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한 줄이 재산보다 귀하다는 말의 무게

갈상사 김영한

by 김희곤

김영한. 세상은 그녀를 기생 출신 여성으로, 또 훗날 대원각을 내놓은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녀를 전설로 만든 것은 재산이 아니라 한마디였다. “그 사람의 시 한 줄이 내 재산 전체보다 더 귀하다.” 이 말은 단순한 연애담의 고백이 아니다. 한 여자가 자기 생애의 무게를 무엇으로 재었는가를 보여 주는 마지막 판정문에 가깝다. 그녀는 늙어서도 한 사람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어쩌면 한 문장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세월은 사람의 얼굴을 바꾸고, 계절은 기억의 색을 바꾼다. 그러나 끝내 바꾸지 못하는 것도 있다. 젊은 날 마음속에 박혀 버린 한 줄의 말, 수많은 시선 속에서도 자신을 처음 사람으로 보아 준 한 번의 만남, 세상이 돈과 몸값과 소문으로만 자신을 재단하던 시절에 뜻밖에도 영혼의 높이에서 자신을 불러 준 어떤 음성. 김영한이 오래 붙들고 있었던 것은 백석이라는 남자 자체라기보다, 백석이라는 이름을 통과해 자기 안에 처음 열렸던 낯선 방 하나였을 것이다.


프로이트가 이 여인을 바라보았다면 아마 먼저 상실(喪失)의 구조를 보았을 것이다. 그는 그녀가 한 사람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한 번 좌절된 욕망을 평생 반복한 것이라고 말했을지 모른다. 인간은 충족된 욕망보다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욕망에 더 오래 붙들린다. 손에 들어온 것은 일상이 되지만, 끝내 손에 닿지 못한 것은 상징이 된다. 떠나간 남자는 더 이상 현실의 인물이 아니다. 그는 결핍의 자리에 들어앉아 점점 더 커진다. 그래서 현실의 수많은 사람으로도 그 자리를 채울 수 없다. 사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대상이 이미 현실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상처가 만든 우상이 되고, 기억이 빚은 절대자가 된다.


이런 시선으로 보면, 김영한의 기다림은 숭고한 순정이면서 동시에 무의식의 완고한 반복이 된다. 그녀는 백석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백석을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놓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사랑은 흔히 상대에게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자기 상처의 둘레를 맴돌기도 한다.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정말 그 사람에게만 있는지, 아니면 그 사람과 헤어진 뒤 생겨난 마음속 빈방에 있는지, 프로이트는 바로 그 지점을 의심했을 것이다. 그리고 냉정하게 말했을 것이다. 그녀가 평생 놓지 못한 것은 남자가 아니라, 끝내 봉합되지 않은 결핍(缺乏)이라고.


그러나 융은 그보다 조금 다른 곳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인간의 사랑이 언제나 현실의 상대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때로 우리는 타인에게서 자기 안에 아직 태어나지 못한 가능성을 본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오래 그리워하는 것은 그 남자 자신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투사된 자기 영혼의 형상 때문일 수 있다. 백석은 현실의 남자이기 이전에, 김영한 안에 잠들어 있던 정신의 이미지였는지도 모른다. 속물의 세계를 견디게 하는 품위, 돈으로 살 수 없는 아름다움, 삶을 거래가 아니라 의미로 바꾸는 힘, 비천한 현실 속에서도 스스로를 함부로 낮추지 않게 하는 내면의 귀족성(貴族性). 그녀는 어쩌면 백석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백석을 통해 비로소 보게 된 자기 안의 더 높은 가능성을 사랑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녀의 기다림은 단순한 짝사랑이 아니라 자기 영혼의 잃어버린 절반을 더듬는 일이 된다.

젊은 시절의 사랑은 대개 몸과 목소리와 만남의 시간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어떤 사랑은 시간이 갈수록 사람보다 상징으로 남는다. 얼굴은 희미해지고, 목소리는 사라지고, 함께 있었던 장면도 무너져 가는데, 이상하게 한 문장, 한 편의 시, 한 사람이 자기 안에 남긴 결만은 오래 남는다. 그때 사랑은 더 이상 연애가 아니라 해석이 된다. 내가 누구였는가, 무엇을 잃었는가, 무엇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는가를 스스로 묻는 방식이 된다.


훗날 그녀가 큰 재산을 내놓고도 담담히 “그 사람의 시 한 줄이 내 재산 전체보다 귀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프로이트라면 그것을 승화(昇華)라고 불렀을 것이다. 소유할 수 없었던 사람에 대한 욕망이 더 높은 가치의 언어로 옮겨 간 것이라고, 육체와 재산의 세계에서 채워지지 못한 갈망이 종교와 기부와 상징의 형식으로 변환된 것이라고. 반면 융이라면 그것을 변형(變形)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욕망과 상실과 허영과 고독이 오랜 세월 그녀 안에서 서로를 태우다가 마침내 하나의 상징으로 응결된 순간이라고. 남자를 얻지 못한 여자가 아니라, 남자를 잃은 뒤에야 자기 영혼의 모양을 알게 된 사람이라고.


그러니 그녀를 두고 늙은 기생의 허영이라고만 말하는 것은 너무 값싼 판정이다. 허영은 대개 남에게 보이기 위해 빛나려 하지만, 그녀의 말에는 오히려 빛이 다 빠져나간 뒤에 남는 적막이 있다. 그것은 과시가 아니라 결산(決算)이다. 평생 화려한 것들을 거느리고 살아 보았으나, 끝내 가장 값비싼 것은 소유가 아니라 한 줄의 시였다고, 인간을 끝내 살게 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의미였다고, 너무 늦게 깨달은 사람이 자기 생애의 끝에서 내리는 조용하고도 무서운 판정이다.


어쩌면 그녀는 백석을 기다린 것이 아니다. 자기 생애가 한낱 연회와 거래와 소문으로만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를 기다린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랑 때문에 자기 안에 끝내 무너지지 않은 무엇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프로이트의 언어로는 그것이 결핍의 불꽃이고, 융의 언어로는 그것이 영혼의 상징이다. 하나는 왜 그녀가 놓지 못했는지를 설명하고, 다른 하나는 왜 그 놓지 못함이 끝내 그녀를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았는지를 설명한다.


결국 김영한의 기다림은 한 남자를 향한 사랑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향한 귀환이었다. 젊은 날에는 그것을 사랑이라 불렀고, 중년에는 상실이라 불렀고, 늙어서는 운명이라 불렀을지 모른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한 인간이 자기 삶을 천한 욕망의 이야기로만 남겨 두지 않으려는 마지막 저항이었다. 세상은 그녀를 기생이라 불렀지만, 그녀는 자기 생을 한 편의 시로 구제하려 했다.


바로 그 대목에서 프로이트는 그녀의 상처를 설명하고, 융은 그녀의 상승을 설명한다. 하나는 그녀의 아픔을, 다른 하나는 그녀의 존엄을 비춘다. 그리고 아마 인간의 진실은 그 둘 사이, 상처를 품은 채 끝내 조금 더 높은 곳을 바라보는 그 오래된 마음속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