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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의 출판일기 - 6. 원래 다 그렇게 한다

by Uncle Lee

제가 소프트웨어 개발을 오랫동안 해오면서 프로그래머로서 가장 조심하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원래 다 그렇게 한다" 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원래 라는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 말에는 난 그냥 해오던거 그대로 해왔으니 아무 잘못 없다 라는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절차적으로 문제는 없지만 상대방 입장에서는 아쉽고, 비협조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1인 출판사도 사업이므로 우여곡절은 많을거라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습니다.

정식으로 출판사 일을 해본것도 아니고 직접 체험하며 배우고 있기에

어느정도 수업료를 치를 각오는 했습니다. 단지 미리 사고를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제가 전문가라고 생각했던 분들이 그걸 캐치하지 못했던게 아쉬울 뿐이었죠.


그분들 입장에서는 "원래 다 그렇게 해왔다"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수십년간 인쇄나 출판일을 한것도 아니고, 전문가와 고객의 입장으로 거래를 하는건데 비전문가인 고객한테 "원래 다 그렇다"라는 말은 좀 무책임하고 프로답지 않게 들릴수 밖에 없습니다.


결론만 얘기하면 책이 원하는대로 인쇄가 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억울했지만, 대화를 하면서 꼬인 줄을 풀어나갔고

인쇄소가 일하는 방식, 내가 생각했던 방식에 대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좀 긴 글이 되겠지만 며칠간 있었던 사건을 한번 풀어보겠습니다.




원고 편집, ISBN까지 다 발급 받으면 이제 책을 인쇄해야 합니다.

인쇄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크게 나눠보면 롤러에 잉크를 묻혀 대량으로 찍어내는 옵셋 인쇄,

프린터와 비슷한 방식으로 찍어내는 디지털 인쇄가 있습니다.


옵셋 인쇄는 한번에 몇천부, 몇만부를 찍기 때문에 총 비용이 큽니다.

하지만 많이 찍을수록 책 한권당 단가는 저렴해지죠.


디지털 인쇄는 한부~수십부 또는 2~3백부 처럼 비교적 소량을 찍을 때 주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 이상 넘어가면 책 한권당 단가가 비싸지기 때문에 비용면에서 효율적이지 못하죠.



감리를 가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보통 디지털 인쇄로 샘플북을 만들고 책의 크기, 본문의 레이아웃, 표지의 색감등이 원하는 대로 나오는지 살펴봅니다. 모니터로 보는 화면과 실제 인쇄물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죠. 그 다음 대량 인쇄인 옵셋인쇄로 넘어갑니다. 옵셋인쇄는 한부만 뽑을 수 없어 한번 시작하면 비용이 많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출판사 직원이 인쇄소에 가서 직접 인쇄 상태를 확인해 보며 색감을 맞춰나간 후 최종 컨펌을 하죠. 이걸 "감리"라고 부르는데 이번에 첫 책을 내면서 이 감리라는 것을 못했습니다. 결국 출판사에서 원하는 느낌의 책을 만드려면 반드시 감리를 가야 하는데 이걸 못했으니 원하는대로 나오지 않아도 할말이 없는것이긴 합니다. 출판사에서 감리를 직접 하지 않으면 인쇄소에서 일하시는 분이 체크해주기는 하지만 원본의 느낌이 어떤지 인쇄소에서는 알지 못하므로 디테일한 부분을 놓칠수 있죠.


감리를 못간것에 대해서는 어떤 핑계를 대어도 할말이 없지만 이 또한 저의 성격탓도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 작업이 아니라 출판사 회사 차원의 작업이기에 제 성격을 내려놓고 냉정하게 판단해서 감리를 가겠다고 주장했어야 하는데 말이죠. 상대방에게 설득을 잘 당하는 성격인지라 그냥 잘 해주겠지 생각했던게 문제였습니다. 물론 대부분 잘 해주기는 하겠지만 그게 내 마음에 맞게 해준다는 뜻은 아니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 말 속에는 추후 분쟁이 생겼을 때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말아라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결국 감리를 갈지 안갈지에 대한 최종 결정은 출판사가 하는 것이고, 인쇄소에서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거래를 하지 말았어야 했죠.



