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의 문.

봉공을 지나 애민으로 가는 길목에서

by 구현

1797년 봄.

곡성.


정약용이 부임했다.

현감으로서의 첫 부임지였다.


아전이 장부를 가져왔다.

"나으리, 이번 해 환곡 장부입니다."


정약용이 장부를 펼쳤다.


숫자들이 빼곡했다.

대여한 곡식.

회수해야 할 곡식.


정약용이 물었다.

"백성들 형편은 어떠한가?"


아전이 고개를 숙였다.

"좋지 않습니다. 연이은 수해와 흉년으로...

많은 이들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정약용이 장부를 덮었다.

"곡식 창고를 열어라."


아전이 놀랐다.

"나, 나으리. 그러시면 안 됩니다."


"왜?"


"환곡을 풀면... 나중에 회수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으리께서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정약용이 조용히 말했다.

"책임?"


"예. 파직당하실 수도 있습니다."


다른 아전이 거들었다.

"전임 현감들도

그래서 환곡을 풀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어렵다 해도, 관의 곡식은 지켜야 한다고..."


정약용이 일어섰다.

"관의 곡식?

그것은 누구의 것인가?"


"나, 나으리..."


"백성의 것이다. 백성이 굶주리는데,

관의 창고가 무슨 소용인가."


정약용이 명했다.


"당장 창고를 열어라.

그리고 곡성 전역을 돌아

가장 굶주린 이들을 찾아라."


"하지만 나으리..."


"가서 실행하라."


아전들이 물러갔다.


정약용은 홀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백성은 구덩이에 빠진 것과 같다.

밧줄을 던져야 한다.

지금 당장.'


며칠 후.

정약용은 직접 곡성 마을을 돌았다.


어떤 집은

아이들이 풀죽을 먹고 있었다.

어떤 집은

노인이 누워서 일어나지 못했다.


정약용은 장부를 꺼냈다.


아전에게 지시했다.


"이 집에 쌀 세 말.

저 집에 쌀 두 말.

기록하라. 상세하게."


"예, 나으리."


"부정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한 톨도 빼돌려서는 안 된다."


환곡이 풀렸다.


백성들이 곡식을 받았다.


어떤 이는 울었고,

어떤 이는 절을 했다.


이듬해 봄.


회수할 시기가 왔다.


아전이 보고했다.

"나으리, 백성들이 아직

곡식을 갚기 어렵다 합니다."


정약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다.

흉년은 하루아침에 끝나지 않는다."


정약용은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곡성의 백성들은

아직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환곡 징수를 유예하고,

일부는 탕감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며칠 후,

조정의 답이 왔다.


허락.


아전이 물었다.

"나으리,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책임 문제가..."


정약용이 웃었다.

"책임?

내가 책임져야 할 것은

내 벼슬이 아니라

백성의 목숨이다."


정약용은 창 밖을 바라보았다.

봄볕이 따스했다.


'봉공(奉公).

공적인 임무를 받드는 것.


그것은

나의 안위가 아니라,

백성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다.'


AI 시스템이 작동한다.

효율을 추구하고,

비용을 절감하고,

속도를 높인다.


그러나 때때로,


자동화된 복지 심사는

서류라는 틀만으로 사람을 걸러내고,


AI시스템은

단지 '위험 점수'라는 이유만으로

정작 도움이 절실한 이들을

제외해 버리기도 한다.


창고가 있어도

그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이다.


정약용은 묻는다.


"당신의 시스템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기술의 효율인가,

사람의 생명인가?"



창고의 문.


정약용은

주저 없이 열었다.


책임을 무릅쓰고,

백성을 위해.




[내일 계속]

숫자가 담지 못한 눈물.

목민심서 제4부. 애민(愛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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