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경고등이 꺼진 밤

목민심서 제 8부. 병전(兵典)

by 구현

兵者 不得已而用之. 병자 부득이이용지. 무력은 부득이 할때만 사용해야 한다.


정약용은 목민심서 병전(兵典)을 시작하며 이렇게 썼다. 병(兵)은 군사를 뜻하지만, 넓게는 재난에 대비하는 모든 힘을 의미한다. 위기란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이기에, 평화로운 시절에도 목민관은 위기를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정약용이 강조한 것은 화려한 무기나 거창한 계획이 아니었다.


雖有其法 不如其人. 수유기법 불여기인. 아무리 정교한 법이 있어도,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만 못하다. 재난 대응의 핵심은 매뉴얼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서울의 한 자치구. 구청장 이재민은 새로 도입된 AI 재난 예측 시스템 '가디언'의 대형 모니터 앞에 서 있었다. 화면에는 실시간으로 기상 데이터, 하천 수위, 유동 인구가 표시됐다. 시스템은 지난 50년간의 재난 데이터를 학습했고, 99.2%의 정확도로 위험을 예측한다고 홍보됐다. 이재민 구청장은 이 시스템 도입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예산도 절감되고, 인력도 줄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이 직접 돌던 순찰을 줄일 수 있었다.


"이제 사람이 일일이 돌 필요가 없어. 데이터가 다 알려주니까."


구청의 순찰팀은 20명에서 5명으로 줄었다. 그중 한 명이 박철수였다. 62세, 이 동네에서 30년을 산 토박이였다. 그는 AI 시스템 도입 이후에도 여전히 매일 저녁 동네를 돌았다. 상급자들은 불필요하다고 했지만, 박철수는 습관처럼 발걸음을 옮겼다. 하천 옆 산책로를 걷고, 하수구 뚜껑을 확인하고, 독거노인 집 대문을 두드렸다.


7월 어느 날,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오후 6시, 구청 상황실. 가디언 시스템의 화면에는 녹색 불이 켜져 있었다. "하천 범람 위험: 낮음. 침수 가능성: 15%."


이재민 구청장은 안도했다. "시스템이 안전하다는데 뭐가 문제겠어."


같은 시각, 박철수는 하천 옆을 걷다가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미묘한 흙탕물 냄새. 그리고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쥐 떼가 하수구에서 나와 언덕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박철수는 오랜 경험으로 알았다. 이건 위험하다. 하천이 범람하기 전의 징후다.


그는 급히 구청 상황실에 전화했다. "지금 대피령을 내려야 합니다. 하천 주변이 위험합니다."


상황실의 보고를 받은 이재민 구청장은 화면을 보며 말했다.


"시스템에는 안전하다고 나와 있어. 괜히 주민들 놀라게 하지 마. 민원 들어오면 골치아파. 데이터를 믿어."


不敎而戰 是謂棄之. 불교이전 시위기지. 가르치지 않고 싸우게 하는 것, 그것은 백성을 버리는 일이다. 박철수는 구청에서 순찰대원 교육을 받으면서 배웠던 정약용 선생의 말이 떠올랐다. 제대로 된 현장 훈련도 없이, 오직 모니터 속 숫자만 믿고 주민들을 방치하는 것은 목민관이 백성을 스스로 버리는 행위과 같다고 했다. 박철수는 혼자서라도 움직이기로 했다.


그는 하천 주변 집들을 하나하나 돌며 문을 두드렸다.

"할머니, 지금 대피하세요. 위험합니다."

"아이고, 무슨 소리야. 구청에서 괜찮다고 했잖아."

"제 말 믿으세요. 나중에 실컷 욕하셔도 되니까, 우선 피하세요."


어떤 노인들은 박철수의 간곡함에 짐을 챙겼다. 어떤 이들은 "난리 떤다"며 무시했다. 박철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문을 두드렸다.


밤 11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하천이 아니라 도로가 먼저 무너졌다. 지반 침하. AI 시스템은 하천 수위만 계산했지, 오래된 하수관과 약해진 지반은 계산하지 못했다. 도로 한가운데가 갑자기 꺼져 내렸고, 물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구청 상황실의 화면이 빨갛게 변했다.

"긴급 경보. 침수 위험 90%." 너무 늦었다.


박철수가 대피시킨 집들은 무사했다. 13가구, 28명. 그들은 박철수의 말을 믿고 미리 대피했다. 반면, 시스템만 믿고 남아있던 가구들은 급히 구조됐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재산 피해는 컸다.


다음 날 아침, 이재민 구청장은 박철수를 불렀다. "박 대원, 어떻게 알았습니까?"

박철수는 조용히 말했다. "평소와 다른 냄새와 쥐떼를 봤습니다. "

구청장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安在不忘危. 안재불망위.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 것. 정약용이 병전의 마지막에 쓴 말이다.


순찰은 사고가 터진 뒤가 아니라, 평온한 일상 속에서 계속되어야 한다. 박철수는 매일 저녁 동네를 돌았다. AI 시스템은 그것을 불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날 밤, 28명의 생명을 구한 것은 99% 정확도의 데이터가 아니라, 30년간 매일 저녁 발로 뛴 박철수였다.


정약용은 강진 유배지에서 이렇게 썼다. "법이 아무리 정교해도 사람만 못하다."


AI는 통계적 확률을 계산한다. 하지만 목민관의 발걸음은 단 한 명의 생명을 쫓는다. 하수구 냄새를 맡고, 쥐의 움직임을 보고, 노인의 문을 두드리는 것. 그것이 진짜 순찰이다. 그것이 백성을 지키는 일이다.


박철수는 다음 날 저녁에도 동네를 돌았다. 비가 그쳤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하천을 확인하고, 하수구를 점검하고, 노인들 집 대문을 두드렸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아이고, 어제 덕분에 살았어."


박철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의 웃음이 그가 지키려는 것이었다.

정약용이 말한 병전(兵典)은 거창한 전쟁 준비가 아니었다. 매일 저녁 동네를 도는 발걸음이었다. 데이터가 놓친 냄새를 맡는 코였다. 시스템이 계산하지 못한 생명을 지키는 마음이었다. 그것이 목민관의 순찰이고, 그것이 백성을 사랑하는 길이었다.


[내일 계속]

병전 1조. 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