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프로야구 OB 베어스가 6개 구단 중 처음으로 1월 11일 서울운동장 야구장에 첫선을 보였다. 왼쪽 가슴에 어린 곰이 배트를 들고 있는 OB 베어스 야구단의 심벌마크가 들어있는 감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트레이닝에 나선 선수와 코칭스태프들은 가볍게 배트를 휘두르고 볼을 던지면서 필승의지를 다졌다.』 <1982년 1월 11일자 매일경제>
시간의 물결에 쓸려가지 않는, 세월의 흐름에 잊히지 않는 역사와 기억들…. 37년 전의 기사가 아련한 추억을 소환한다. [베팬알백-베어스 팬이라면 죽기 전에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네 번째 주제는 구단 정체성과 상징에 관한 얘기다.
두산그룹은 프로야구단을 창단하면서 팀명을 왜 ‘두산 베어스’가 아닌 ‘OB 베어스’로 결정했을까. 그리고 왜 ‘곰’을 상징 동물로 내세웠을까. 초창기 OB 베어스의 심벌이 된 삼색모자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두산 베어스 팬이라면 궁금할 법한, 그리고 알아두면 좋을 만한 상식을 소개하고자 한다.
● 왜 두산 베어스가 아닌 OB 베어스였을까
원년 프로야구는 6개 구단으로 출범했다. 그런데 다른 구단 5개 구단(MBC 청룡, 삼미 슈퍼스타즈, 해태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은 모두 팀명에 그룹을 앞장 세웠으나, 두산만 유일하게 그룹명 대신 자사 맥주 제품인 ‘OB’를 선택했다. 두산은 왜 ‘두산 베어스’가 아닌 ‘OB 베어스’로 출발했을까.
“당시 OB가 그룹의 주산업이었어요. OB맥주가 잘 팔려야 하니까 OB를 앞세웠던 것이죠.”
OB 베어스 박용민 초대 단장의 얘기다.
그의 말처럼, OB맥주는 그 시절 두산그룹의 주력 계열사였다. 동양맥주로 시작해 광복 이후 ‘OB맥주’라는 이름으로 국내 맥주 시장을 지배했다. OB는 ‘Oriental Brewery’의 약자. 그래서 두산은 그룹명 대신 소비재 사업의 대표 격인 OB를 프로야구단 간판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박철순이 1982년 22연승 신화를 쓰며 첫 우승했을 때도, 김상호가 1995년 잠실 홈런왕에 오르며 두 번째 정상을 차지했을 때도, ‘OB 베어스’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썼다.
1990년대 후반부터 사업구조 개편을 시도하던 두산은 1999년 그룹명을 프로야구단의 전면에 내세우기로 하면서 ‘두산 베어스’로 팀명을 바꿨다. 점차 OB맥주의 지분을 줄여나가다 2001년 매각하면서 현재는 OB맥주가 두산그룹과는 관련이 없는 업체가 됐다. 그러나 원년부터 1998년까지 17년의 세월을 지탱한 ‘OB 베어스’는 팬들의 추억과 프로야구 역사에서 지워질 수 없는 이름이다.
● 왜 곰을 마스코트로 정했을까.
『두산 그룹의 OB 베어스는 팀명과 심벌마크를 가장 먼저 정하는 등 팀 창단 준비작업에 기선을 잡았다. 팀명은 그동안 OB체인에서 사용하던 것을 그대로 정했고, 곰은 우리의 조상이란 설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라고 두산 관계자는 설명했다.』 <1981년 12월 25일자 매일경제>
<OB 베어스 마스코트 ⓒ두산베어스>
두산은 팀명과 심벌마크를 정할 때도 6개 구단 중 가장 발 빠른 행보를 보였다. 그렇다면 왜 많은 동물들 중에 곰을 마스코트로 결정했을까. 지금까지 ‘뚝심’으로 이어지는 베어스의 전통을 생각한다면 곰을 선택한 것은 운명의 한 수였다. 박용민 초대 단장은 이에 대해 “곰은 튼튼하고, 그래서 건강과 지혜와 평화를 상징하는 동물이라 그렇게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사실 두산이 프로야구단을 만들면서 처음으로 곰과 인연을 맺은 것은 아니었다. 그 이전에 이미 두산과 곰은 관계가 있었다. 1980년 10월에 ‘OB베어’라는 체인점을 모집 한 뒤 11월 초부터 일제히 문을 열면서 곰을 상징동물로 삼았던 것. 당시 ‘OB베어’는 신선한 생맥주를 간단히 서서 싸게 마실 수 있도록 꾸민 새로운 생맥주업소로 출발했는데, 전국에 체인점이 들어서면서 빅히트를 쳤다. 당시 신문지상에 나온 ‘OB베어’ 광고를 보면 곰이 거품 가득한 생맥주잔을 안고 있는 모습이 친근하게 그려졌다. “이젠 곰만 봐도 믿을 수 있습니다. 새로운 멋의 생맥주집 OB베어”라는 광고 문구도 눈길을 끌었다.
