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는 나의 인생의 지침과도 같은 소설이다. 이 소설은 한 인간이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원칙을 담고 있다. 개츠비의 가치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고 나도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냈고 또 행동했던 인생의 원칙에 대해서는 반박할 여지없이 위대함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몇 년 만에 다시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개츠비가 위대했던 이유, 그리고 나의 남은 인생의 이미지에 대해 먼저 정리하고자 한다.
<위대한 개츠비>는 이렇게 시작한다.
지금보다 어리고 쉽게 상처받던 시절 아버지는 나에게 충고를 한마디 해주셨는데, 나는 아직도 그 충고를 마음속 깊이 되새기고 있다. "누구든 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언제나 이 점을 명심하여라."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지는 않다는 것을 말이다."
In my younger and more vulnerable years my father gave me some advice that I’ve been turning over in my mind ever since. "Whenever you feel like criticising any one," he told me, "just remember that all the people in this world haven’t had the advantages that you’ve had."
이 문장은 남들의 단점을 관용으로 이해하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사람마다 가지고 태어난 유전적인 요소, 가정환경, 행운과 불운들이 어떤 사람은 완성된 인간이 되기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줄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정신적 근간이 되는 미국 독립선언문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자명한 진리(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날 때부터 유전적 차이를 가지며 커가면서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환경적인 요소에 의해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다.
한 사람에게 주어진 어떤 불리한 점은 그 사람과 주변 사람들까지 황폐화시킬 정도로 치명적일 수 있다. 그 불리한 점은 다른 이점에 의해 상쇄될 수도 있다. 또 어떤 결핍은 그렇게 치명적이지 않아서 오히려 농담의 소재로 웃고 넘길 수 있거나, 자소서에 쓸 수 있는 '치명적이지 않지만 단점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피츠제럴드가 진실로 위대하다고 생각했던 개츠비는 어떠한가? 그 역시도 타고난 결핍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헨리 개츠(Henry Gatz)라는 미국 서부 지방의 농부의 아들 지미 개츠(Jimmy Gatz)로 태어났다. 지금으로 치자면 지방 출신의 흙수저쯤 되었고, 아버지는 그가 출세하기 위한 어떤 지식이나 노하우도 전수해 줄 수 없는 인물이었다. 돈을 많이 벌거나, 출세하기에 쉬운 환경에서 태어나지는 않은 셈이다.
타고난 결핍에도 불구하고 개츠비는 어떻게 위대하게 되었으며, 무엇이 그를 위대하게 만드는가? 어떤 사람들은 그의 위대함을 지고지순한 사랑과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해 어떤 일이든 불사하는 집념으로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작품의 후반부에서는 닉은 데이지에 대한 개츠비의 사랑보다는 개츠비라는 인간에 주목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개츠비의 위대함은 개츠비라는 인간과 그의 인생에 주목해야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개츠비는 가난한 집안에서 지미 개츠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으나 스스로를 신의 아들이라고 생각했고, 17살에 제이 개츠비(Jay Gatsby)라는 인물로 만들어내었고 스스로가 제이 개츠비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그의 가정환경은 가난했으나 그에게는 마치 1만 5000킬로미터 밖에서 일어나는 지진을 감지하는 복잡한 지진계와 연결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삶의 가능성에 민감하게 반응(some heightened sensitivity to the promises of life, as if he were related to one of those intricate machines that register earthquakes ten thousand miles away) 할 수 있는 재능이 있었다.
그러한 재능으로 그는 스스로가 꿈꾸는 삶의 모습을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 환상을 줄 정도로 구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보통 사람이 꾸는 꿈은 이런 것들이다. "어디든 취직하기", "내 집 마련하기". 꿈의 크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꿈의 모습이 명확하지 않고 어떤 색깔인지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츠비가 꾸었던 꿈은 저 멀리, 부두의 맨 끝자락에 있을 정도로 멀지만 틀림없는 단 하나의 초록색 불빛임을 명확히 알 수 있었고 그토록 구체적이고 명확했기에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아 개츠비는 그 불빛을 보고 부르르 몸을 떨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은 단순히 데이지를 다시 되찾는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데이지를 만나기 전부터 "신의 아들"이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래와 같이 운동, 공부, 일을 구체적으로 해나가기 위한 계획과 자신의 행동 기준을 만들고 점검해 나가고 실천했을 것이다. 그러한 노력과 다짐들이 세월의 흐름 속에 켜켜이 쌓여 이상 속에만 있던 개츠비라는 인물이 현실에서 구현되었을 것이다.
