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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의 글빵 숙제(보너스 숙제)

1-1. 그냥이라는 말 속에 담긴 것

by 조유상

언제부턴가 내 카톡방 대문간에 '그냥'이란 말 한 마디를 적어넣었다.


제법 여러 해 된 거 같다.


20대에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책을 뚫듯이 읽고 또 읽었다. 1988년 첫 출간된 책이었다.

수없이 많은 밑줄을 쳤겠지만 내게 깊이 남아 있는 말이 있었다. 감옥에서 남에게 무언가 사소한 거라도 주거나 받았을 때 공짜가 없다는 거. 하다 못해 감사의 말 한마디라도. 뭐든지 물질로 교환되는 가치가 통용되는 감옥 생활을 읽으며 당시 가난했던 나를 돌이켰다.


대학 시험을 앞두고 엄마는 내게 단호히 말했다. 너는 재수(再修)란 없다고. 세 살 터울난 작은 오빠는 삼수까지 했건만, 그 삼수 덕에 엄마가 지쳤는가 보다. 그래도 참 재수없는 말이었고 왜 나만 차별하는 거야 하며 반발했다. 여상을 권하기도 했던 터라 인문계를 향해 가던 나는 혹여 떨어질까 두려움 속에 시험을 치던 기억이 생생하다.


한 사람씩 앉게 책걸상을 길이로 늘어놓은 시험장 안에 수험표를 들고 들어가 시험을 치다가 잠시 쉬는 시간, 앞뒤로 앉은 이들 줄을 죽 바라보며 함부로 말을 섞지 못했다. 삶의 다른 장면에서 만났더라면 몰라도 하필 시험장 아닌가. 이들 중 누가 붙고 누가 떨어질 건지 모르니 어설피 친근하게 다가갈 수 없었다. 거리가 폭넓은 강물처럼 넘실댔고 어색하고 불편했다.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시험지에 다시 코박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넘을 수 없는 선이 거기 있었다.


나는 두어 명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고 재수를 하는 일은 다행히 없었다. 그 중에 해맑고 활달하게 나에게 먼저 인사하며 말을 건넨 진해 아이도 있었고 코가 길고 하얀 얼굴도 있었다. 당연히 동기생이니 처음부터 반말로 시작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코가 긴 아이는 내가 나온 고등학교 일 년 선배였다. 재수를 하고 들어온 거였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미 말을 깠는데, 다시 이어붙여 높이는 것도 아닌 거 같았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 자꾸 마주치는 걸 피하게 되었다. 남들은 어떻게 하려나 궁금했지만 말을 먼저 잘 안 붙이는 성격이다 보니 누구에게 물어보지도 않게 되었다. 그렇게 어색한 한 달이 지나고 나중에 그애한테 직접 물어보게 되었다, 간신히.


근데, 내가 뒤늦게 자기가 선배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 이미 말을 놓아버렸으니 다시 높여야 되나 어째야 되나 모르겠다...고 했더니, 고개를 삐따닥히 하고 손바닥으로 머릴 휙 쓸어올리는 제스처가 담긴 말투로 '그냥 반말로 해도 돼, 어차피 놓았는 걸 뭐.'라고 생색내듯 말해서 어정쩡하게 어, 그래 하긴 했지만 그 뒤로 그애와 더 이상 가까워질 수는 없었다. 그는 재수한 동기 몇몇과 더 친하게 어울려 다니곤 했으니까.


이미 그 대답 속에 고까움이 한 바가지 들어 있었다. 아, 눈치없는 나는 그렇게 까이고 말았으나 하나도 아쉽진 않았다. '신포도'여서가 아니라 그 친구는 내 스타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때 알게 되었다. '그냥'이란 말은 '그냥'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냥'이란 말 속에 '아무런 바라는 것 없이'라는 함의가 있다면 그때의 그냥은 '어쩔 수 없으니 봐준다'는 뜻의 그냥이었다고나 할까? 또 뭐가 들었으려나? 불쾌감과 같잖다는 판단까지 들어 있던 건 아니었을까?



용돈을 넉넉히 가지고 다니지 못한 때라 무얼 사먹으려도 주머니 속사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친구들한테 덕금덕금 뭘 사줄 수도 없으니 마음도 활수가 못되고 쪼그라들었다. 뭘 받으면 갚아야 하는데 할 수 없는 심정... 있는 집 아이들은 몰라도 되는 거였다. 부잣집 친구들은 카페에서고 떡볶이집에서고 아무렇지 않게 척척 지갑을 열었지만 얻어먹는 내 마음은 한귀퉁이가 짜부러져 쉽게 펴지질 않았다.


