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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이 맛이야

1. <색이름> 이름하여

by 조유상

'알맞은 시간'을 찾아 맞춤한 시간에 나섰다. 작은 골목 입구에서 만난 풍경이 사로잡는다.

마주 오는 차 때문에 좁은 길에 세우질 못하고 저만치 차를 두고 되짚어 온다.

붉은 피꽃을 뚝뚝 떨군 동백낭들

사뿐히라도 지르밟지 못하겠네

우람한 소나무에 꿈틀대며 필사적으로 매달린 혈관 닮은 울퉁불퉁 덩굴식물

흡사 아비규환 인간 군상 같다.


살아낸다는 건 저토록 몸부림이다.


동백 한편에 폭죽 터지는 매화와

흰동백이까지 마중 나와 있다.

이미 설렘 충분하다.


카페 ‘알맞은 시간’에 알맞게 와서 살그머니 그 어둠에 묻혔다.

귤 창고를 개조해 만든 크지 않은 공간에 작은 탁자 5개가 가운데만 좀 더 밝은 갈색이고 나머지는 어두운 갈색이다.

이 자그맣고 좁은 공간 어디에 책들이 꽂혀 있다는 게지?

천천히 둘러본다.


아, 내가 마침 자리 잡은 곳 구석탱이 바로 옆, 가슴 높이께 오는 작은 책장이 보인다.

이곳은 어둡다, 전체적으로.


노안이 이미 오래전에 온 나는 어둠에 적응하기 쉽지 않다만 조용해서 맘에 든다. 조용함을 유지케 하는 비결이 메뉴판에 적혀 있고 읽어보도록 안내받는다.

감자 한 모와 시나몬 우유커피를 주문한다.

두부 1/4조각만 한 감자가 든 케이크가 두부 한 모가 아니라 '감자 한모'다. 이 작은 위트도 맘에 든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할 걸 잠시 후회했지만 감자 한 모가 그리 달지 않아 후회를 금방 접는다.


요새 계속 안경을 쓰고 있다 보니 눈밑 안경 발자국(노즈패드) 닿는 살이 살짝 까지고 있다. 집에선 휴지를 작게 잘라 대고 있었으나 여기선 민망해서 그러기도 어렵네. 집을 나서며 그 걱정부터 했는데 안경을 조금 내려쓰니 견딜 만하다. 눈은 갈수록 나빠지는데 읽고 싶은 책은 점점 늘어나기만 하다니... 아흑.

이 카페에 책이 많은 건 아닌데 내가 좋아하는 은유 샘 책, 쓰기의 말들과 <올드걸의 시집>도 있고 <슬픔의 방문>도 있다. 오, 이것만으로도 여기 꽂혀 있는 책들이 벌써 신뢰가 간다.

<색이름>이라는 도톰한 책을 꺼내고 열댓 권을 더 꺼내 뒤적인다. 도서관 규모가 아닌데도 볼만한 책이 제법 많다.


<색이름> 책부터 스르륵 펼쳐 보며 읽어본다, 아니 살펴본다. 새롭다.


보다가 풋, 웃음이 번진다. 간장색, 고추장, 된장색이라니. 이 책을 만든 저자는 된장과 고추장을 담가 보았으려나? 그건 차치하고라도 메주를 소금물에 띄워 가르고 난 뒤 차차로 익어가는 변화, 간장과 고추장에도 햇볕과 바람 사이 얼마나 오묘한 색 변화가 이루어지는지를 알고 있을까? 마른 다시마와 불린 다시마의 다른 질감과 색 차이를 알고 있으려나? 이 재미난 색이름 사이 못내 아쉬운 색감들, 말로 다 표현해내지 못할 색들이 얼마나 많을지를 헤아려 보기는... 했겠지, 아마도?


호박색이라니. 호박이 꽃을 피우고 수정되어 똑 떨어지기 전 매달린 애기 호박부터 점차 자라나며 변화되는, 초록이 결코 동색일 수 없는 그 변화를 한마디 호박색으로 무 자르듯 부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까? 푸르르다 진초록이 되다 황갈색이 번져가며 뒤섞이다 점차 늙은 호박색으로 변하고 또 호박도 진초록인 채로 다 익었어요~ 말하는 녀석도 있다는 건 또 모르지 않았을까?

수수가 익어가며 보이는 변화, 익어버리기 전의 색과 익은 후 마르면서 더 진해지는 색, 계수나무 이파리가 짧게 깎은 연필심만큼 나올 때와 청년이 되었을 때, 늦가을이 되었을 때 진 붉음으로 변해가는 그 색을 다 겪어보았으려나?


모자란다, 모자라.

세상의 모든 색은 그가 만들어 이름 붙인 352개가 아닌 수천만 개로 흩날리고 피고 진다. 머물고 품었다 사라진다.


모과색, 옥수수색, 볏짚색, 마늘색, 참외색도 마찬가지. 농사지으며 벌판에 나아가 끝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보던 내 눈에 담긴 색상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채 이름하여 담을 수 없는 색채만큼 풍요로웠던 세상의 모든 빛들, 또 미처 만나지 못한 저녁노을 빛깔까지도.


그가 여는 말에서 밝힌 것처럼 ‘더 선명하고 다양한 빛깔로 채워질 앞으로의 날들이 기대’된다, 나도. 오이뮤 작가만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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