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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국 Feb 15. 2023

[03] '불멸의 에이스' 박철순 영입 비화비사

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마이너리그에서 봤는데 한국에서 온 투수가 한 명 있어요. 꽤 잘 던졌어요.”


“그 선수가 누굽니까.”


“밀워키 브루어스 마이너리그에 있는 투수입니다.”


“이름은…?”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괜찮은 투수였습니다. 한국에 프로야구가 생긴다니 데려가세요. 그 정도 수준의 투수면 한국에서 충분히 잘 던질 겁니다. 밀워키에 가서 버드 셀리그 구단주를 한번 만나 보세요.”


 1981년 가을, 메이저리그 LA 다저스 구단주 피터 오말리는 한국에서 온 키 작은 신사에게 뜻밖의 얘기를 전했다. 키 작은 신사는 바로 메이저리그의 선진 구단 운영 기법을 배우고 조언을 듣기 위해 찾아온 OB 베어스 초대 단장 박용민이었다. 다저스 구단 사무실에서 무심코 나눈 이 대화가 메이저리그 진출을 꿈꾸던 한 젊은 한국인 투수와 OB 베어스, 그리고 프로야구의 운명을 바꾸는 방아쇠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박철순의 투구 모습 ⓒ두산베어스>


[베팬알백-베어스 팬이라면 죽기 전에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세 번째 주제는 프로야구 원년 22연승 신화 속에 OB 베어스의 우승을 이끈 에이스 박철순을 영입하기까지의 뒷얘기다. 박철순은 초창기 베어스의 역사 그 자체다. ‘OB’ 하면 ‘박철순’이었고, ‘박철순’ 하면 ‘OB’였다. 그래서 [베팬알백] <3편>은 온전히 박철순 영입 과정 하나만을 놓고 그린다. 박철순 영입 작전은 계획된 것이 아니라 우연히, 너무나도 우연히 시작됐다.



● 피터 오말리에게 전해 들은 한국인 마이너리거 투수


 박용민 초대 단장은 키는 작았지만 강력한 추진력을 갖춘 인물로 ‘작은 거인’이라 불렸다. 두산그룹 박용곤 회장(OB 베어스 구단주)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OB가 프로야구 태동기에 진취적인 구단으로 자리 잡는 데 초석을 놓은 인물이다. 1982년 프로야구 탄생에 맞춰 최초로 어린이 회원을 모집하고, OB 베어스의 상징인 ‘삼색 모자’를 만들었다. 최초로 2군 시스템과 2군 전용구장을 마련한 것도 그의 작품이었다. 합동통신(1960년 두산그룹이 인수한 뉴스통신사) 기자와 주일특파원을 지낸 그는 베어스 단장으로 부임하기 전 연합통신(1980년 합동통신과 동양통신 통폐합. 현 연합뉴스 전신)에서 사회부장과 부국장을 지내냈다.




<OB 베어스 박용민 초대 단장. 뒤로 김성근 코치(왼쪽)와 구경백 매니저(현 일구회 사무총장)가 보인다. ⓒ두산베어스>


 “일본 특파원 시절엔 야구에 관심이 없었어요. 오히려 우리 집사람이 일본에서 살면서 무료했는지 일본프로야구에 더 심취해 있었지. 그런데 1981년 가을 즈음에 프로야구단을 만들기로 결심한 박용곤 회장님이 어느 날 저를 부릅디다. 형제분들도 다 있는 자리에서 ‘야, 네가 단장해’라고 하시더라고. 일본 특파원을 지냈지만 야구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는데, 할 수 없이 초대 단장을 맡게 됐어요. 박용곤 회장님은 미국 유학 시절 워낙 야구를 좋아하셨고 그러다 보니 야구를 많이 아시는 분이셨죠. 저한테도 ‘시간만 되면 무조건 일본이나 미국 구단에 가서 많이 배워라’고 하시면서 전폭적으로 밀어주셨어요. 그래서 프로야구가 시작되기에 앞서 1981년 가을부터 일주일이 멀다 하고 미국과 일본을 수시로 드나들었죠.”