● 왜 삼색 모자를 만들었을까
박용민 초대 단장은 현재 춘천에 살고 있다. 팔순을 훌쩍 넘긴 고령이지만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두산 베어스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잠실구장을 찾는다. [베팬알백] 인터뷰를 위해 잠실야구장 내 두산 구단 사무실을 방문한 노신사는 낡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는 기자에게 “이 게 사실 OB 베어스 최초의 모자”라고 소개하며 모자 속에 숨은 사연을 공개했다.
“이 모자는 두산그룹 광고계열사인 오리콤에서 처음으로 샘플로 만들어 가져온 거였어요. OB 베어스는 페르시안 블루를 기본 색깔로 삼았는데, 원정 유니폼뿐만 아니라 모자도 처음엔 남색 바탕에 OB를 새겨 넣었죠. 그런데 제가 이 샘플 모자를 박용곤 회장(구단주)한테 보여드렸더니 ‘야, 좀 화려하게 해야 한다. 너무 안 보인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결국 다시 모자 디자인을 원점에서 재검토했어요. 그런데 메이저리그 한 구단이 사용하는 모자가 있었어요. 삼색으로 화려하더라고요. 그 모자를 참고해 우리도 빨간색, 하얀색, 푸른색이 들어간 삼색 모자를 만들기로 했죠.”
메이저리그 구단은 다름 아닌 몬트리올 엑스포스였다. 몬트리올은 캐나다에 있지만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퀘벡주의 제1 도시. 몬트리올 엑스포스는 그래서 프랑스 국기처럼 흰색과 빨간색, 파란색을 사용하는 화려한 삼색 모자를 썼다. 언뜻 보기엔 한여름 해변에 설치하는 파라솔 같기도 하고,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삼색 사탕 같기도 한 독특한 디자인이었다.
“맞아요. 몬트리올이었어요. 그래서 몬트리올 모자 하나를 얻어 와서 우리도 삼색으로 된 화려한 모자로 만들어 봤죠. 삼색 모자가 처음에 나왔을 땐 솔직히 ‘야~, 이건 화려해도 좀 너무 화려하지 않나’ 했는데 성공작이었어요. 아주 성공작이었죠. 어린이들이 홀딱 반했으니까.” OB 베어스는 당시 몬트리올 엑스포스와 자매결연 추진을 계획했지만 성사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1987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처음 자매결연을 했다.
“회장님이 문제 삼지 않았다면 어쩌면 이 모자가 OB 베어스 구단 최초의 모자가 됐을지도 모르죠.” 박용민 단장은 자신이 쓰고 온 낡은 모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오리콤에서 샘플로 가져왔다가 나한테 놓고 가버린 모자인데, 어쨌든 저한테는 첫 자식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지금도 외출할 때는 항상 이 모자를 쓰고 다녀요.”
구경백 일구회 사무총장은 삼색 모자와 관련해 흥미로운 얘기를 꺼냈다. 그는 OB맥주에 입사한 뒤 프로야구단 창단 작업 때 OB 베어스 야구단으로 발령받아 매니저 일을 시작한 인물이다.
“OB 베어스가 원래 모자 모델로 삼으려고 했던 메이저리그 구단은 밀워키 브루어스였어요.” 그러고 보니 박용민 단장이 쓰고 있는 모자에서 밀워키 브루어스 모자의 분위기가 났다. 색깔이나 디자인이 흡사하다. 밀워키라면 박철순을 미국 무대로 데려갔던 구단인 데다 맥주회사라는 공통분모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밀워키풍의 모자는 결국 채택되지 않았고, 대신 그 자리를 몬트리올 엑스포스가 대신했다. 구경백 사무총장은 말을 이어갔다.
