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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국 Feb 14. 2023

[02] 베어스의 시조, 25인의 전사들을 아십니까

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1982년 OB 베어스 선수단 ⓒ두산베어스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 OB 베어스는 신구 조화 속에 돌풍을 일으키며 원년 우승의 신화를 만들었다.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팀이자 최초의 우승팀이라는 영광의 역사를 빚어낸 원년 멤버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어떻게 OB 유니폼을 입었을까.


[베팬알백-베어스 팬이라면 죽기 전에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두 번째 주제는 베어스의 시조 격인 최초의 코칭스태프와 25인의 전사들이다. 올드팬들에겐 향수를 자극하고, 젊은 팬들에겐 전설로 남아 있는 이름들이다.


● MBC와 OB의 역사적 드래프트


<신경식 ⓒ두산베어스>


 <1편>에서 설명했듯이, OB가 대전으로 내려가기로 하면서 반대급부로 서울 출신 선수를 놓고 MBC와 2대1 드래프트(1981년 12월 29일)를 하기로 한 것은 최대 수확이었다. 충청권에서 확보할 수 있는 선수가 예상보다 훨씬 적었기에 더욱 그랬다. 드래프트를 눈앞에 둔 당시의 기사를 보면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두산그룹의 OB 베어스는 팀명과 심벌마크를 가장 먼저 정하는 등 팀 창단 준비작업에 기선을 잡았으나 연고지 선수층이 빈약, 선수층 확보에 가장 고전하고 있다. 대전이 본거지, 충남북이 연고지로 되어 있다. MBC와 서울 출신 선수들을 2대1 드래프트 할 예정이나 어느 정도 선수를 배정받을지 속을 태우고 있다. 단장은 박용민 씨, 감독은 일본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 팀에서 투수로 활약했고 천안북일고를 고교야구 정상급으로 끌어올린 김영덕 씨가 맡았다. 코치에는 김성근 이광환 씨를 맞아들였다.』 <1981년 12월 25일자 매일경제신문>


<김경문 ⓒ두산베어스>


 OB는 연고지 선수들인 신경식(공주고-상업은행) 김경문(공주고-고려대4년)과 1982년 3월 경리단에서 제대할 큰(大) 이근식 등 3명만 먼저 확보했을 뿐이었다. 서울지역 고교출신 선수들의 프로입단 신청서를 받은 결과 총 95명이 지원했다. OB로선 서울지역 드래프트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MBC 측에 드래프트 직전까지 “상위그룹 선수만은 1대1로 배정해 각 구단간의 실력평준화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라고 주장해 봤지만, MBC가 이를 순순히 받아들일 턱이 있겠는가. 그리고 마침내 12월 29일 MBC와 OB가 역사적인 2대1 드래프트를 진행했다. 다음은 당시 드래프트 결과를 보도한 경향신문 기사다.


『서울지역 프로야구 진출 희망선수들에 대한 추첨이 29일 실시돼 MBC 청룡 팀이 정순명(한국화장품) 이광은(성무) 등 28명, 대전지역을 근거지로 둘 두산OB는 박철순(미국프로야구선수) 김우열(제일은행) 등 23명을 확보했다. 두산은 이미 연고지 선수로 뽑은 김경문(고려대) 이근식(경리단) 신경식(상업은행) 등 3명과 함께 26명의 선수단을 구성하게 됐다.』 <1981년 12월 30일자 경향신문>


우선권을 쥔 MBC는 국가대표 출신의 우완 정통파 정순명과 하기룡은 물론 좌완 유종겸, 잠수함 이광권 이길환(작고) 등을 선택해 균형 잡힌 마운드를 구성했다. 또한 안방마님으로 유승안 김용운(작고) 최정기 신언호(입단 후 외야수로 전향한 강견) 등을 선발해 포수 왕국을 만들었다. 군복무 후 4월 30일이면 제대하는 스타플레이어 성무(공군)의 이광은 외에도 이종도(당시 MBC 주장) 김인식 김용달 정영기 김용윤(훗날 김바위로 개명) 등을 찍었다. 여기에 일본프로야구에서 19년간 활약하며 타격왕(1975년 퍼시픽리그)까지 차지한 백인천은 MBC 감독으로 선임된 관계로 드래프트 없이 자연스럽게 감독 겸 선수로 활약하게 됐다. MBC로선 1982년 9월 서울에서 열릴 예정인 세계야구선수권대회로 인해 실업야구 최고 스타 김재박(한국화장품)과 이해창(실업 롯데)의 프로 진출이 유보된 상황이 아쉬웠지만 “나름대로 삼성과 함께 우승에 도전할 만한 전력을 갖췄다”는 평가를 들었다.