 박용민 단장이 프로야구가 출범하기도 전인 1981년 가을에 메이저리그 명문팀 LA 다저스 피터 오말리 구단주를 만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정부 정책에 등 떠밀려 프로야구단을 만든 게 아니라 구단주의 의지 속에 프로야구에 합류하게 된 OB 구단은 일찌감치 앞서나갔다.


 “다저스 오말리 구단주가 마이너리그 경기를 돌아다니다 박철순이를 봤대요. 한국에 프로야구가 생긴다고 하니까 ‘그 친구 쓸 만하니까 데리고 가라’고 하더라고요. 오말리도 당시 박철순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어요. 난 야구를 안 해봐서 당시엔 야구도 잘 몰랐어요. 기자생활만 했지, 박철순이 누군지도 몰랐어요. 오말리가 ‘좋다’고 하니까 그냥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지. 그 길로 그냥 무작정 LA에서 밀워키행 비행기 표를 끊어서 날아갔죠.” 박용민 단장의 회상이다.


 여기서 잠깐. 낯익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우선 LA 다저스 피터 오말리 구단주. 1994년 박찬호를 영입해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를 만든 주인공이다. 1937년생으로 박용민(1935년생) 단장보다 두 살 아래다. 그리고 밀워키 구단주 버드 셀리그(1934년생). 훗날 메이저리그 커미셔너(1992~2015년)를 지낸 인물이다.



● “마이너리그에 있는 한국인 투수를 우리가 데려가겠소”

<1982년 입단 당시 박철순 ⓒ두산베어스>


 “밀워키 마이너리그 소속 투수 중에 한국 선수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써니(Sunny) 말씀인가요? 우리 구단에 있습니다만.”

 “저희가 데려가고 싶습니다.”


 밀워키 버드 셀리그 구단주는 당혹스러워했다. 한국에서 온 키 작은 신사가 다짜고짜 “밀워키에 이러이러한 선수가 있다고 해서 여기까지 왔다”면서 “우리가 데려가고 싶다”고 하니 그럴 만도 했다.


 박철순의 영문명은 ‘Cheol-Sun Park’. 미국인들은 ‘Sun’을 “순”으로 발음해야 하는지, ‘태양’을 뜻하는 “선(Sun)”으로 발음해야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냥 다들 ‘Sun’이라고 적혀 있으니 익숙한 대로 “썬” 혹은 “써니 팍(Sunny Park)”이라고 불렀다.


 “당시 밀워키까지 날아갔지만 박철순 본인은 만나 보지도 못했어요. 밀워키 구단주 버드 셀리그만 만났죠. 그 자리에서 ‘내가 데리고 가야겠다’고 했더니 펄쩍펄쩍 뛰더라고. 그러면서 ‘프로는 선수를 그냥 데려갈 수 없다, 돈 주고 사서 데려가는 거다’라고 하더라고요. 자기들도 써니를 계약금 주고 영입했고 훈련시키고 키우는 데 돈이 들었으니 우리한테 그 정도 값은 지불하고 데려가야 한다는 말이었죠.”


 박철순은 연세대 복학생 시절이던 1980년 1월 28일 대한체육회 10층 회의실에서 입단식까지 치르며 밀워키 유니폼을 입었다. 당시 발표한 계약 조건은 계약금 1만 달러에 월봉 700달러. 여기에 3개월 테스트 기간이 끝나면 보수를 재조정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그 이전에 이원국이 중앙고 3학년 시절이던 1966년 일본프로야구 도쿄 오리온스와 계약한 뒤 1968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컵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몬트리올 엑스포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산하 마이너리그에서 활약한 적은 있지만, 한국에서 곧바로 미국 무대로 직행한 것은 한국야구사상 박철순이 최초였다.



