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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국 Feb 14. 2023

[01]서울? 인천? 대전? OB 베어스 연고지 이야기

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이자 기억의 스포츠다. 오늘부터 최초의 한국프로야구팀이자 최초의 한국시리즈 우승팀 두산 베어스의 역사와 기록은 물론 그 발자취 속에 간직된 우리의 추억과 눈물과 환호들을 하나씩 풀어갈 예정이다. 두산 베어스를 아끼는 팬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를 시작한다.


OB 베어스는 1982년 1월 15일에 원년 6개 구단 중 가장 먼저 창단식을 열었다. 고 박용곤 구단주가 박용민 초대 단장에게 구단기를 전달하고 있다. ⓒ두산 베어스


현재 두산 베어스의 연고지가 서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야구팬은 없다. 그리고 1982년 KBO리그 출범 당시 OB 베어스가 대전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팬도 거의 없다. 그러나 하마터면 OB 베어스가 인천에서 시작할 뻔했다는 사실을 아는 팬은 얼마나 될까.


[베팬알백-베어스 팬이라면 죽기 전에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의 첫 장은 역사의 타임머신을 타고 대한민국 최초 프로야구팀 OB 베어스가 탄생한 과정부터 돌아본다. 베어스는 왜 대전으로 내려갔던 것일까. 만약 인천으로 갔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1982 OB 베어스 창단 기념행사 ⓒ두산베어스


● 서울도 대전도 아닌 인천?


"그럼 우리가 인천으로 가겠소."


난감한 일이었다. 프로야구 출범을 앞두고 강력하게 서울 연고권을 주장하던 두산그룹을 가까스로 설득해 대전에 둥지를 틀게 만들었는데, 느닷없이 두산 쪽에서 “우리가 인천으로 가겠다”라고 나서니 그럴 만도 했다. 서울도 대전도 아닌 인천? 한국프로야구를 설계한 한국야구위원회(KBO) 이용일 초대 사무총장의 얘기를 들어보자.


“당초 인천을 맡을 기업 후보로 분류했던 현대가 거절 의사를 나타냈어요. 이호헌하고 저하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직접 만났는데, 정 회장(당시 올림픽유치위원장)은 얼마 전(9월 30일) 서독 바덴바덴에서 88서울올림픽을 유치한 상황이라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에 전념하겠다. 그때까지는 프로야구를 할 수 없다’고 거부를 한 겁니다. 그런데 서울 연고권을 주장하다 대전으로 가기로 했던 두산이 그 소식을 듣고 차라리 인천으로 가겠다고 하니….”


KBO리그가 첫 항해의 닻을 올리기 직전인 1981년, 대한야구협회에서 전무이사를 지낸 이용일 씨는 서울대 상대 동기동창인 이호헌(작고) MBC 해설위원과 함께 청와대의 요청 속에 급박하게 프로야구를 설계해야만 했다.


두산이 프로야구 원년 연고지를 결정할 때 서울도 대전도 아닌 인천으로 갈 뻔했던 숨은 사연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의 과정들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81년 10월 5일. 프로야구 창립계획이 정부 관계기관의 심의를 거쳐 최종 확정됐다. 이용일 씨와 이호헌 씨는 12월 11일 한국프로야구위원회(KPBC·한국야구위원회 당시 명칭) 창립총회가 이뤄지기까지 만 2개월 동안 6개 기업체를 프로야구에 끌어들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1982년 OB 베어스 창단 기념행사 ⓒ두산 베어스


● 서울 연고지 적임자는 두산, 그러나… 


창립계획에 따라 서울 1팀, 인천을 중심으로 경기와 강원을 묶어 1팀, 대전을 중심으로 충남·북 1팀, 광주를 중심으로 전남·북 1팀, 대구·경북 1팀, 부산·경남 1팀 등 총 6개 팀을 만들어야 했다. 구단을 맡을 기업체의 선정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① 재무구조가 튼튼한 대기업을 총수의 출신도별로 선정한다

