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문이 뚫렸다.

이전 제6조. 수문(守門).

by 구현

2024년 가을.

서울.

수진, 32세.


월요일 오전 9시를 기다렸다.

공공 체육시설

배드민턴 코트 예약일.


일주일에 한 번. 월요일 오전 9시.

선착순.


수진은

알람을 맞췄다.


8시 50분에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다.


8시 59분.

예약 페이지를 띄웠다.


8시 59분 50초.

손가락을 마우스 위에 올렸다.


9시 정각.

클릭.


"이미 마감되었습니다."


수진은 시계를 확인했다.

9시 0분 1초.


1초.

1초 만에

10개 코트가 모두 사라졌다.


불가능했다.

수진은

예약 현황을 확인했다.


10개 코트.

모두

같은 시간에 예약됐다.


9시 0분 0.1초.

0.1초.

사람의 속도가 아니었다.


매크로(Macro).

자동화 프로그램.

누군가

프로그램을 돌렸다.


9시 정각이 되는 순간

자동으로 클릭하고,

자동으로 예약하고,

10개를 한꺼번에 쓸어갔다.


시스템은

사람과 기계를 구별하지 못했다.


'선착순'이라는

공정한 규칙은

기계 앞에서 무너졌다.


수진은

다음 주를 기다렸다.


하지만

다음 주도,

그다음 주도,

똑같았다.


0.1초.

마감.


凡屬公事, 不許私相稟議, 須從公道

범속공사, 불허사상품의, 수종공도


"공적인 일은

사사로운 논의를 허락하지 않으며,

반드시 공적인 길을 따라야 한다."


수문(守門).

문을 지키는 것.


정약용 시대.

관아에는 정문이 있었다.


백성이

관아를 찾아올 때

반드시 정문으로 들어와야 했다.


순서를 지키고,

절차를 따르며,

공정하게.


뒷문으로

몰래 들어오는 자.

담장을 넘는 자.


정약용은

그들을 막았다.


뒷길(私道)을 차단하고

정문(公道)만 열어놨다.


그것이

공정함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AI 시대.

관아의 문은

온라인 시스템이 됐다.


하지만

그 문은 뚫렸다.


매크로는

정해진 화면(정문)을 거치지 않고

시스템의 뒤편으로

직접 침투했다.


이것은

담장을 넘는 것이다.

월장(越牆).

명백한 뒷길.


門外不得喧嘩擁擠, 違者治罪

문외부득훤화옹제, 위자치죄


"문밖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혼잡하게 에워싸지 마라.

어긴 자는 죄로 다스린다."


0.1초에

수천 번의 접속 요청.

매크로가 만드는

이 트래픽은

관아 문 앞의 훤화옹제다.


서버는 비명을 지르고,

질서 있게 줄을 선 백성들은

문턱조차 밟지 못한다.

디지털 공도(公道)가

무너진 현장이다.


2024년 겨울. 서울시는

배드민턴 코트 예약 시스템을

변경했다.


선착순 폐지.

추첨제 도입.

비정상적 속도 탐지.

봇 차단 알고리즘.

패턴 분석을 통한

부정 예약 취소.


수진은 다시 신청했다.

이번엔

매크로가 아니라

사람들과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었다.


추첨 결과. 당첨.

수진은 배드민턴 코트에 섰다.


수문(守門).

문을 지키는 것.


AI 목민관의 책임은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 시스템의 문을

공정하게 지키는 것이다.


뒷문을 열어두고 방치하는 것은

직무유기다.


반칙하는 자가

이득을 보는 시스템은

더 이상 공공이 아니다.


정약용은 AI 목민관에게 묻는다.

"당신은

공정하게 문을 지키는

수문장인가?


아니면

뒷문이 뚫린 줄도 모르고

잠들어 있는

관리인인가?"




[내일 계속]

투명한 유산.

이전(吏典)을 마무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