<박철순 ⓒ두산베어스>


OB는 당연히 미국에서 야구를 하고 있던 박철순(배명고 출신)을 1순위로 호명했다. 박철순은 1980년 미국프로야구 밀워키 브루어스와 계약한 뒤 1981년 더블A까지 올라갔고, 1982년엔 트리플A 승격이 약속돼 있었다. MBC는 박철순에 대해 정보가 거의 없었지만 OB는 이미 입단에 합의까지 해놓은 상태였다(박철순은 초창기 OB 역사를 논할 때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박철순 영입 비화에 대해서는 3편에서 별도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그러면서 박철순을 포함한 23명의 서울 출신 선수를 추가로 확보했다. MBC가 먼저 2명을 선택한 뒤 1명을 뽑아야 하는 불리함은 있었지만, 그래도 쏠쏠한 전력보강을 했다.


우완 박철순(배명고 출신) 계형철(중앙고 출신) 김현홍(선린상고 출신)에다 좌완 황태환(철도고)과 선우대영(서울고 출신), 잠수함 박상열(동대문상고 출신)과 강철원(동대문상고 출신)으로 마운드의 구색을 갖췄다. 지역연고 공주고 출신의 김경문을 미리 확보한 포수 자리에는 드래프트에서 인하대 조범현(충암고 출신)에 이어 정종현(선린상고 출신)을 추가로 선택했다. 내야수는 큰(大) 이근식과 유망주 신경식을 충청권 선수로 확보한 상태에서 김광수(선린상고 출신) 유지훤(대광고 출신) 양세종(장충고 출신) 구천서(신일고 출신) 등으로 그물을 짰다. 외야수는 윤동균(동대문상고 출신) 김우열(선린상고 출신) 이홍범(장충고 출신) 김유동(동대문상고 출신) 등 백전노장으로 구성했다. 작은(小) 이근식(충암고 출신)과 정혁진(선린상고 출신), 구천서의 쌍둥이 동생인 구재서(신일고 출신)도 포함됐다.


삼성은 이미 12월 25일 국가대표 출신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며 가장 먼저 25명의 선수단 구성을 마쳤다. OB로선 부족하지만 어쨌든 선수단 구성조차 힘들었던 해태나 삼미와 비교하면 서울지역 선수 드래프트로 인해 나름대로 넉넉한 살림을 구축할 수 있었다. 해태는 프로에 일찍 들어오기 위해 대학을 중퇴한 이상윤(한양대)과 방수원(영남대)까지 긁어모아 겨우 14명만 참석한 가운데 창단식을 열었을 정도였고, 삼미는 연고지(인천·경기·강원) 국가대표 출신 선수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심지어 공개 테스트를 통해 일반인(삼미철강에서 직장야구선수로 뛰다 테스트에 합격한 투수 감사용이 대표적이다)까지 모집해야 했다.



● 순간의 선택에 좌우된 운명


<윤동균 ⓒ두산베어스>



“드래프트에서 MBC와 OB 중 어느 팀에 선택될지 궁금해하는 서울 선수들이 많았죠. 드래프트는 비공개로 진행됐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어디 개인 휴대전화가 있습니까. 선수가 어느 팀에 선택됐는지는 다음날 신문이나 보고 알 수 있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날 저녁에 바로 알게 됐어요. 신촌 쪽에서 지인과 약속을 잡고 저녁에 선술집에서 술을 한 잔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그 술집에서 당시 OB 김성근 코치와 이광환 코치를 만났던 거죠. 우연히, 정말 우연히.” 윤동균 현 일구회장의 회상이다.


윤동균은 김우열과 함께 원년 OB 맏형이기도 했지만 프로야구 전체에서도 최고령 선수였다. 호적상 윤동균은 1949년 7월 2일생, 김우열은 1949년 9월 9일생이었다. 그래서 1982년 3월 27일 공식 개막식에서 윤동균이 선수단을 대표해 선서를 했다(학창 시절엔 김우열이 1년 먼저 학교에 다닌 선배였다). 그런데 그날 드래프트를 끝내고 김 코치와 이 코치가 윤동균이 한 잔 하고 있던 그 술집에 나타났던 것이었다. 코치와 선수의 관계라고는 해도 이광환 코치는 1948년생으로 윤동균과 한 살 차이에 불과했다. 실제 윤동균은 포항제철에서 플레잉코치를 맡고 있었고, 김우열 역시 차기 제일은행 감독 후보로 꼽히며 은퇴를 준비하던 상황이었다.