② 경쟁상대인 동업종을 가급적 피한다

③ 전체 그룹의 종업원수가 3만 명 이상인 대기업체를 우선으로 한다

④ 프로야구 발전에 관심과 성의가 있어야 한다


사실 이 조건이라면 두산이 서울의 적임자였다. 두산그룹의 모태인 ‘박승직상점’이 1896년 서울의 배오개(종로4가)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은 사실상 문화방송(MBC)이 선점한 터. MBC는 창사 2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이에 앞서 1981년 5월에 독자적으로 프로야구단 창단 계획을 수립해 놓은 상황이었다. 원래 MBC는 조직적인 프로야구리그를 구상한 게 아니라 1년 전에 출범한 축구의 할렐루야처럼 독자적으로 1개의 프로팀만 만들어 단독으로 프로야구의 싹을 틔우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기업들을 끌어들여 프로야구리그로 만들겠다는 복안이었다.


그런데 얼마 뒤 7월에 정부 쪽에서 스포츠의 프로화를 꾀했고, 때마침 정권과 밀착돼 있던 MBC 이진희 사장이 프로야구 창립계획을 정부에 보고하면서 야구의 프로화는 급물살을 타게 됐다. 정부의 요청 속에 이호헌 씨와 이용일 씨가 8월에 18쪽짜리 ‘한국프로야구 창설계획서’를 완성하면서 야구의 프로화 작업은 본격적으로 추진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르면 서울 지역 1안은 역시 MBC였고, 두산은 2안으로 밀려나 있었다. 창업주 고향을 기준으로 부산과 경남 1순위는 롯데, 2순위는 럭키로 분류됐다. 대구·경북의 1안은 삼성, 2안은 포철이었다. 결국 MBC가 방송을 통한 프로야구의 활성화를 위해 서울을 차지하고, 실업야구단을 운영하고 있던 롯데가 부산과 경남(신격호 회장이 울산 출신이다)을 연고지 삼아 프로로 전환하겠다고 동의했다. 삼성도 대구와 경북(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삼성상회를 시작한 곳이 대구다)에서 프로야구단을 운영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불과 10일 만에 3개 구단이 정해졌다.


1982 OB베어스 창단 기념행사. 맨 좌측이 고 박용곤 두산그룹 회장 ⓒ두산 베어스


이렇게 일이 진행된다면 두산은 프로야구 시작을 함께 할 수 없었다. 사실 이때까지 두산에게는 프로야구 창단과 관련해 어떠한 제의조차 오지 않았다. MBC가 서울에 자리 잡는다는 것은 기정사실이기 때문에 계획서상 서울 지역 2순위 후보였던 두산에게까지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 두산 “우리도 창단하겠소”


그러나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프로야구 기업 물색 작업은 진통을 겪기 시작했다. 호남 지역 후보였던 삼양사가 거절의 뜻을 밝혔고, 대전을 연고로 하는 기업을 결정하는 일도 어려웠다. 한국화약그룹(한화)은 창업주인 김종희 회장이 그해 7월에 5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미국 유학 중이던 김승연(당시 29세) 회장이 부랴부랴 귀국해 그룹회장직을 승계해 프로야구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대전에서 창업한 동아건설을 접촉했지만 당시 최원석 회장이 탁구협회장을 맡아 88 서울올림픽에 전력투구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프로야구단 창단에 난색을 표했다.


대전의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던 순간,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두산 쪽에서 프로야구를 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두산그룹 박용곤 회장은 미국 워싱턴대학 유학 시절부터 야구에 심취해 있었고, 혼자 차를 몰고 쿠퍼스타운에 있는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을 찾아갈 정도로 야구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남달랐다. 메이저리그를 통해 프로야구가 기업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익히 알고 있었다.