기상 --------------------------------------------------- 오전 6:00
아령 들기와 벽 타기 --------------------------------- 오전 6:15 ~ 6:30
전기학 및 기타 공부 --------------------------------- 오전 7:15 ~ 8:15
일 ----------------------------------------------------- 오전 8:30 ~ 4:30
야구와 스포츠 ---------------------------------------- 오후 4:30 ~ 5:00
웅변 연습, 자세 습득 훈련 --------------------------- 오후 5:00 ~ 6:00
발명에 필요한 공부 ---------------------------------- 오후 7:00 ~ 9:00
결심
섀프터스 또는 xxx에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 것
궐련과 씹는 담배를 삼갈 것
이틀에 한 번씩 목욕할 것
매주 유익한 책이나 잡지를 한 권씩 읽을 것
매주 5달러 3달러씩 저축할 것
부모님 말씀을 잘 들을 것
그 다음은 도덕, 윤리, 의리와 같이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가치관과 행위에 관한 문제다. 작품에서 가장 도덕적인 기준이 높은 사람은 화자인 닉 캐러웨이다. 닉은 그의 판단을 유보하는 성격으로 인해 여러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들러붙었고, 그로 인해 난폭한 녀석들의 은밀한 슬픔을 알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행위의 동기가 어떤 것인지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로 한 사람이다. 닉이 동부로 돌아왔을 때 세상이 도덕적인 차렷을 하기를 원했다는 대목은 결국 닉은 그 사람의 상황이 어떠했든 그것이 그 사람의 악행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닉 캐러웨이가 인간의 개성이라는 게 일련의 성공적인 몸짓이라면 개츠비에게는 뭔가 멋진 구석이 있다고 (If personality is an unbroken series of successful gestures, then there was something gorgeous about him) 했고, 마지막으로 헤어질 때도 "그 인간들은 모두 썩어 빠진 무리예요. 당신 한 사람이 그 빌어먹을 인간들을 모두 합쳐놓은 것만큼이나 훌륭합니다. ("They're a rotten crowd," I shouted across the lawn. "You're worth the whole damn bunch put together.")"라고 했기 때문에 개츠비는 도덕성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물론 도덕이라는 것은 가치의 문제이기 때문에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개츠비가 위대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개츠비가 행했던 밀주업, 도박장, 장물채권 거래 등 불법적인 사업을 근거로 든다. 이 사업이 불법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당사자들이 원하지 않는 피해를 끼치거나 남의 것을 빼앗는 행위라고 보기는 힘들다.
추측건대 개츠비의 도덕적 기준은 "남이 원하지 않는 피해는 끼치지 않는다." 였던 것 같다. 그랬기에 데이지가 머틀을 차에 치어 죽게 했을 때 닉이 도망치라고 했지만 개츠비는 도망치지 않고 책임지겠다고 말한다. 개츠비의 입장에서는 너무 사랑했기에 말릴 수 없었지만, 그 상황에서 데이지를 말렸어야 했던 건 그 자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 관점에서 개츠비는 끝까지 일련의 성공적인 행동을 해낸 것이다. (다만 지독한 사랑은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릴 수 있다!)
여기까지는 어쩌면 조금은 일반적이고 자기 계발서와 교과서에서 한 번쯤은 들어본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 같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고리타분한 것들이 지켜지지가 않는 세상이다. 저 멀리 국회와 재벌을 바라볼 것도 없이, 일상에서도 수많은 예시들을 발견할 수 있다. 나 역시도 그때의 상황이 어떠했든 일련의 성공적인 행동에 실패했던 적이 있다. 깊이 반성한다.