 밀워키는 처음엔 박철순 이적에 대해 거부 의사를 나타냈다. 이듬해 트리플A 승격이 예정돼 있었고, 메이저리그 무대를 향해 착실히 성장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볼넷이 적고, 삼진도 잡아낼 수 있는 능력이 눈길을 모았다. 그러나 박용민 단장의 거듭되는 간곡한 부탁에 셀리그 구단주도 야박하게 “No”만을 외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밀워키는 대신 이적료로 처음엔 15만 달러를 입에 올렸다. 계약금과 2년치 연봉, 특수학교에 보낼 때 든 비용 등을 합치면 박철순을 영입해 지금까지 그 정도 투자를 했다는 얘기였다. 그러다 “써니가 2년간 우리 구단을 위해 열심히 뛰었으니 10만 달러를 공제하고 5만 달러만 받겠다”고 선심(?)을 썼다. 당시 환율로 5만 달러라면 웬만한 서울 아파트 2채 값. 한국의 경제 규모로 볼 때 상상하기 힘든 거액이었다.


 박 단장으로선 일단 밀워키가 박철순을 양보할 수도 있다는 의사를 파악한 것만으로도 수확이었다. 이적료 협상은 뒤로 미루고 곧바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두산그룹과 김영덕 감독의 뜻을 살피고, 마이너리그 시즌 종료 후 한국에 먼저 들어가 있는 박철순을 직접 만나 본인의 의사를 확인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 박철순 “저녁이나 한 끼 먹는 자리인 줄 알고 나갔는데…”


<박철순과 박용민 초대 단장 ⓒ두산베어스>


 “1981년 11월쯤으로 기억해요. 시즌이 끝나고 휴가를 얻어 한국에 들어와 있었죠. 12월에 미국으로 가서 다음 시즌에 대비해 훈련을 시작하려고 했는데 어디서 전화가 와서 ‘한번 만나자’고 하더라고요. 두산그룹이라고 하더군요. 그땐 한국에 프로야구가 생기는 줄도 잘 모르고 있었어요. ‘두산그룹에서, 그것도 회장님이 왜 나를 부르지?’라고 생각했죠. 그러다 당시 두산그룹이 OB맥주를 가지고 있었고, 밀워키도 맥주회사니까 혼자 속으로 ‘같은 맥주 회사라서 회장님끼리 얘기를 하다 나를 한번 만나보라고 한 건가? 저녁이나 한 끼 사주라고 했나?’라고 생각하고 약속 장소로 갔습니다.”


박철순은 40년 가까이 돼 가는 기억의 수첩에서 추억의 조각들을 하나씩 뒤져나갔다.


 “두산그룹에 도착했는데 직원이 회장실로 안내를 하더군요. 거기에 왕회장님(박용곤 두산그룹 회장)과 형제분들이 함께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왕회장님이 그 자리에서 저에게 ‘한국에서 뛸 생각이 없느냐’고 묻더라고요. OB 베어스가 (MBC와 2대1 드래프트에서) 저를 찍으면 미국 생활을 접고 한국에 올 수 있겠느냐는 의사 타진이었죠. 그때 처음 알았어요. 한국에 프로야구가 생긴다는 걸. 당시 두산 쪽에서는 이적 관계에 대해서는 말씀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한국에서 야구를 할 수 있으면 좋은데 밀워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던 것 같아요.”


 박철순은 “그때 박용민이라는 이름도 처음 알게 됐다”고 했다. 박철순은 이듬해 트리플A 승격이 약속돼 있었다. 언제라도 메이저리그에 오를 수 있는 마지막 관문만 남겨둔 상태. 미련을 버리기 힘들었다. 그러나 “함께 하자”는 박 단장의 설득에 마음이 움직이고 말았다. ‘한국에도 프로야구가 생긴다면….’


