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덫, 혹은 내면의 용수철(평론)

황인숙과 융을 함께 읽는 한 방식

by 김희곤

황인숙,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보라, 하늘을.

아무에게도 엿보이지 않고

아무도 엿보지 않는다.

새는 코를 막고 솟아오른다.

얏호, 함성을 지르며

자유의 섬뜩한 덫을 끌며

팅! 팅! 팅!

시퍼런 용수철을

튕긴다.


황인숙의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는 얼핏 자유의 찬가로 읽힌다. 하늘은 열려 있고 새는 치솟으며 함성은 경쾌하다. 그러나 독자는 곧 위태로운 감각에 붙들린다. 이 시의 핵심 정조는 해방의 환희가 아니라, 자유라는 기표 뒤에 숨은 불안과 현기증이다. 시가 보여주는 것은 평온한 비상이 아니라, 자유를 향해 솟구치면서도 끝내 어떤 덫을 끌고 가는 존재의 형상이다.


“보라, 하늘을.” 이 첫 행은 높이와 개방을 즉각 호출한다. 이어지는 “아무에게도 엿보이지 않고 / 아무도 엿보지 않는다”는 진술은 감시 부재의 절대 공간을 암시한다. 그러나 무구한 개방성은 곧 고립으로 치환된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관계의 소거다. 이 시의 하늘은 낭만적 초월의 공간이기보다, 타자가 지워진 채 오로지 비대한 자기 자신과 마주해야 하는 차갑고 무한한 공백에 가깝다.


“새는 코를 막고 솟아오른다.” 이 구절은 기이하고 결정적이다. 비상은 본래 자연스러운 운동이어야 하나, 시는 이를 숨을 멈춘 채 감행하는 고통스러운 행위로 변주한다. 코를 막는다는 것은 생리적 자연성을 거스르는 저항이다. 비상은 생명의 분출이 아니라, 견디기 어려운 조건을 억지로 돌파하는 무리한 도약이 된다. 자유는 주어지는 상태가 아니라, 숨을 죽이고라도 건너야 하는 위험한 도박이다.


가장 탁월한 역설은 “자유의 섬뜩한 덫”에 응축되어 있다. 자유는 풀림이고 덫은 얽매임이다. 황인숙은 이 모순된 결합으로 자유의 이면을 폭로한다. 자유는 보호막의 소멸이기도 하다. 기대던 틀이 무너지고 책임의 무게가 전적으로 자신에게 귀속될 때, 자유는 해방이 아닌 공포로 돌변한다. 새가 끄는 덫은 외부의 족쇄가 아니다. 자유 자체가 불러오는 내적 긴장이자, 미처 해소되지 않은 자기 내부의 무게다.


“팅! 팅! 팅! / 시퍼런 용수철을 / 튕긴다.” 종결부에서 새는 생명체가 아닌 기계적 탄성으로 치환된다. 용수철은 스스로 날지 않는다. 외부 압력과 내적 장력의 반동으로 튕겨 나갈 뿐이다. 이 비상은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억압의 축적이 만든 반발 운동에 가깝다. ‘시퍼런’이라는 색채는 청명함보다 차갑고 날 선 긴장을 부각한다. 압력에 시달려 온 존재가 가까스로 튕겨 오르는 순간의, 섬뜩한 기하학이다.


칼 융은 의식되지 못한 내면의 상황이 운명이라는 이름의 외부 사건으로 나타난다고 통찰했다. 황인숙의 새는 바로 그 무의식의 투사체다. 하늘을 향해 오르지만 덫을 끌고 가는 행위는, 의식되지 못한 내면의 얽힘을 외부의 운동으로 재연하는 과정이다. 높이 오른다고 해서 해방되는 것은 아니다. 내면의 덫이 실재하는 한, 자유는 여전히 덫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 시는 자유를 찬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를 견디는 일의 섬뜩함을 증언한다. 황인숙의 새는 자유를 획득한 승리자가 아니라, 자유를 향해 내던져진 존재다. 그 비상은 자기 내부의 균열을 싣고 이루어지는 위태로운 도약이다. 하늘은 열려 있으나 구원이 아니며, 함성은 울리나 환희가 아닌 불안의 반향이다.


진정한 속박은 외부에만 있지 않다. 황인숙은 한 마리 새의 기이한 비상을 통해, 자유를 노래하면서 동시에 자유를 의심하게 만든다. 그 의심의 끝에서 시는 독자를 자기 내부의 황량한 하늘 앞으로 데려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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