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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국 Mar 04. 2023

[41]사이클링히트 서울홈런왕…‘헐렝이’ 임형석의 불꽃

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OB의 프로 3년생 임형석이 통산 5번째 사이클링 히트의 대기록을 세웠다. 23일 잠실에서 열린 OB-롯데의 시즌 17차전 경기에서 임형석은 5타수 5안타와 함께 홈런 3루타 2루타 각 1개, 안타 2개를 때려내 프로야구 통산 5번째 사이클링 히트의 기록을 수립했다. 임형석의 이 기록은 지난 90년 8월 4일 대전구장에서 빙그레의 강석천이 태평양전에서 뽑아낸 이래 2년여 만이다.』 <1992년 8월 24일자 동아일보>


1992년. OB 베어스의 암흑기는 여전히 진행행이었다. 1988년부터 5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즐거움이 없던 그 시절, 그래도 희망의 꽃이 하나둘씩 피어나기 시작했다.


프로야구 선수 출신 최초로 사령탑에 자리에 오른 윤동균 감독의 지휘 아래 탈꼴찌를 넘어 5위까지 도약했고, 연습생 출신 투수 김상진은 2년 연속 10승을 기록하며 새로운 에이스가 됐다. 그해 당장 큰 활약을 하지는 못했지만 훗날 베어스 전력의 주축이 되는 권명철(2차 1라운드), 안경현(2차 2라운드), 장원진(2차 4라운드)이 입단한 것도 1992년이었다.


그리고 1990년 1차지명을 받고 입단한 임형석이 마침내 팀 내 주포로 급부상했다. 임형석은 특히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하는 진기록의 주인공이 됨과 동시에 그해 무려 26개의 홈런을 쳐내면서 ‘원조 잠실 홈런왕’으로 우뚝 섰다.


[베팬알백] 41번째 주제는 베어스 역사상 최초로 사이클링 히트의 역사를 쓴 ‘헐렝이’ 임형석 이야기다.



OB베어스 임형석이 수훈 선수로 뽑힌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두산베어스


● 1회부터 행운의 3루타임형석의 운수 터진 


OB 베어스는 1990년과 1991년 2년 연속 최하위로 내려앉았지만, 윤동균 감독 체제 첫해인 1992년 중위권으로 올라서며 조금씩 반등의 기틀을 마련해 가고 있었다.


8월 22일. OB는 잠실에서 연장 15회 혈전 끝에 강영수의 끝내기 안타로 롯데에 3-2로 짜릿한 승리를 거뒀다. 특히 잠실 롯데전 9연패의 사슬을 끊어냈기에 OB 선수단은 앓던 이를 뽑아낸 느낌이었다(그해 롯데는 3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강팀이었다).


이날 승리로 OB는 48승3무55패를 기록했다. 당시엔 4강까지 포스트시즌 진출권이 주어졌다. OB는 4위 삼성(56승2무48패)에 7.5게임차로 뒤졌고, 6위 태평양(45승3무59패)에 3.5게임차로 앞섰다. 그 뒤로 LG와 쌍방울이 멀찌감치 바닥권으로 떨어져 있었기에 3년 연속 꼴찌에 대한 두려움은 사실상 씻어낸 상황이었다.


이튿날인 8월 23일 일요일. 오후 5시 게임을 보기 위해 잠실구장엔 OB 팬들뿐만 아니라 3위 롯데 팬들까지 운집했다.


OB 선발투수는 그해 1승도 없었던 좌완 이진. 1989년 1차지명을 했지만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한 아픈 손가락이었다. 이진은 1회초 2사 후 ‘호랑나비’ 김응국과 ‘자갈치’ 김민호에게 안타 2개를 허용하며 위기에 몰렸지만, 5번타자 ‘탱크’ 박정태를 중견수 플라이로 처리하며 위기를 벗어났다.


롯데 선발투수는 고(故) 박동희. 불같은 강속구를 자랑하며 ‘제2의 선동열’로 주목받던 프로 3년생 투수(그해 한국시리즈 MVP)였다.


그런데 OB는 시작부터 박동희를 두들겨 나갔다.


1번타자 김광림과 2번타자 김광수의 우전안타, 3번타자 김형석의 좌전 적시타가 연이어 터지며 1-0으로 앞서나갔다. 이어 전날 연장 15회말 끝내기 안타를 친 4번타자 강영수는 볼넷을 골라나가 OB는 무사 만루라는 황금 찬스를 잡았다.


유지훤 코치와 임형석 ⓒ두산베어스


5번타자 임형석 타석. 깡마른 몸매에도 불구하고 전날까지 시즌 20홈런을 기록한 강타자. 1990년 입단 첫해 4홈런, 1991년에 6홈런에 그쳤지만, 1992년 마침내 꽃을 피웠다. 드넓은 잠실구장을 사용하는 OB와 LG(MBC 시절 포함) 역대 선수를 통틀어 처음으로 20홈런 고지를 밟은 주인공이 되면서 ‘잠실 홈런왕’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갈 길 바쁜 롯데는 다급해졌다. 강병철 감독은 여기서 박동희를 내렸다.


