君子和而不同
공자가 말한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의 뜻은 아주 단순하다. 사람은 서로 달라도 함께 어울릴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군자는 남과 사이좋게 지내되, 생각까지 무조건 똑같이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반대로 소인은 겉으로는 한편처럼 보여도 마음속으로는 진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쉽게 말해, 공자가 말한 화(和)는 무조건 맞장구치는 태도가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함께 살아가는 힘이다.
이 생각은 옛사람들이 자주 들던 ‘국’의 비유로 이해하면 쉽다. 좋은 국은 소금만 잔뜩 넣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물도 있어야 하고, 불도 있어야 하고, 여러 재료가 제맛을 내야 한다. 각각의 맛은 다르지만, 그 다른 맛들이 어우러질 때 비로소 깊은 맛이 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똑같은 말만 하고, 똑같은 생각만 한다면 편할 수는 있어도 살아 있는 사회라고 보기는 어렵다. 차이가 있어야 풍성해지고, 그 차이가 잘 어울릴 때 비로소 화가 생긴다.
『주역』도 비슷한 생각을 담고 있다. 세상은 하나의 힘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밝음과 어둠, 강함과 부드러움, 움직임과 멈춤 같은 서로 다른 힘이 함께 작용하면서 변화가 일어난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부딪치고 조정되면서 전체의 질서를 이루는 데 있다. 이것이 ’태화(太和)’라는 생각이다. 각자가 제자리를 지키면서도 큰 조화를 이룰 때 세상은 제대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문제는 우리가 세상을 너무 자주 둘로만 나누어 본다는 데 있다. 선과 악, 내 편과 네 편, 옳음과 그름처럼 무엇이든 둘로 갈라 생각하면 판단은 쉬워진다. 그러나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가족 사이도 그렇고, 정치도 그렇고, 사회 문제도 그렇다. 한쪽이 완전히 옳고 다른 쪽이 완전히 틀린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둘로만 나누는 사고는 빠르고 편리하지만, 현실의 복잡함과 관계의 미묘함을 놓치기 쉽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제3의 시선’이다. 단순히 A냐 B냐를 따지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둘 사이를 잇는 힘을 보는 일이다. 이 글에서 말하는 ’상화(相和)’가 바로 그런 뜻에 가깝다. 서로 돕는 관계만 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 억누르는 관계만 있는 것도 아니다. 싸우기도 하고, 밀어 주기도 하고, 조절하기도 하면서 전체가 유지된다. 자연도 그렇고 인간관계도 그렇다. 경쟁이 전혀 없으면 발전이 멈출 수 있고, 갈등만 있으면 함께 무너진다.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 주는 힘이 필요하다. 그것이 화이다.
이렇게 보면 화는 “좋게좋게 넘어가자”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훨씬 더 어렵고 성숙한 태도다. 나와 다른 사람을 없애지 않으면서도, 그 다름을 감내하고 조정하고 함께 살아갈 길을 찾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화란 차이를 지워서 만드는 평화가 아니라, 차이를 안은 채 만들어 내는 질서이다.
세상은 둘로만 갈라서 볼 수 없고, 사람도 똑같아져야만 함께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짜 조화는 다름을 없애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다름을 인정하고, 그것을 잘 이어 붙이고, 때로는 충돌마저 조절하면서 더 큰 질서를 만들어 내는 데서 나온다. 공자의 화이부동은 바로 그 점을 가르친다. 오늘처럼 갈등이 많은 시대에 이 말이 다시 중요해지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