이제 얘기할 개츠비가 위대한 이유는 어쩌면 이 작품이 나온 지 100년 가까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특별하고 그리하여 위대한 작품이 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과거는 지나간 시간, 현재는 바로 지금, 미래는 다가올 시간으로 생각한다. 특히 더 빨리, 더 많이 버는 것이 중요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미래만 보고 나아간다. 한때는 YOLO라는 단어와 함께 현재의 중요성이 강조되고는 했지만 결국에는 이제는 이 단어마저도 비웃음의 대상으로 쓰인다. 결국 현재는 미래를 위해 희생되는 존재일 뿐이고, 현재에 대한 대우가 그러다 보니 과거는 돌아볼 틈도 없다. 과거는 그저 지나간 것, 바꾸고 싶은 것, 좋게 봐주면 추억 정도가 되는 것 같다.
그러나 개츠비는 과거에 대해서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데이지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전에는 이해했거든요. 우린 몇 시간씩이나 앉아서……" 절망적으로 그가 말했다.
그는 갑자기 말을 끊더니 과일 껍질이며 버린 선물과 구겨진 꽃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쓸쓸한 길을 왔다 갔다 걷기 시작했다.
"나 같으면 그녀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을 겁니다. 과거는 반복할 수 없지 않습니까." 내가 불쑥 말했다.
"과거를 반복할 수 없다고요? 아뇨, 반복할 수 있고 말고요."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And she doesn't understand," he said. "She used to be able to understand. We'd sit for hours-"
He broke off and began to walk up and down a desolate path of fruit rinds and discarded favors and crushed flowers.
"I wouldn't ask too much of her," I ventured. "You can't repeat the past."
"Can't repeat the past?" he cried incredulously. "Why of course you can!"
개츠비에게 과거는 반복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반복이라는 게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날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개츠비가 얘기하는 과거를 반복한다는 것은 뭘 의미하는 걸까?
모두 초등학교 때 장래희망을 적어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어른들이 보기에 초등학생은 장래희망은 다들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것들을 적어낸다. 대통령, 우주비행사, CEO, 운동선수 등 극소수만이 될 수 있는 직업들을 적어낸다. 그러다가 조금씩 현실을 알아가며 - 주로 자신의 성적, 재능의 한계 - 그 꿈은 공무원, 대기업, 교사 등으로 변해간다. 지방에 살다가 서울로 올라오게 되면 지방에서는 지금이라도 당장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였던 32평 아파트가 실현 불가능한 꿈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는 시간이 흐르고, 공간이 변함에 따라 우리가 꾸었던 꿈의 크기를 줄이거나, 어느 순간에 포기하게 된다. 시간은 흐르고, 공간은 변한다는 절대적인 사실 때문에 시간과 공간은 상대적이다. 상대적이라는 말은 상황 혹은 내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그 상태가 변할 수 있다는 말이다. 똑같은 1분이더라 하더라도 10분 같이 흘러가는 순간이 있고, 10분이라 하더라도 1분 같이 흘러가는 순간이 있다. 매일 지나치는 거리는 의외로 기억에 남는 것이 없어도, 인상 깊은 여행지는 그곳에 1시간 밖에 없었을지라도 창의 크기, 벽의 질감까지 생생히 기억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은 상대적이지만 그 속에서 변하지 않는 절대성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있다. 사람의 마음, 꿈이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가 왜 부모의 사랑은 위대하다고 하는가? 시간이 흘러도 그 크기가 줄어들지 않고, 상황이 나빠진다고 해서 자식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츠비가 위대한 이유는 시작과 끝을 알 수 없기에 무한하고, 무한함 속에서 끊임없이 상태가 바뀌고, 계속해서 상대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변하지 않는, "신의 아들"이 되겠다는 절대적인 꿈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럼 다시 개츠비가 반복하려는 데이지의 사랑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개츠비가 신의 아들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냈을 때 그 인생 속에 사랑에 대한 원대한 꿈과 구체적인 이미지가 있었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데이지를 만난 이후에는 확실하게 개츠비의 인생에는 완벽하고 순수한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이미지가 있었을 것이다. 