샘플북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대량 인쇄인 옵셋 인쇄에 들어가기 전에 샘플북을 한두권 뽑아 놓습니다. 이걸 보고 최대한 비슷하게 맞춰야 하기 때문이죠. 신생 출판사로서 이번 책을 인쇄하면서 3~4군데에서 샘플북을 뽑아봤습니다. 종이의 느낌, 레이아웃, 색감등을 각각 다르게 해보면서 최적의 값을 찾기 위함이었죠.


그리고 본 인쇄를 할 인쇄소에 최종 원고를 전달하면서 마지막으로 샘플북을 또 뽑습니다. 샘플북은 디지털 소량 인쇄라서 권당 단가는 더 비싸지만 그래도 성공적인 옵셋 인쇄를 위한 투자로 생각했습니다. 또한 같은 인쇄소에서 샘플북과 옵셋인쇄 모두 다 진행해야 비슷한 색감이 나올 수 있을거라 생각했죠. 다른데서 인쇄한걸 가지고 와서 왜 이거랑 다르냐 라고 하는건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이 샘플북을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다르다는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출판사 입장에서 샘플북을 먼저 뽑고 본 인쇄에 들어가면 당연히 샘플북과 비슷한 수준으로 나올거라는 기대를 했습니다. 다른곳도 아니고 같은 인쇄소에서 두가지 모두 진행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인쇄소 입장은 달랐습니다. 샘플북은 그냥 샘플일 뿐이고, 책의 모양, 크기등 레이아웃만 확인해야 한다라는 것이죠. 색감을 다를 수 있다. 당연히 색감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색감의 차이와 잘못 인쇄된 것 하고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이건 잘못 인쇄 된거다, 인쇄소 입장에서는 이건 오류는 아니다, 감리를 안봤으니 뭐라 해서는 안된다 이런 상황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샘플북과 비슷한 느낌에서 색감정도의 차이라면 수긍을 하겠지만 원본에 없는 색상이 들어가고, 잘못된 결과물로 보였기에 처음에는 정말 당황스러웠습니다. 샘플북은 옵셋 인쇄할 때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는데요, 이게 이 인쇄소만의 일하는 방식인지 대부분의 인쇄소가 이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사실 옵셋 인쇄할 때 샘플북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왜 샘플을 뽑는지도 이해가 안갔습니다. 뭐 이것도 '원래 다 그렇게 한다'라고 한다면 할말은 없죠. 인쇄소에서는 샘플북을 뽑으라고 강요하지도 않았고, 출판사의 결정에 따라 진행한 것이니 절차에 익숙하지 않은 신생 출판사의 실책인 것이죠. 하지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건 어쩔 수 없습니다. 새로운 고객을 상대할 때도 기존에 해왔던 관행만을 고집한다면 법적인 책임은 없겠지만 앞으로 꾸준한 거래의 관계가 성립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최종 검수라는 단어의 의미

사실 본 인쇄에 들어가기 전까지 사고를 막기 위한 여러가지 과정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최종 검수죠. 인쇄소에서는 검판 파일을 보내주고 이 검판 파일을 출판사에서 확인하여 최종 컨펌을 내립니다. 컨펌이 내려오면 인쇄소에서는 이 파일을 인쇄기로 넣고 인쇄를 진행합니다.


이번 인쇄도 당연히 최종 검수 단계가 있었습니다. 인쇄소로부터 검판 파일을 넘겨 받았고 그걸 열어서 표지, 내지 글자 하나까지 모두 확인을 하고 컨펌을 했죠. 그런데도 인쇄 결과물이 잘못 나왔습니다. 여기서도 또 신생 출판사로서 혹독한 신고식을 치르게 된 부분이 있습니다.