“박용곤 회장이 제 경동중학교 1년 후배예요. 내가 군산(경성고무 사장 시절)에서 서울 올라오면 자주 만날 정도로 친하게 지냈어요. 그런데 당시 박 회장이 미국에 출장 가 있으면서 우리나라에 프로야구가 만들어진다는 정보를 들었나 봐요. 당시 경동중 다른 후배 중에 동아출판사 사장이 있었는데 박 회장이 ‘이 선배한테 쫓아가서 꼭 우리 두산도 프로야구에 끼워달라고 부탁하라’고 심부름을 시켰던 거예요. 박 회장이 귀국한 뒤 만났죠. 그래서 제가 ‘서울은 MBC, 인천은 현대로 확정됐으니 두산이 대전을 맡아줘야겠다’고 부탁을 했어요. 그런데 펄쩍 뛰더라고. 당연히 두산이 서울 아니냐면서.” 이용일 전 KBO 사무총장의 회고다.


그럴 만도 했다. 앞서 설명한 대로 두산은 서울 한복판인 종로4가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상점인 ‘박승직상점’을 열었다. 게다가 대전이나 충청도와는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었다. 더욱이 당초 프로야구 창설 계획엔 지역색을 강화하기 위해 모든 구단이 연고지 고교 출신 선수만으로 팀을 구성하도록 했다. 충청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선수층이 얇았다. 특급선수도 드물었다. 당시 대전고는 전국대회 우승과 한 번도 인연을 맺지 못한 약체였다. 공주고는 부산고에 다니던 김경문(전 두산~NC 감독)이 1학년 때 전학을 온 뒤 2년 후인 1977년 대통령배 대회에서 창단 첫 우승에 성공했을 뿐이었다. 천안북일고는 1980년 이상군(전 한화 감독대행)과 김상국(SK 김동엽 아버지) 배터리를 앞세워 봉황기 대회에서 창단 3년 만에 첫 우승을 차지했지만 이들이 대학을 간 뒤 어느 세월에 돌아올지 모를 일이었다. 세광고 역시 변방의 팀이었다.  


1982 OB베어스 창단 기념행사에서 김영덕 초대 감독이 방송 인터뷰를 하고 있다. ⓒ두산 베어스


● 프로야구 원년 대전으로 내려간 사연


줄기차게 “서울 연고”를 외치는 두산의 주장, 끊임없이 “대전을 맡아달라”는 이용일 씨의 부탁이 핑퐁처럼 이어졌다. 이때만 하더라도 현대가 창단 포기 의사를 밝히기 전이었다. 그런데 인천 팀 후보였던 현대가 서두에 설명한 대로 88서울올림픽에 ‘올인’ 한다는 명목으로 프로야구 동참을 거부했다. 인천 지역에 적임자를 찾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두산이 “그럼 우리가 대전 대신 인천을 가겠소”라고 요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유가 있었다. 대전은 연고지 6개 지역 중 인구가 가장 적었다. 연고지 고교 팀 중에 전통의 강호도 없었다. 전력도 전력이지만 이러다 보니 야구에 관심도가 떨어지는 지역이라 흥행에도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실제로는 1982년 프로야구 출범과 동시에 대전은 예상보다 훨씬 더 뜨겁게 야구열기가 달아올랐다). 적어도 당시 관점에서는 그랬다. 두산으로선 대전보다는 인구도 많고, 서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인천이 낫겠다는 판단을 한 것이었다. 옛날 얘기라고는 해도 인천야구라면 1950년대 고교야구 무대를 제패한 유구한 역사를 지닌 곳이다. 침체기에 접어들었다고는 해도 인천이라면 야구에 대한 추억과 열정을 간직한 충성스러운 야구팬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용일 씨는 “두산이 대전을 맡지 않으면 대전에 또다시 새로운 기업을 구해야 하는 어려움이 따른다. 대전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라고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면서 두산에 다른 당근책을 제시했다. ▲3년 후 서울로 연고지를 이전해 주고 ▲서울의 선수 자원에서 MBC와 2대 1로 배분하게 해 준다는 중재안을 내놓았다. 이때 서슬 퍼런 정부 쪽에서도 신호가 왔다. 교착상태에 빠진 연고지 문제에 대해 교통정리를 시도한 것이었다.