“당시 삼색 모자로 바꾸기로 했는데 컬러가 문제였죠. 제가 다른 직원 한 명하고 그 색깔을 찾기 위해 서울 시내를 다 뒤지고 다녔어요. 그러다 현재 목동야구장으로 가는 길에, 오목교 건너기 전에 ‘영안모자’라고 있었어요. 거기 천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는데 그 창고 안에 천 두루마리만 수만 개가 있는 거예요. 공장장과 함께 공장 내부 창고를 샅샅이 뒤졌죠. 우여곡절 끝에 컬러를 찾아서 삼색 모자를 만들었는데, 그 모자가 히트를 쳤어요. 어떻게 보면 당시엔 소화하기 힘든, 난해한 디자인이었잖아요. 보기에 따라서는 촌스럽기도 하고…. 그런데 유니폼하고 매치가 잘 되면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죠.”
요즘 잠실구장엔 OB 베어스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젊은 두산 팬들도 삼색 모자를 즐겨 쓴다. 예나 지금이나 화려한 디자인으로 팬들에게 사랑받는 삼색 모자는 그렇게 탄생했다. 삼색 모자는 오늘날까지 두산 베어스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두산 베어스도 ‘올드 유니폼 데이’ 때 삼색 모자를 착용하면서 팬들과 함께 전통과 역사, 추억을 공유해나가고 있다.
● 세 차례나 창단식을 거행한 이유
『6개 구단 중 가장 먼저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의 계약을 끝낸 OB 베어스는 1월 11일부터 4일간 두산연수원에서 선수들의 연수를 마친 뒤 15일 창단식을 갖고… (중략) MBC는 1월 5일 선수단과 1차 접촉을 갖고 9일까지 선수계약을 매듭지은 뒤 10일 백인천 선수 겸 감독이 10일 귀국하는 대로 체력훈련을 시작할…. (중략) 해태는 6일부터 선수계약에 들어가… (중략) 롯데는 8일까지 구단 사장이 확정되는 대로 15일까지 선수계약을… (중략) 삼성은 외유 중인 이건희 구단주가 9일 귀국하는 대로 12일까지 선수 계약을 끝내고… (중략) 삼미는 당초 선수들의 보수등급을 7등급에서 8등급으로 나눠 조정한 계약금과 연봉으로 선수들과 계약을 서두르고 있다.』 <1982년 1월 6일 경향신문>
<OB 베어스 창단식 ⓒ두산베어스>
『한국프로야구 6개 구단 중 두산OB 베어스가 15일 창단식을 갖고 첫 출범의 닻을 올렸다.』 <1982년 1월 16일자 동아일보>
OB 베어스는 무엇을 하든 최초였다. 기사처럼 다른 구단이 선수들과 협상도 시작하기 전에 가장 먼저 선수계약을 마무리했고, 창단식도 가장 먼저 열었다. 개막을 앞둔 3월 18일부터 가장 먼저 어린이회원 모집에 나서기도 했다. 프로야구를 시작하기로 결정하자마자 박용곤 두산그룹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박용민 단장이 이미 미국과 일본의 선진구단 운영 기법을 배워온 결과였다. 이를 통해 OB 베어스는 프로야구 초창기에 한 발 앞서 나가는 구단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OB 베어스 어린이회원 모집 ⓒ두산베어스>
눈길을 끄는 점은 두산그룹이 당시 창단식을 세 차례나 거행했다는 사실이다. 1월 15일에 그룹계열사인 합동통신과 OB 베어스 구단 사무실이 있는 서울의 합동회관에서 6개 구단 중 최초로 창단식을 열었고, 실제 연고지인 대전(2월 16일 대전중앙관광호텔)과 청주(2월 17일 충북은행강단)에서 다시 한 차례씩 창단식을 진행했다. 연고지 팬들에게 인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편 MBC 청룡은 1월 26일, 해태 타이거즈는 1월 30일, 삼성 라이온즈는 2월 3일, 삼미 슈퍼스타즈는 2월 5일, 롯데 자이언츠는 2월 12일 각각 창단식을 열면서 본격적인 프로야구 출항을 준비했다.