최종 컨펌을 출판사가 했으니 절차상 문제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최종 검수를 위한 검판 파일을 열어보는 과정에서 서로 차이가 발생했습니다. 검판 파일을 열고 최종 인쇄모습을 확인하기 위한 숨겨진 단계가 하나 더 있었는데 저는 그걸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죠. 인쇄소야 수십년간 똑같은 작업을 해왔으니 그냥 '컨펌해주세요' 하고 파일을 넘겼고, 이제 막 출판사업에 뛰어는 저로서도 당연히 검판 파일을 열어서 눈으로 보고 이상 없으니 '인쇄해주세요'하고 넘긴 것입니다.


pdf로 넘어오는 이 검판 파일을 그냥 열면 PC에 설치된 pdf뷰어로 열리게 되죠. 크롬, 아크로뱃등 여러가지 뷰어가 있지만 제가 갖고 있는 모든 뷰어에서는 다 정상적으로 표시되었습니다. 그래서 최종 컨펌을 내린것인데 인쇄소에 가보니 숨겨진 과정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 버튼을 누르자 제가 보낸 원본 파일과 전혀 다른 모습이 펼쳐졌고요, 그 모습 그대로 인쇄가 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원래 그렇게 해왔었다

결국 인쇄소에서는 그냥 원래 하던대로 쭉 해왔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 라는 말을 하였고, 신생 출판사인 저는 왜 그 숨겨진 과정을 말해주지 않았냐라고 되물었죠. 하지만 이 역시 원래 다 그렇게까지 말을 안해준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소형, 대형 출판사와 다 문제 없이 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걸 따로 말해줘야 하냐 라는 것입니다.


저도 소프트웨어 개발로 수십년을 먹고살고 있는 입장이라 전문가들이 하는 과정에 대해 잘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들만의 규칙이 있고, 정형화된 과정이 있는 것은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데 당연히 필요한 것이죠. 하지만 저는 비전문가를 상대할 때는 다르게 행동합니다. 상대방이 소프트웨어 개발 과정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전문 용어를 쉬운 말로 바꿔 설명해 주고, 숨겨진 과정, 개발자라면 당연히 알 만한 단계들도 고객은 모를거라고 가정하고 말을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오해가 생기지 않고 서로간의 신뢰를 쌓을 수 있는 것이죠.


현업에서 기획자와 일할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로그램에 오류가 생기면 코드가 원인일 수도 있고, 데이터의 불량이 원인인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때 반응하는 프로그래머를 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주어진 데이터를 그대로 넣었고, 잘 읽어와서 실행한거니 프로그램에는 아무 문제 없어요."

(너가 데이터 한땀 한땀 눈으로 확인해서 오류 고쳐서 다시 줘야죠)


두 번째는, "뭔가 예상했던것 하고는 좀 다르게 나오는데 혹시 이 데이터를 이런 의도로 넣은게 맞나요? 제가 볼 땐 원래 의도와 다르게 데이터가 들어간 것 같아요. 이 부분은 A와 B가 연결되어야 하는데 연결 고리가 빠져 있어서 잘못된 값이 로딩되었네요."


두 상황 모두 프로그램에 버그가 발생한 상황이지만 작업자의 대응 방법은 하늘과 땅 차이 입니다.

첫 번째는 난 절차대로 진행했으니 사고가 터져도 아무 문제가 없다 라는 입장이고,

두 번째는 혹시나 발생할 수 있는 사고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 미리 오류가 예상되는 부분을 찾아내어, 상대방에게 수정 방향까지 제안을 해준 것이죠.


누구나 당연히 두 번째 사람하고 일하고 싶을겁니다. 두 번째 사람은 단순히 기계적으로 주어진 일을 하는것을 넘어서서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끌기 위한 협력자 같은 느낌을 주니까요. 그리고 이런게 쌓이면 점점 신뢰가 형성되고 프로그래머와 기획자가 서로 말도 잘 통하고 친해지는 결과까지 가져옵니다. 상대방을 잡아먹는게 아니라 서로 윈윈하는 것이죠. 절차가 중요하긴 하지만 어찌되었든 프로젝트가 성공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이번 인쇄 사고를 겪으면서 신생 출판사로서 신고식을 치뤘고 수업료를 냈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비즈니스에 우여곡절이 없는게 어디 있겠습니까. 처음에는 억울하기도 했지만 절차만 따져보면 인쇄소는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단지 그들이 일하는 방식이 낯설뿐이었고 굴러들어온 돌이 기존 환경에 적응해야 했던 것이었죠. 돈이야 또 벌면 되는 것이고, 돈에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출은 수입으로 채워넣으면 되는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은 몇 가지 남아 있습니다.