“그 자리에서 뒷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김영덕 감독과 두 코치가 드래프트 전부터 모여서 머리를 싸잡아 매고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해요. 그런데 MBC가 드래프트 현장에서 저하고 김우열은 나이가 많아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OB도 고민을 많이 했지만 드래프트 막판에 선택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김우열 ⓒ두산베어스>



여기서 다시 가정법 하나. 당시 서울지역 드래프트에서 구단의 판단이 조금만 달랐더라면 MBC 선수가 OB 선수가 되고, OB 선수가 MBC 선수가 됐을지 모를 일이다.


“그랬죠. 당시 OB가 대전을 연고로 했으니까 서울에 사는 선수도 OB에 선택되면 대전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 상황이었잖아요. 그래서 서울 선수들 사이에서는 솔직히 내심 MBC에 선택되기를 바라는 선수도 있긴 했어요. 저는 고향이 삼척이지만 아버지가 군인이라 초등학교 때 대전에 내려가 중학교 때까지 살았어요. 고등학교는 동대문상고를 나왔지만 대전과 인연이 깊어 OB에 선택된 게 잘됐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저나 김우열을 MBC가 찍었다면 우리의 야구인생이, 프로야구 역사가 또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모르죠. 둘이 원년에 그렇게 잘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윤동균은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OB는 정작 대전을 연고로 하면서 대전고 출신 선수가 한 명도 없자 이들 외에 대전연고 선수로 내야수 박종호(대전고 출신)와 포수 김진홍(대전고-인하대)을 추가로 영입했다. 그리고는 1982년 1월 15일 오후 5시 합동회관 10층 강당에서 창단식을 열고 코칭스태프 3명과 선수 25명으로 공식 출범했다. 프로야구 6개 구단 중 최초의 창단식. OB 베어스가 한국야구사에서 최초의 프로야구단으로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한국프로야구 6개 구단 중 두산OB 베어스가 15일 창단식을 갖고 첫 출범의 닻을 올렸다. OB 베어스는 이날 서종철 한국프로야구 조직 커미셔너와 두산그룹 임직원, 타구단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창단식에서 박용곤 회장이 박용민 단장에게 단기를 수여, 페어플레이로 국민의 여가선용에 이바지하는 모범 팀이 될 것을 다짐했다.』 <1982년 1월 16일자 동아일보>



● 1982년 OB 베어스 창단 멤버를 소개합니다


원년부터 올 시즌까지 베어스 유니폼을 입고 한 번이라도 1군 경기에 나선 선수는 총 214명. 원년 멤버 25명(모두 1군 기록이 있다)은 숫자상으로는 전체 11.7%에 불과하지만, 무게와 상징성을 놓고 보면 이들이 베어스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 이상이다. 베어스 팬이라면, 다른 건 몰라도 곰군단의 원조격인 최초 25인의 전사들의 이름쯤은 알아두는 게 상식이지 않을까. 이들의 특징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이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베팬알백’의 남아 있는 98개의 이야기에서 녹여낼 예정이다. 


▲ 구단주=박용곤  ▲ 단장=박용민  ▲ 사무국장=이민우 

▲ 매니저=구경백  ▲ 경리=박인자


<김영덕 감독 ⓒ두산베어스>



■ 코칭스태프(총 3명)


▲ 감독(1명) 

김영덕(등번호 40)=재일교포. 일본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에서 활약한 잠수함 투수 출신. 한국야구에 슬라이더 전수. 실업야구 시절 1차례 퍼펙트게임과 3차례 노히트노런 작성. 사령탑으로 1980년 봉황기 천안북일고 우승 지휘. 1981년 제1회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선동열과 김건우 앞세워 우승 지휘. 1982년 OB 원년 사령탑 맡아 한국프로야구 최초 우승 감독이 됐지만, 이후 6차례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


<김성근 코치(우)와 장훈 인스트럭터(좌) ⓒ두산베어스>



▲ 코치(2명)


김성근(등번호 38)=재일교포. 원년 투수코치. 김영덕 감독에 이어 1984년부터 1988년까지 OB 제2대 사령탑 역임. OB 감독으로는 한국시리즈에 오르지 못했지만 SK 감독 시절인 2007~2008년 한국시리즈에서 두산을 상대로 우승.