● 최초 전지훈련의 풍경
요즘엔 KBO리그 각 구단이 2월 1일부터 해외에서 스프링캠프를 치르지만, 원년에는 프로야구 개막을 앞두고 각 구단이 국내 전지훈련을 통해 본격적인 담금질에 돌입했다.
OB 베어스는 1982년 2월 1일부터 마산에서 전지훈련을 시작했다. 최초의 전지훈련을 운치 있게 묘사한 당시 기사를 첨부한다. 그 시절의 기사체와 훈련 분위기를 사실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기사 원문을 그대로 싣는다. 1982년 2월 18일자 경향신문에 게재된 이방원 기자의 기사다.
『봄의 고향 마산은 프로야구의 열기 속에 새 봄을 기다리는 설렘으로 들떠 있다. <가고파> 시인 노산 이은상 씨를 낳은 문학의 고장이자 항도인 마산에 프로야구 OB 베어스 팀이 지난 1일 스프링캠프를 차리면서 시민들의 관심은 온통 프로야구에 쏠려 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평화스런 남쪽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무학산 기슭의 마산고 교정은 시골잔칫집처럼 부산하다. 운동장을 가득 메운 곰들(베어스)을 조련시키는 훈련 광경은 아마 실업팀에서 볼 수 없는 조직적이고 강도 짙은 것이어서 호기심 어린 구경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1조는 김영덕 감독의 내야노크(펑고), 2조는 피칭머신 2대를 이용한 타격연습, 3조는 이광환 코치의 아메리칸노크, 4조는 김성근 코치의 투수 아메리칸노크, 5조는 투수들의 투구연습. 끝없는 체력과 실기의 반복훈련이 계속된다.
“우리는 매일 세 번 죽습니다. 아침에는 장거리 구보로 죽고, 낮에는 훈련으로 죽고, 하오 5시엔 운동장을 30바퀴 도는 마무리 훈련으로 또다시 죽습니다.” 33세의 나이를 무릅쓰고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주장 김우열의 독백이 결코 엄살이 아니라는 실감이 난다.
“즐겨 마시던 술을 뚝 끊고 매일 비지땀을 흘리다 보니 체중이 5㎏이나 빠졌어요. 앞으로 5㎏을 더 줄여 82㎏으로 체중을 맞출 계획입니다.” 김우열과 동갑내기인 윤동균은 앞으로 5년 동안 베스트 멤버로 뛰겠다고 의욕을 보인다.
“미국의 프로야구보다 훨씬 견디기 힘들 만큼 강도가 높고 과학적인 훈련이에요.” 미국프로야구 밀워키 산하의 마이너리그 엘파소 디아블 팀에서 활약하다 귀국한 박철순도 혀를 내두른다.
“팀에서는 롯데와 MBC만큼은 꼭 이기라는 지시입니다만 시간이 흐를수록 가능성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김영덕 감독은 어느 팀보다 제일 먼저 서둔 강화훈련에서 재빨리 다진 투수왕국에 크게 기대를 거는 눈치다. 박철순과 선우대영은 완투능력을 갖춘 선발투수 감이고, 사이드드로 박상열은 선발, 계투, 마무리의 모든 능력을 갖춘 투수라고 만족해한다. 신인 강철원이 의외의 성장가능성을 보이고 있고, 김현홍과 왼손잡이 황태환은 구원투수로 충분히 기용할 수 있다고 보는 김 감독은 장신투수 계형철(181㎝)만 재기시키면 우승이 가능하다고 의욕을 보인다.
8년 동안 일본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 팀에서 투수생활을 했고, 귀국한 뒤 한일은행 에이스 투수로 국내실업야구를 주름잡았던 김영덕 감독과 재일교포 출신의 김성근 코치가 투수훈련에 그토록 주력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장기 페넌트레이스에서는 투수력의 비중이 절대적이어서 야심을 가져보는 것이 무리는 아닌 거 같아요.”
김 감독의 신중한 예상이 과히 빗나가지 않으리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코칭스태프와 선수전원이 호흡을 같이하는 인화(人和)의 팀웍 때문이라고 생각됐다. 인화는 바로 두산그룹의 이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