 OB 베어스 초대 사령탑으로 일찌감치 내정된 김영덕 감독도 박철순의 영입에 두 손을 들고 환영하고 나섰다. 가뜩이나 대전과 충청권에 선수가 부족한 마당이라 더욱 그랬다. 김 감독은 당시 상황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박철순이 미국에 간 선수라는 것은 알았지만 사실 어떤 선수인지는 몰랐어요. 솔직히 어느 고등학교 나왔는지, 어느 대학교를 나왔는지도 몰랐고요. 신문 지상에서 박철순이 1980년 초에 밀워키하고 계약했다는 소식을 접했고, 트리플A로 간다는 얘기까지는 듣긴 들었지만….”


 김 감독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박철순이 던지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어요. 요즘처럼 중계가 되는 시절도 아니니까. 그래도 저는 구단에서 물어보길래 ‘무조건 영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야구는 단기 레이스든, 장기 레이스든 좋은 피처가 있어야 하는 건 기본이라고 했죠. 제가 일본프로야구에서 뛰었기 때문에 미국야구 수준이 어느 정도라는 건 알았어요. 트리플A 간다는 얘기도 있었으니까 그 정도면 100% 믿어도 된다는 확신이 있었죠.”


<1982년 박철순의 투구 모습 ⓒ두산베어스>


● 이적료 3만 달러? 돈 한 푼 안 주고 박철순을 품은 사연


 “배명고 출신의 박철순이 만약 MBC에 선택됐다면 한국야구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박용민 전 단장은 기자의 이런 가정에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박철순이 MBC가 아닌 OB에 입단할 수 있었던 당시 뒷얘기를 풀어냈다.


 “1981년 12월(29일)에 MBC와 2대1 드래프트를 할 때 우리는 박철순을 1순위로 찍었어요. MBC도 사실 우리가 박철순과 이미 얘기가 다 돼 있다는 걸 알았죠. 제가 MBC 쪽에 얘기를 하고 양해를 구했거든요. 당시 드래프트 분위기는 사실 치열했다기보다는 화기애애했어요. 다들 프로야구가 처음이니까 발전을 위하자는 생각이 더 컸죠. MBC가 먼저 2명을 찍고 우리가 1명을 뽑는 식으로 2대1 드래프트가 진행됐는데, MBC는 박철순이 어떤 투수인지 잘 모른 탓도 있지만 벌써 우리와 입단에 합의한 것을 알고는 사실상 우리에게 박철순을 양보한 거였죠.”


 이제 남은 것은 밀워키와 이적료 협상. 박 단장은 수시로 미국으로 날아가 이적료를 놓고 밀워키 구단과 씨름을 해야만 했다. 1982년 1월 15일 합동회관에서 열린 OB 베어스 창단식에 박철순도 참가했지만 이적료 협상이 타결되지 않는다면 OB로서는 귀중한 1순위 지명을 날려버리는 상황이었다. 드래프트도 끝났고, 1월이 지나 2월에 마산에서 스프링캠프가 진행됐지만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았다.


 “마산에서 열린 스프링캠프에 합류해서 훈련을 하다가 중간에 이적료 협상이 잘 안 된다고 해서 한 번 가방을 쌌던 기억이 나요. 실제로 OB 구단에도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고 인사까지 했고요. 다시 미국에 들어갈 준비를 했던 거죠. 그런데 갑자기 ‘박 단장님이 미국에 가셔서 얘기가 잘 됐다’면서 저에게 ‘이제 미국 안 가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가방을 풀었죠.” 박철순은 “OB 유니폼을 입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며 웃었다.



<박철순의 너클볼 그립 시범 ⓒ두산베어스>


 프로야구 개막이 코앞이었다. 당시 박용민 단장은 마지막 담판을 짓기 위해 미국으로 날아갔다. 거기서 읍소작전을 펼쳤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막 프로야구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미국은 야구의 종주국 아닙니까. 써니가 고국 무대에서 뛰고 싶어 하니 한국의 야구 발전을 위해 좀 양보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철갑 같은 비즈니스 마인드로 무장돼 있던 셀리그의 차가운 마음이 열렸다. 마침내 이적료 협상이 마무리됐다. 프로야구 원년 개막을 불과 한 달 여 앞둔 1982년 2월 19일이었다. 다음은 당시 상황을 타전한 기사.