이광환(등번호 1)=김영덕 한일은행 감독 시절 선수로 인연. 원년 타격코치(코치가 부족해 수비, 주루, 작전 코치로 1인다역). 김성근 감독 물러난 뒤 1989년 OB 사령탑 부임. 시대를 너무 앞서나간 ‘자율야구’를 시도하다 실패하면서 1시즌 반 만에 중도하차. 이후 1990년대 중반 LG 사령탑에 올라 ‘자율야구’ 꽃 피우며 우승.


<1982년 원년 OB베어스 팬북 선수소개 페이지 ⓒ두산베어스>



■ 선수단(총 25명)


▲ 투수(7명)


박철순(등번호 21)=원년 실력과 외모를 겸비한 최고 스타. 미국프로야구에서 터득한 너클볼, 팜볼 등(당시 한국프로야구에서는 보지 못한 마구)을 앞세워 원년 22연승을 거두며 OB 우승 견인. 이후 끊임없는 부상과 재활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으면서 ‘불사조’라는 별명 얻음.


계형철(등번호 11)=공은 빨랐지만 제구 난조로 유망주에 머물다 1984년 두 자릿수 승리(14승4패) 거두며 도약했고, 30대에 접어들면서 원숙미를 뽐냄.


선우대영(등번호 29)=기대가 컸던 좌완 에이스 후보지만 부상으로 꽃을 피우지 못한 비운의 투수. 원년 6완투와 1완봉승을 포함해 7승을 올렸고 한국시리즈 3차전 선발승으로 우승에 공헌. 이듬해 부상으로 4승에 그친 뒤 프로 2년 만에 은퇴를 하면서 미국 애틀랜타로 이민.


황태환(등번호 15)=골든글러브 원년 투수 부문 수상자. 골든글러브는 요즘과 달리 1983년까지는 수비율로만 시상. 만 30세이던 1982년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6승5패3세이브 수확한 좌완. 1983년엔 6구원승14세이브를 올리며 20세이브포인트로 구원왕(2003년까지는 구원승+세이브로 구원왕 집계).


박상열(등번호 9)=원년 3완투 포함 10승(5패)을 거두며 박철순에 이어 팀 내 다승 2위에 올랐던 잠수함 투수. 1983년 10승, 1984년 12승을 수확하면서 3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며 OB 마운드를 지탱.


강철원(등번호 23)=호리호리하면서 예쁘장한 얼굴이어서 별명이 ‘미스강’이었다. 잠수함 비밀병기로 1982년 전반기엔 부상으로 쉰 뒤 후반기에만 5연승 무패가도. 한국시리즈 1차전 선발투수로 등판해 깜짝투.


김현홍(등번호 18)=원년엔 승리 없이 29.2이닝만 던졌고, 이듬해 1983년 완봉승 1차례 포함 2승1패1세이브를 기록한 뒤 은퇴. 선수로는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했지만 훗날 스카우트로 두산 화수분 야구의 토대를 만들었다. 정년퇴직 후에는 LG 스카우트팀장을 지냈다.


▲ 포수(4명)


김경문(등번호 22)=원년 우승 마지막 순간 포수. 훗날 두산~NC 감독. 국가대표 사령탑으로 2008베이징올림픽 금메달 지휘.


조범현(등번호 25)=원년 최초 게임 선발포수. 훗날 SK-KIA-kt 감독. 국가대표 사령탑으로 2010광저우아시안게임 금메달 지휘.


정종현(등번호 12)=조범현과 김경문에 이은 제3의 포수. 아마추어 시절엔 공격형 포수였지만 프로에서는 1987년까지 통산타율 0.221에 그침.


김진홍(등번호 2)=대전고-인하대 출신으로 대전 연고지명 포수로 OB에 입단. 1989년까지 통산 61경기 출장한 뒤 은퇴.


▲ 내야수(7명)


신경식(등번호 19)=원년 188㎝의 키로 롯데 김용희(190㎝)에 이어 프로야구 전체 두 번째 최장신 선수. 왼손잡이로 1루수로서 송구를 받을 때 오른다리를 쭉 찢어 받는 모습이 트레이드마크가 되면서 ‘학다리’ 또는 ‘타조’라는 별명을 얻었다. 당초 백업 1루수라는 평가였지만 원년 타율 0.334로 타격 4위에 오르는 기염.


이근식(등번호 28)=1958년생 좌투좌타 1루수로 큰(大) 이근식으로 불렸다. OB 원년 멤버 중 외야수에 작은(小) 이근식이라는 동명이인의 선수가 있었기 때문. 키 차이로 큰 이근식과 작은 이근식으로 구분했다. 김경문과 동기로 공주고를 전국대회 우승으로 이끈 큰 이근식은 당초 OB 원년 주전 1루수로 기대를 모았지만 신경식에 밀림.


