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빈 논에
봄부터 어린싹 받아 안고
뭉클뭉클 진흙 속 뿌리 키우더니
한여름 뙤약볕 다 이겨내며
땀 뻘뻘 흘려가더라
비바람도 버텨내고
더위에 늘어진 이들 쉬고 있어도
땡땡한 가을볕 한 사발씩 들이켜
벼 알갱이 통통히 키워내더니
알곡 다 내어주고 뿌리만 남았네
가슴에서 키워내 쌀쌀한 쌀이
밥이 되어 생명의 밥으로 거듭나고
텅 빈 몸 빈손으로 허허 웃는 그대
봄부터 가으내
쉼 없이 달려온 그대
너부죽이 엎드려 쉬어도 좋으리
얼음 쩡쩡, 눈발 한가득
고스란히 받아 안고
어화둥둥 내 사랑
골골이 아무렇지 않게 부끄럼 없이
뱃고래 다 보여주고 있고나
그대에게 기댄 생명
그대를 바라보며
내 한 해는 밥값에
부끄럽지 않았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