그런 형편이다 보니 나는 무얼 주고 받는 것에 무척 예민하게 되었다. 사람은 그냥 주고 그냥 받으면 안 되는 걸까?


대학원을 졸업하고 뒤늦게 시간강사가 되었을 때다.

뭔 때만 되면 교수들한테 찾아가는 시간강사들은 완전히 을이었다. 을중의 을인 나는 우리가 싫어하던 늙은 여교수한테 '유상이 너는, 아쉬울 때만 찾아오는구나!'하는 말도 들었다. 그말을 할 때 그 눈에 가득 담긴 경멸을 보았다. 가늘고 긴 다리를 옆으로 꼬고 앉은 자세까지도 기억난다.


아니, 그럼 네가 그렇게 고깝게 강사 자리 하나 주면서 고압적인 자세로 구는데 내가 너한테 인간적인 정을 느끼면서 다가가기라도 해야한다는 거야? 넌 뭘 바라는 거지? 교수의 말이 찌른 곳에서 이런 반발이 분수로 솟구쳤다. 겉으론 머릴 수그리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독오른 메두사가 되어 빳빳이 고개를 치켜들고 잡아먹을 듯이 혀를 낼름거리고 있었겠지. 내가 입이 없어서 말 못하는 건 아니다 하며.



모든 관계는 주고 받는다. 똑같은 질량으로 계량 될 순 없지만, 부모자식 간에도 마찬가지다.


신영복 선생은 그 즈음 내 맘 속 깊이 뿌리잡은 선생이었다. 마음에 예민해지는 걸 감옥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또 미세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주고 받는 것이 일상이고 마음이라는 거 인정한다. 뭔가 주었는데 서운함이 남아 있어 되돌아 보면 거기에 답례(答禮)가 도착하지 않았을 때였다. 그게 답례품이거나 감사 표현 한 마디라도.


하지만 주는 만큼 받으려는 마음을 깍아내고 덜어내고 지워내는 건 내 몫이었다.



관계, 과연 나는 어떤 관계를 갈망했던가?

내가 바라는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무엇을 줄 때 받을 사람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는 게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관계가 어설픈데 큰 것을 주면 상대는 당황할 수 밖에 없다. 물론 받는 게 자연스런 습관이 되어 무감해진 사람은 예외다. 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서로가 갚을 만하게 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주기만 하는 사람은 없다. 예수가 아닌 이상.


시골에 와서 살면서 더 많이 느꼈다.

가끔 호박죽을 쑬 때가 있다. 우리집 식구들은 호박죽을 나 빼고 좋아하질 않는다. 하지만 할머니들은 대개 좋아들 하셨다. 깔방석만치 커다란 맷돌호박 하나를 잡아 들통 가득 호박죽을 쑤면 누가 다 먹겠는가? 나는 그릇 그릇 나누어 따뜻할 때 할머니들께 자전거를 타고 가 돌렸다. 모퉁이 돌아 민호할머니네, 그 옆집 자주 입원하시는 사슴할머니네, 고 옆에 주씨 아저씨네, 그 옆 까치할아버지네, 조합장 아주머니와 이장 언니네. 그 담에 더 가서 허리가 꼬부라지고 잘 못 걸으시는 경근이어머니네... 주로 혼자 사시는 분들께 살며시 가서 안 계시면 다른 그릇에 담아놓고 나오기도 했다. 그러다 혹시라도 누워계시는 할머니를 만나면 두어 마디라도 더 건네고 따뜻할 때 드시라고 수저랑 챙겨드리고 온다. 그러면 할머니들은 내 손을 잡고 하영 엄마, 기달려 봐 봐 니? 하시면서 사과 한 알, 배 한알이라도 챙겨 봉지에 담아주신다. 아이구, 괜찮아요~ 하면서도 난 그분들의 정을 '그냥' 고맙게 받아온다. 그래야 그분들 맘이 편하시다는 걸 아는 까닭이다. 그분들의 자존심도 덤으로 받아온다.


주는 이 생색도 받는 이 부담도 맞잡은 손에서 바로 제로가 된다. '그냥'이다. 시골에 와서 산 지 30년, 나는 이런 소소한 나눔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 받아 들고 온 꺼먹 봉지엔 온기가 가득했다.


그냥을 산다.

그냥이 좋다.


그냥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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