데이지를 되찾으려 했던 이유도 그녀가 단순히 부잣집 아가씨에 예뻐서는 아니었다. 친척인 닉조차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데이지는 "방금 즐겁고 신나는 일을 했으며, 또 즐겁고 신나는 일이 일어날 거라는 약속"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약속은 아무나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원대한 꿈이 있는 개츠비와 행복에 대한 영원한 확신을 줄 수 있는 데이지가 나눴던 사랑은 단순히 외적인 무언가에 끌린 한낱 풋사랑은 아니었을 것이다. 개츠비는 자신이 꿈꾸는 완벽한 사랑의 이미지에 대해 말했을 것이고, 데이지는 그 사랑이 지금도 이뤄지고 있고 계속해서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지내야 했고 그 기간 동안 데이지는 불안해한다. 데이지는 개츠비를 너무나 사랑했지만 한 번도 그녀의 삶을 스스로 결정해 본 적이 없었기에 그녀 스스로 개츠비를 떠나는 선택을 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개츠비와 함께 하기 위해 집을 떠날 수도 없었다. 개츠비를 완벽히 대체할 수 없을지라도 다른 사랑이 찾아온다면 그녀는 기꺼이 떠날 준비가 되어있었고 톰이 나타나자 그녀는 개츠비를 떠난다.
개츠비는 데이지가 자신을 기다리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한 시점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사랑은 영원히 가질 수 없음을 알았을 것이다. (But it was all going by too fast now for his blurred eyes and he knew that he had lost that part of it, the freshest and the best, forever.)
하지만 개츠비의 입장에서는 가장 이상적이지는 않을지라도 데이지는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었을 것이다. 다만 데이지가 톰을 사랑하지 않고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으며, 집안의 압박 같은 다른 외적인 요소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결혼했다는 전제 하에. 그래야만 데이지가 주었던 그 약속은 깨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개츠비는 데이지에게 톰을 사랑한 적이 없다고 얘기하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데이지는 톰도 사랑하고, 개츠비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 모습을 보고 개츠비는 닉에게 데이지는 과거에는 다 이해했었는데, 이제는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다. 변하지 않을 수 있었던 사랑의 꿈이 이제는 변해버린 것이다. 변해버린 사랑은 그저 그럴 수 있는 것이지, 위대한 것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개츠비의 사랑은 분명히 결과론적으로 보면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잘못으로 인해 사랑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사랑의 과정에서 변한 사람은 개츠비가 아니라 데이지였다. 사랑이라는 것은 마음이 이끌린 뒤로는 같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므로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개츠비는 자신의 몫을 다했다. 5년의 시간이 흘렀고, 공간이 텍사스에서 뉴욕으로 바뀌었다 하더라도 5년 전 텍사스에서 꿈꾸었던 사랑의 모습이 변하지도 않았고, 그 사랑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사실 작품의 8장쯤에 들어서면 더 이상 개츠비와 데이지의 사랑보다는 개츠비가 어떤 사람인지를 더 주목하는 것 같다. 사랑만으로는 개츠비를 다 설명할 수 없다. 말과 행동에 실패한 적이 없는 품위 있는 사람, 타고난 현실에 매이지 않은 꿈을 가진 사람, 그리고 무한하여 변할 수밖에 없는 시간과 공간 사이에서 꿈이라는 하나의 절대적인 진리를 설정하고 끝까지 쫓았던 사람. 개츠비는 그런 사람일 것이다.
어떤 느낌인지는 알겠지만, 아직은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작품의 마지막 대목과 함께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해마다 우리 눈앞에서 뒤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다. 그것은 우리를 피해 갔지만 별로 문제 될 것은 없다---내일 우리는 좀 더 빨리 달릴 것이고 좀 더 멀리 팔을 뻗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맑게 갠 날 아침에…….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Gatsby believed in the green light, the orgastic future that year by year recedes before us.
It eluded us then, but that's no matter--tomorrow we will run faster, stretch out our arms farther. . . . And one fine morning----
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