구천서(등번호 20)=동생 구재서와 프로야구 최초의 쌍둥이 형제 선수로 화제. 신일고를 졸업한 뒤 동생과 상업은행에 들어갔다가 1년 만에 프로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OB 팀 내 막내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김광수의 부상 속에 주전 2루수 투입된 뒤 공수주에서 다부진 능력 발휘. 3루수로도 쏠쏠한 활약 펼친 원조 멀티플레이어.


김광수(등번호 4)=키는 작았지만 견실한 2루 수비와 빠른 발놀림으로 ‘날다람쥐’라는 별명이 붙음. 훗날 64경기 무실책으로 한동안 역대 2루수 연속경기 무실책 기록 보유.


양세종(등번호 16)=OB의 주전 3루수로 원년 초대 승리타점왕에 오른 실력파. 훤칠한 외모로 구단 차원에서 차세대 스타로 키우려고 했던 인물. 1984년엔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기도 했지만 현역 군복무 후 내리막길을 탄 비운의 스타.


유지훤(등번호 6)=김우열과 더불어 구레나룻이 트레이드마크였던 초창기 OB 주전 유격수. 실책이 다소 많았지만 1980년대 OB 유격수 자리를 굳건히 지킴.


박종호(등번호 24)=원년 연고지를 대전으로 정했지만 원년 멤버 중 막상 대전고 출신 선수가 한 명도 없어 구단 차원에서 상징적 인물로 영입한 선수. 1982년 4경기에 출장해 4타수 2안타를 기록한 것이 1군 성적의 전부.


▲ 외야수(7명)


윤동균(등번호 10)=원년 최고령 선수로 개막전 선수대표 선서. 0.342의 고타율로 MBC 감독 겸 선수 백인천(0.412)만 없었다면 원년 타격왕. ‘불곰’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베어스라는 팀 마스코트와 가장 잘 어울린 캐릭터. 훗날 KBO 최초 은퇴식 주인공 및 OB 베어스 감독으로 프로야구 선수 출신 최초 감독이 됨.


김우열(등번호 3)=실업리그 홈런왕 출신으로 OB 초대 주장. 원년 가장 먼저 10호 홈런에 도달하는 등 전반기 홈런 1위를 달렸지만 후반기 부상으로 13홈런에 만족. 별명은 ‘아가리’. 치기 좋은 공을 흘려보내면 어김없이 입을 쫙 벌리는 버릇 때문에 생긴 별명이었다.


김유동(등번호 8)=실업야구 한국화장품에서 은퇴했다가 프로야구 탄생으로 다시 유니폼을 입은 케이스. 원년 한국시리즈 최종 6차전 9회초 삼성 이선희를 상대로 만루홈런을 날리면서 초대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


이홍범(등번호 14)_실업야구 시절 유격수에서 외야수로 전향한 뒤 OB 초창기 백업 외야수로 활약. 은퇴 후 미국에서 트레이닝 연수를 받고 트레이닝 코치로 변신했다.


구재서(등번호 27)=구천서의 쌍둥이 동생으로 더 유명했다. 빠른 발을 갖추고 있어 주로 대주자로 활약. 현재 NC 다이노스 코치로 여전히 지도자 생활을 하는 형과는 달리 동생은 1989년을 끝으로 은퇴한 뒤 동대문 시장에서 의류 관련 사업에 매진.


小이근식(등번호 7)=큰 이근식은 1958년생으로 공주고 출신으로 아마추어 롯데에서 뛰다 OB 원년 멤버로 들어온 좌투좌타 내야수. 반면 작은 이근식은 1959년생으로 충암고와 한양대를 졸업한 뒤 OB 유니폼을 입은 좌투좌타 외야수. 큰 이근식이 학창 시절 1년을 유급해 김경문, 조범현, 큰 이근식, 작은 이근식, 정종현 5명은 OB 원년 멤버 동기로 지냈다. 1986년까지 통산 타율 0.233, 1홈런, 41타점.


정혁진(등번호 17)=선린상고 시절이던 1976년 황금사자기 대회 사상 최초 만루홈런을 때리며 주목받았지만, 고려대 졸업 후 프로에 들어와서는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지는 못함. 1군에서는 1983년까지 2년간 통산 타율 0.240, 3홈런, 25타점에 그쳤다.


<1982년 OB 베어스 한국시리즈 우승 후 단체사진 ⓒ두산베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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