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치(落齒), 빠진 것은 이가 아니라 시간이었다.

한유(韓愈)의 〈낙치〉

by 김희곤

한유(韓愈)의 〈낙치〉는 늙음의 체험을 적은 시이지만, 단순한 노쇠의 보고서는 아니다. 시의 첫머리에서 그는 “지난해 이 하나가 빠지고, 올해 또 하나가 빠졌으며, 갑자기 예닐곱 개가 더 빠졌고, 그 빠지는 기세는 아직 그치지 않았다”(去年落一牙,今年落一齒。俄然落六七,落勢殊未已)고 적는다. 이 진술은 담담하지만, 그 담담함 속에는 이미 어떤 균열의 자각이 들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빠진 이의 숫자만이 아니다. 더 무서운 것은 ‘낙세수미이(落勢殊未已)’, 곧 상실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인식이다. 몸은 늘 우리보다 먼저 안다. 생이 더 이상 축적의 방향이 아니라 소실의 방향으로 기울고 있음을, 정신이 알기 전에 몸이 먼저 알아차린다.


더 인상적인 것은 한유가 이 사건을 처음부터 철학으로 처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처음 하나가 빠졌을 때는 다만 입 안이 휑해진 것이 부끄럽다고만 여겼다”(憶初落一時,但念豁可恥)고 쓴다. 이 대목은 대단히 중요하다. 인간은 죽음을 고상한 관념으로 먼저 만나지 않는다. 먼저 얼굴의 변형으로, 외모의 손실로, 남의 시선으로 만난다. 늙음은 사상(思想)으로 오기 전에 수치(羞恥)로 온다. 한유는 바로 그 가장 일상적인 감정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의 힘은 거기에 머물지 않는 데 있다. 그는 수치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수치를 곧장 성찰(省察)의 재료로 바꾼다.


시가 깊어지는 지점은 그다음이다. “두세 개 빠지자 비로소 쇠약과 죽음을 걱정하기 시작했다”(及至落二三,始憂衰即死). 여기서 낙치(落齒)는 더 이상 미용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문제다. 치아 하나가 빠졌을 뿐인데, 실은 삶 전체의 법칙이 한순간에 달라진다. 청춘의 시간은 늘 앞으로 열려 있지만, 노쇠의 시간은 하나씩 닫혀 간다. 그래서 낙치는 단순한 결손이 아니라 예고다. 아직 죽음이 온 것은 아니지만, 죽음이 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몸을 통해 미리 통지된 것이다. 한유는 그 통지를 외면하지 않는다. 이어 그는 “이가 하나 빠질 때마다 두려운 마음이 늘 몸에 붙어 있었다”(每一將落時,懍懍恒在己)고 쓴다. 늙음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는 예감의 축적이라는 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낙치〉는 병증의 기록이 아니라 유한성(有限性)의 시가 된다. 후반부에서 한유는 “사람들은 이가 빠지면 장수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하지만, 나는 삶에는 끝이 있으니 길고 짧음이 모두 죽음일 뿐이라 말한다”(人言齒之落,壽命理難恃。我言生有涯,長短俱死爾)고 적는다. 이 대목에 이르면 한유는 이미 치아의 손실을 붙들고 허둥대는 자리가 아니라, 삶 전체를 내려다보는 자리로 이동해 있다. 오래 사는 것과 짧게 사는 것의 차이는 현실에서는 분명 크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는 그 차이도 결국 상대적이다. 이 냉정한 인식이야말로 〈낙치〉를 단순한 신체시가 아니라 철학적 서정시로 만드는 핵심이다. 늙음은 그에게 굴욕이지만, 동시에 진실의 교육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유는 여기서 끝내 비탄의 시인으로 남지 않는다. 그는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말한다, 장주가 말하기를 나무와 기러기에는 각각의 기쁨이 있다고 했다”(我言莊周云,木雁各有喜)고 쓴다. 이는 《장자(莊子)》 〈산목(山木)〉의 목안(木雁) 고사를 끌어온 것이다. 장자는 산속의 큰 나무가 재목으로 쓸모가 없어 도리어 천수를 누리고, 주인집 기러기는 울지 못해 도리어 잡아먹히는 이야기를 통해 존재의 아이러니를 말한다. “산속의 나무는 재목이 못 되어 천수를 누렸고, 주인의 기러기는 재주가 없어 죽임을 당했다”(山中之木,以不材得終其天年;今主人之雁,以不材死)라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한유가 이 고사를 끌어온 것은, 상실에도 저마다의 형편과 처지가 있다는 역설을 빌려 자신의 낙치를 다시 해석하기 위해서다.


이것은 단순한 장식적 인용이 아니다. 한 인간이 자기 사상의 언어만으로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만났을 때, 다른 사유의 언어를 잠시 빌려 오는 장면이다. 이를 잃은 자리에 반드시 비극만 남는 것은 아니다. 한유는 곧이어 “말이 어눌해졌다면 차라리 침묵이 좋고, 씹는 기능이 약해졌다면 부드러운 음식이 도리어 맛있다”(語訛默固好,嚼廢軟還美)고 말한다. 여기에는 장엄한 초탈보다 생활인의 감각이 있다. 상실은 불편이지만, 그 불편 속에서도 다른 질서와 다른 적응이 생긴다. 이것이 한유의 마지막 도달점이다. 초월이라기보다, 상실을 견디는 정신의 실용적 품격이다.


이 점에서 한유의 위대함은 분명하다. 그는 비애(悲哀)를 부정하지 않았다.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죽음의 예감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 비애를 그대로 앓는 데 그치지 않고, 곧장 문장(文章)과 사유(思惟)로 바꾸었다. 문학(文學)은 여기서 위안이 아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에 형식을 부여하는 능력이다. 그래서 그는 끝내 “노래하다가 마침내 시를 이루어, 그것을 아내와 자식들에게 보였다”(因歌遂成詩,持用詫妻子)고 맺는다. 바로 이 마지막이 중요하다. 〈낙치〉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울부짖는 작품이 아니라, 늙음의 수치와 불편을 끝내 한 편의 시로 바꾸어 가족 앞에 내놓을 수 있었던 문인의 작품이다.


빠진 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 빠진 자리에 언어가 들어설 수는 있다. 몸은 결손되지만, 문장은 그 결손을 의미로 바꾼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낙치〉는 치아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인간 이야기다. 누구나 늙지만, 누구나 자기 늙음을 문학적 성찰(文學的省察)로 승화시키지는 못한다.


결국 〈낙치〉에서 빠진 것은 이 하나가 아니다. 청춘의 무심함이 빠졌고, 시간이 아직 많다는 착각이 빠졌고, 몸이 언제까지나 나의 편일 것이라는 순진한 신뢰가 빠졌다. 그러나 그 자리에 들어온 것도 있다. 삶에는 끝이 있다는 명료한 인식(生有涯), 상실을 끝내 외면하지 않는 정신의 용기, 그리고 그것을 한 편의 시로 바꾸는 문학의 힘이다. 그러므로 한유에게 낙치(落齒)는 단순한 생리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과 유한성을 정면으로 사유하게 만드는 사건이며, 그 비애를 곧장 문장과 사유로 바꾸는 문인의 존엄이 드러나는 자리다. 시간은 몸에 새겨지고, 문학은 그 새김을 견디게 한다. 이것이 〈낙치〉가 오래 남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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