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계층
현재의 상위 계층은 능력주의 귀족이다. 조상의 성과 벼슬 대신 명문대 학위와 자기 착취로 정상을 탈환했다. 과거 양반이 지대 수익으로 한가로움을 샀다면, 변호사, 의사들 전문가 그룹은 자기 몸과 시간을 갈아 넣어 성벽을 유지한다. 소유는 늘었으나 향유는 줄었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다.
한때 귀족 계급은 노동자보다 적게 일하는 계층이었다. 지금은 정반대다. 위로 갈수록 휴대전화는 꺼지지 않고 회의는 끝이 없다. 넓은 거실과 높은 연봉을 얻은 대가로 저녁 햇살과 산책을 지불했다. 성공했으나 정작 삶을 소유하지 못한 상태, 그것이 신귀족의 비애다.
청소하며 비싼 음향기기의 음악을 즐기는 것은 주인이 아닌 가정부다. 주인은 유지비를 벌러 나가고, 공간은 타인의 노동 속에서만 숨 쉰다. 집은 부의 증명서일 뿐 삶의 장소는 아니다. 집을 산 것이 아니라 집값을 떠받칠 의무를 산 셈이다.
아파트와 스펙을 위해 청춘을 저당 잡힌다. 입성하면 끝인 줄 알았으나, 대출과 경쟁이라는 더 정교한 불안이 기다린다. 성공은 안식처가 아니라 비싼 유지비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능력주의는 기회를 약속하며 모두를 쉬지 못하게 했다. 혈통 양반이 사라진 자리에 스스로를 착취하는 상류층이 들어섰다. 많이 벌고 정상에 올랐으나 자기 인생에는 들어가지 못한 얼굴, 현대적 불행의 본질은 바로 그곳에 있다.
이 풍경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곳이 있다. 서울 강남이다.
래미안 퍼스티지, 아크로리버파크. 이름만으로도 위계가 느껴지는 아파트 단지에 불은 언제 켜질까. 새벽 두 시, 세 시다. 야근을 마치고 돌아온 가장이 현관 비밀번호를 누른다. 거실 소파에 앉아볼 틈도 없이 샤워하고 쓰러진다. 한강 뷰 서재에서 책을 읽겠다는 꿈은 입주 첫 주에 이미 사라졌다. 테라스에 놓인 의자는 계절이 두 번 바뀌도록 그 자리다.
대치동 아이는 오늘도 학원 셔틀을 탄다. 부모가 마련한 30평 공부방에서 수능을 준비하고, 합격하면 반지하 고시원으로 이사한다. 서울대 캠퍼스 근처, 월 80만 원짜리 방에서 다시 다음 관문을 뚫으러 간다. 아파트는 부모 것이고, 스펙은 내 것이고, 삶은 아직 아무 것도 아니다.
강남 3구에서 가장 한가한 이들은 누구인가. 놀이터에서 오후를 보내는 외국인 가사 도우미와, 단지 내 조경을 손질하는 노인들이다. 집주인은 그 잔디 위를 밟아볼 여유가 없다.
월급의 절반이 대출 이자로 나간다. 나머지 절반으로 학원비, 관리비, 외식비를 충당한다. 저축은 보너스에 기댄다. 그 보너스를 지키려면 성과를 내야 하고, 성과를 내려면 주말도 반납한다. 아파트를 소유한 것이 아니라 아파트에 고용된 것이다. 집이 주인을 부린다.
미국의 상류층은 그래도 선택지가 있었다. 실리콘밸리를 떠나 포틀랜드에서 커피숍을 열 수 있다. 한국에서 강남을 포기하는 것은 계층 사다리를 자르는 일로 읽힌다. 탈출이 아니라 낙오다. 그래서 아무도 내려오지 않는다. 누구도 쉬지 않는다.
입시가 끝나면 취업이 시작되고, 취업이 끝나면 승진이 시작되고, 승진이 끝나면 자녀 입시가 다시 시작된다. 레이스에는 결승선이 없다. 완주가 아니라 낙오하지 않는 것이 목표인 경주, 그 위에 고층 아파트가 서 있다.
어느 주말 오전, 잠실 롯데타워 전망대에 올라가 보라. 한강을 따라 늘어선 아파트 군락이 한눈에 들어온다. 장관이다. 그러나 그 창문 안을 상상해 보면 풍경은 달라진다. 누군가는 밀린 보고서를 쓰고, 누군가는 학원 스케줄을 짜고, 누군가는 이직 공고를 들여다본다. 가장 비싼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것은 가장 비싼 불안의 집합이다.
정점에 올랐으나 자기 인생에는 들어가지 못한 얼굴, 그 얼굴이 오늘도 한강변 고층 엘리베이터 안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