인쇄바닥이 매우 바쁘고 정신없게 돌아간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걸 고객한데 말해봤자 납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계는 24시간 돌아가고 거기서 한두장 빼서 샘플과 비교하는 과정 까지 진행하려면 수지가 안맞는다라는 것이죠. 출판사 입장에서 24시간 기계가 돌아가는지 알길도 없고, 그걸 안다고 해도 그 사정을 이해해주면서 작업을 맡길수는 없습니다. 비용이 부족하면 견적을 더 내면 되는 것이고, 그게 서로 안맞으면 거래는 성립되지 않는 것이죠. 그 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숨쉬듯 자연스러운 과정이었겠지만 처음 들어온 신생 업체로서는 좀 갸웃뚱 하게 되는 업무 처리 흐름입니다. 물론 이것도 출판사가 감리만 갔더라면 큰 비용 들어가기 전에 막을 수 있었긴 했습니다. 결국 감리를 못간게 아쉬울 뿐이네요.


전문가가 비전문가를 상대하는 방식에도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저도 개발을 오랫동안 해왔지만 기획자랑 얘기할 때 프로그램 전문용어는 안씁니다. 서로 개념을 알고 있는 단어라면 상관 없지만 멀티스레딩이 어쩌고, CPU가 A를 먼저 작업하고, B는 나중에 처리될 수 있어서 이건 문제된다 라는 복잡한 내용은 꺼내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주장해봤자 상대방은 겉으로 고개만 끄덕일뿐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채 자리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죠. 중요한건 컴퓨터가 어떻게 동작하냐가 아니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건지에 핵심을 맞춰야 하는 것입니다.


인쇄가 전문 영역이고 한 번 진행할 때 큰돈이 오가는 분야인데 출판사 입장에서 볼 때 생각보다 안전장치 없이 진행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수십년간 일을 해오신 분들은 당연히 노하우가 많을 테고 이런저런 일 다 겪었을 텐데 그냥 원래 이렇게 한다 라는 자세는, 고객이 어떤 잘못된 데이터를 가져오든 우린 그냥 기계적으로 클릭해서 넘길 뿐이다 라고 밖에는 안들립니다. 그럴거면 뭐하러 경험 많은 업체에 맡길까 싶었죠. 오히려 AI가 인쇄를 했다면 훨씬 더 꼼꼼하게 봐주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까지도 들었습니다. 원본 파일인 A와 인쇄 결과물인 B가 단순 색감차이가 아니라, 현저히 다르다는건 인쇄소에서도 인정했으나 결국 최종 컨펌은 출판사가 했기에 절차상 문제가 없다라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서로 다른 화면을 보고 컨펌을 했다는게 문제였지만요)




구구절절 길게 썼지만 지금은 마음 편한 상태입니다. 책을 다 버려야 할 정도는 아니고요, 이걸로 어떻게 잘 수익을 낼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인쇄소 가서도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하나 하나 디버깅을 하듯 알아내었고 서로 얘기도 잘 통했습니다. 결과물은 마음에 안들게 나왔지만 사람대 사람으로서 얘기할때는 서로 비슷한 부분도 많았고, 정 반대로 생각하고 있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처음 전화 통화로 인쇄결과에 대해 얘기했을 때는 걱정이 많이 들었는데 직접 대면해서 대화하니 여러가지 오해가 풀리더군요.


이런 부분은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이야 조금 속쓰리면 끝나지만 말이 안통해서 감정 상하는건 시간이 지나도 잘 풀리지 않으니까요. 이런 상황을 돌파해 나가고 틈새를 찾아내는게 또 비즈니스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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