유학에서 핵심 경전으로 자리 잡는 과정 역시 이 학맥과 관련되어 논의된다. 공자의 사상이 단순한 구술(口述)의 기억이 아니라 하나의 학문 체계로 전승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기록과 정리의 노력이 있었다.
이 점에서 역사에는 반복되는 하나의 구조가 있다.
사상은 천재가 만들지만, 학파(學派)는 편집자가 만든다.
사상의 탄생은 종종 한 사람의 통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 통찰이 학문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정리와 해석, 기록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사상은 체계를 갖추고, 학파를 형성하며, 시대를 넘어 전승된다.
서양 철학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Socrates)는 스스로 글을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사상은 제자 플라톤(Plato)의 기록을 통해 후대에 전해졌다. 만약 그 기록이 없었다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한 철학자로만 기억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록은 사상을 보존할 뿐 아니라, 그것을 확장하고 새로운 해석을 낳는 토대를 마련한다.
그래서 학문의 역사에서 기록(記錄)은 단순한 보존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사상을 시간 속에 정착시키는 작업이다. 기록된 사상은 다시 읽히고 해석되며, 새로운 시대 속에서 재구성된다. 기록이 있는 사상은 살아남고, 기록이 없는 사상은 기억 속에서 점차 흐려진다.
결국 학문의 생명은 두 종류의 인물에 의해 유지된다. 하나는 새로운 사유를 열어젖히는 창조적 사상가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사유를 정리하고 전승하는 기록자(記錄者)이다. 역사에 오래 남는 영향력은 이 둘의 결합에서 탄생한다. 뛰어난 사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것을 남기는 기록이 필요하다.
사상은 천재가 만들고, 학파는 편집자가 만든다. 그리고 그 편집자의 기록 속에서 사상은 비로소 시간을 넘어 살아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