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위협은 외부에 있었다. 1815년 3월 13일, 유럽 연합군(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이 다시 돌아온 나폴레옹을 저지하기 위하여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사실 이 전투는 영국 군대와 프로이센 군대가 합쳐지기 전 적군을 격파해야 하는 시간과의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나폴레옹은 당대 최고 전술가답게 자신만만했다. 프랑스군 7만천 명을 둘로 분산하여 영국군 6만 8천, 프로이센 군 5만 명을 각각 대적하기 충분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하는데 바로 전투 전날 비가 내려 땅이 물러 진군을 할 수 없어 출정이 계획보다 지연된 것이다. (혹은 나폴레옹의 평소 지병인 위경련이 크게 나서 지연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전투는 원래 예상보다 늦은 오전 11시경 시작되었다. 예상처럼 강력했던 프랑스 군대와 맞붙은 영국 웰링턴 장군은 프로이센 군대를 기다리며 버텼다. 그리고 마침내 오후 4시경 프로이센 군대가 도착하자 전세가 연합국에게로 기울기 시작했다. 특히나 프로이센 진영으로 보낸 프랑스 군대가 늦게 워털루로 발길을 돌리며 영국과 프로이센 연합군을 동시에 대적하던 나폴레옹은 결국 오후 7시경 후퇴를 외치며 파리로 퇴각을 결정한다. 약 반나절 동안 진행되었지만 사망자는 각각 영국군 1만 5천 명, 프로이센 군 8천 명, 프랑스군 2만 5천 명(+ 9천 명의 포로)으로 당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그가 파리 엘리제 궁전에 도착하자 의회는 다시 나폴레옹의 황제직을 박탈한다. 나폴레옹은 연합군을 피해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지만 이마저 영국군의 저지로 무산되고 연합군의 결정에 따라 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떠나며 그의 백일천하는 끝이 난다. (1815년 6월 22일)
그의 유배길에는 많은 측근들이 따랐지만 정작 그의 가족이었던 아내 마리 루이즈와 아들 나폴레옹 2세는 끝까지 볼 수 없었다. (특히 가족으로부터 한 장의 서신조차 받을 수 없었는데 오스트리아에서 강제적으로 차단하기도 하였지만 당시 마리 루이즈에게 다른 정인이 생겼었다.)
헬레나 섬에서 영군군의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던 나폴레옹은 지인들과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지만 54세의 젊은 나이에 지병이었던 위염이 악화되어 위암으로 생을 마감한다. (1821년 5월 21일)
내 유해는 사랑하는 프랑스 국민 사이에서 파리 센 강 가에 뿌려지길 원한다.
사람이기 때문에 완벽하지 않았지만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프랑스와 국민들을 생각하던 그의 마음이 오늘날까지도 그를 영웅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지금 그의 무덤은 파리 군사 박물관, 앵발리드에서 만나볼 수 있는데 프랑스 마지막 왕, 루이 필립 1세가 혁명 이후 겪었던 혼란기(공화국, 왕정, 제정 등등)를 중재하는 의미로 헬레나 섬에서 파리 앵발리드로 이장을 진행하였기 때문이다. (1840년 12월 15일)
여전히 많은 프랑스인, 외국인 관광객들이 매해 앵발리드를 찾는데 어쩌면 우리는 지금 이 혼란한 시대에서 우리를 지켜줄 나폴레옹 같은 영웅을 염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