『미국프로야구와 계약이 끝나지 않았던 박철순이 한국에서 뛰게 됐다. 박철순의 소속 구단인 밀워키 브루어스의 셀리그 구단주는 19일 한국프로야구의 발전을 위해 박철순과의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통보해 왔다. 밀워키 브루어스는 박철순에 대해 15만 달러의 경비가 들었다고 주장했으나 지난번 OB 베어스의 박용민 단장이 도미, 셀리그 구단주와 협상 끝에 박철순을 트레이드가 아닌 조건으로 계약을 해제했다. 브루어스 구단에서는 당초 배상금으로 5만 달러를 요청했으나 OB 베어스에서 상당한 금액을 계약해제에 따른 사례금으로 지급하는 데 합의했다. 이에 따라 OB 베어스는 박철순과 국내 프로야구의 최상급 대우로 계약을 맺게 됐다. 브루어스 팀에 대한 사례금을 OB 베어스에서 지급하는 외에 박철순은 계약금 2000만 원에 연봉 2400만 원을 받는다.』  <1982년 2월 20일자 동아일보>


<1982년 원년 MVP를 수상한 박철순 ⓒ두산베어스>


 박철순이 무사히 OB 유니폼을 입은 데에는 미국을 수시로 드나들며 협상을 벌인 박용민 단장의 집요함과 수완 덕분이겠지만, 사실 박철순 영입의 단초를 제공한 피터 오말리가 거중조정 역할을 해준 덕도 컸다. 결자해지의 심정이었을까. 이적료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오말리가 셀리그를 설득해 대승적 차원의 양보를 이끌어냈다.


 당시 언론을 통해 발표된 박철순의 이적료(사례금)는 3만 달러였다. <한국야구사> 1166페이지에도 『1982년은 박철순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80년 3월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 마이너리그로 진출했던 박철순은 MBC와 서울자원 드래프트를 통해 OB가 연고권을 획득, 밀워키의 셀리그 구단주에게 3만 달러의 이적료를 지불하고 데려온 신병기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진실은 따로 있었다. 당시 40대의 키 작은 신사는 올해 83세의 노신사로 변해 있었다. 박 단장의 뒤늦은 고백이다.


 “3만 달러는 무슨. 밀워키에 이적료를 한 푼도 안 주고 박철순을 데려왔어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셀리그가 나중엔 한 푼도 안 받겠다고 하더라고. 대신 프로야구는 비즈니스인데 이적료 없이 박철순을 넘겨줬다고 하면 메이저리그 다른 구단들이 시장 질서가 교란된다고 난리를 칠 거래요. 그래서 언론 발표용으로 3만 달러를 책정한 거였죠. 그때부터 제가 셀리그를 좋아했어요. 피터 오말리도 고마운 사람이죠. 1982년 개막식 때도 한국에 오고, 한국시리즈 때도 한국에 왔어요. 연말에도 우리 박용곤 회장이 초청을 해서 한국에 왔고…. 오말리가 한국하고 인연이 많아요. 초창기 도움도 많이 줬죠.”


<1982년 한국시리즈 우승 확정 후 환호하는 박철순 ⓒ두산베어스>


※ 덧붙이기_37년 전, 피터 오말리의 우연한 귀띔은 한 젊은이의 인생과 OB 베어스, 그리고 한국프로야구 역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바꿔놓았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프로야구가 시작되기 전부터 일찌감치 선진 프로야구단 운영 기법을 배우기 위해 부지런히 두산그룹이 먼저 움직인 결과였다.


 만약 박 단장이 1981년 가을에 오말리를 만나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MBC와 드래프트가 끝난 다음 1982년 1월이나 2월쯤에 미국으로 넘어갔더라면 박철순의 운명은 또 어떻게 됐을까. 그러고 보니 피터 오말리는 1994년 박찬호를 미국으로 데려간 인물이지만, 그에 앞서 박철순을 한국에 보내준 숨은 조력자이기도 했다. 역사는 우연히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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