“우리는 (연고지를) 서울로 신청했죠. 서울 연고팀으로 모든 조건 다 갖췄는데 MBC가 죽기 살기로 ‘방송사가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을 했어요. 그런데 (청와대에서) 대전으로 가라고 지시가 내려오더라고. 이학봉 청와대 민정수석이 박용곤 회장한테 ‘일단 프로야구를 조직해야 할 것 아니냐. 3년 뒤에는 서울로 올라올 수 있도록 내가 책임지고 해 줄 테니까 대전으로 가라’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대전으로 가게 됐던 겁니다.” 창단 초기부터 OB 베어스 프로야구단의 토대를 만든 박용민 초대 단장의 술회다.


그렇다고 구두상의 약속만 믿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두산으로선 확실한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우여곡절 끝에 6개 구단을 맡을 기업과 연고지가 모두 정해진 상황에서 ‘두산 3년 후 서울 이전’이라는 내용의 문서에 다른 5개 구단 구단주들이 모두 사인을 했다. 한마디로 각서를 받은 것이었다.


“다른 구단주들이 서명한 각서를 들고 내가 소공동까지 갔던 기억이 나요. 한 법률사무소에서 공증까지 받아왔던 게 지금도 생생해요.” 원년 OB 베어스 매니저(주무)였던 구경백 일구회 사무총장의 기억이다.


1982 대전 시내 OB베어스 창단 환영 현수막 ⓒ두산 베어스


이렇게 두산이 대전에 자리를 잡게 됐다. 결국 한국프로야구는 산고 끝에 서울=MBC, 인천=삼미, 대전=OB, 광주=해태, 대구=삼성, 부산=롯데로 연고지를 확정하고 닻을 올릴 수 있었다. <2편에서 계속>


※ 덧붙이기 = “역사에서 만약은 없다”지만 당시 상황에서 가정법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베어스의 역사는 물론 프로야구의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상상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① 만약 한화(한국화약그룹) 창업주 김종희 회장이 그해 타계하지 않았다면?

- 김종희 회장의 야구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다. 천안북일고 야구부를 만들고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한화가 먼저 대전을 연고로 프로야구단을 출범했을지 모른다. 1985년 OB 베어스가 서울로 이전했을 때 고 김종희 회장의 유지에 따라 대전에 제7 구단 빙그레 이글스를 창단한 것을 보면…. 한화가 원년 팀으로 대전에 둥지를 틀었다면 두산은 어디로 갔을까? 원년 팀으로 참가할 자리가 있었을까?


② 만약 두산이 실제로 인천에 자리를 잡았다면?

- OB 베어스는 원년 우승 팀이 아니라 첫해 삼미처럼 승률 0.188의 극도의 부진을 겪었을 가능성이 크다. 삼미 선수들이 OB 유니폼을 그대로 입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삼미~청보~태평양~현대~SK로 숱하게 팀 간판을 바꿔온 인천 지역의 지난한 프로야구팀 변천사도 달라졌을지 모른다. 두산이 서울로 이전했을지도 모르지만, 아직도 인천에 눌러앉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③ 두산이 “인천으로 가겠다”라고 주장하지 않았다면?

- 프로야구 원년 우승의 역사도 달라졌을 것이다. OB 베어스가 고분고분 대전으로 갔다면 원년에 충청도 지역 고교 출신으로만 선수를 구성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꼴찌 삼미와 엇비슷한 전력일 수밖에 없었다. 박철순(배명고 출신)도 없었을 테고, 윤동균(동대문상고 출신) 김우열(선린상고 출신) 조범현(충암고 출신) 등 원년 우승의 주역들도 대부분 서울팀 MBC에 입단했을 것이기 때문이다(원년 선수단 구성과 관련해서는 <2편>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어쨌거나 결과까지 계산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배수의 진을 치고 죽기 살기로 주장한 것도 아니지만, “우리가 인천으로 가겠다”는 요구를 통해 큰 수확을 얻었다. 서울 출신 선수를 놓고 MBC와 2대 1 드래프트를 하면서 ‘선수층’을 확보하고 ‘3년 후 서울 입성’이라는 확실한 두 마리 토끼까지 잡을 수 있었다. ‘밑져야 본전’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1980년대를 지탱할 수 있는 밑천을 마련하는 ‘남는 장사’였다.  


<2편에서 계속> OB 베어스의 시조, 25인의 전사들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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