“사실 제가 박동희한테 좀 강했어요. 그래서 속으로는 박동희가 계속 마운드에 있기를 바라고 있었죠. 그런데 잠수함 투수 김청수 선배로 바뀌더라고요.”


임형석은 1968년생으로 김동수(현 LG 2군 감독)와 서울고-한양대 동기. 부산고-고려대 출신의 박동희와도 동기였다. 벌써 50대를 훌쩍 넘어선 나이. 그러나 임형석은 30년 가까이 흐른 그날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심지어 볼카운트까지 그려냈다.


“볼카운트 1스트라이크 1볼에서 3구째를 쳤는데 잘 맞았어요. 중전안타성 타구였죠. 중견수 전준호 선수가 앞으로 전력으로 달려오더라고요. 바로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나 봐요. 그런데 타구가 드라이브가 걸리면서 중견수 옆으로 빠져 좌중간 펜스까지 굴러갔어요. 단타가 될 타구였는데 3루타가 된 거죠. 운이 좋았죠.”


3타점 싹쓸이 3루타! 스코어는 단숨에 4-0이 됐다.


임형석이 “운이 좋았다”고 한 것은 단타가 3루타로 둔갑한 것만을 일컫는 게 아니었다.


“저는 그라운드 홈런(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도 가능할 거라 판단하고 전력 질주를 했죠. 그런데 손상대 3루 코치가 막더라고요. 무사니까 무리할 필요가 없다고 본 거죠. 사실 그냥 홈으로 달렸으면 살았을 거예요. 그때 코치님이 3루에서 막아주신 게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가 됐습니다. 하하.”


임형석은 6번타자 최동창의 우익수 희생플라이로 득점했다. OB는 1회에만 순식간에 5점을 뽑아내면서 승기를 잡았다.



홈런-2루타-안타-안타5안타 7타점에 올마이티 히트’ 완성

마른 몸매에도 어렵지 않게 홈런을 때리던 임형석의 타격폼 ⓒ두산베어스


고질적인 제구 문제를 겪던 이진은 넉넉한 득점 지원을 등에 업고 2회와 3회에 볼넷 1개씩만 내준 채 무실점으로 역투해 나갔다.


임형석은 3회말 1사후 타석에 들어섰다. 그리곤 왼쪽 담장을 훌쩍 넘기는 솔로포를 터뜨렸다. 시즌 21호 홈런. 해태의 ‘노지심’ 장채근과 홈런 부문 공동 4위가 됐다.


“김청수 선배는 까다로운 투수인데 그날따라 공이 잘 보이더라고요.”


5회말 1서 1·2루에서 맞이한 세 번째 타석. 임형석은 김청수를 상대로 다시 2타점 좌익선상 2루타를 날렸다. 스코어는 8-0으로 벌어졌다. 승부에 쐐기를 박는 일타였다.


롯데는 6회부터 신인 좌완투수 가득염을 올려 경험을 쌓아주려고 했지만, OB는 여기서 2점을 추가했다. 10-0.


7회말, 롯데 마운드에는 여전히 가득염이 올라와 있었다. 임형석은 선두타자로 타석에 들어섰다.


“솔직히 첫 타석 3루타나 두 번째 타석 홈런을 칠 때만 해도 사이클링 히트는 생각도 못했어요. 세 번째 타석에서 2루타가 나온 다음에 사이클링 히트에 안타 하나 남았다는 걸 의식하게 됐죠. 그런데 네 번째 타석에 들어가기 전에 윤동균 감독님이 절 부르시더니 ‘점수차도 크니까 볼이 들어오면 무리하게 치려고 하지 마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감독님은 부임 후 저를 참 많이 아껴주시고 몸이 안 좋을 땐 관리를 해주시면서 기회를 많이 주셨거든요. 무리하게 스윙하다 다칠까 봐 걱정하셨나 봐요.”


아니나 다를까, 좋은 공이 오지 않았다. 스트라이크존을 한참 벗어나는 공이었다.


“볼이 연속으로 3개가 들어오더라고요. 그때까지는 참았어요. 그런데 점수 차도 컸던 상황이라 그냥 4구째와 5구째에 방망이를 돌렸죠. 연속 헛스윙을 해서 볼카운트가 3볼 2스트라이크가 됐어요. 그리고 6구째에 방망이를 돌렸는데 결국 좌전안타가 되더라고요.”


단 4타석 만에 완성한 사이클링 히트였다. 역대 최소 타석 사이클링 히트 타이기록이기도 했다. 


임형석이 사이클링히트를 기록한 당일 기록지 ⓒKBO


(‘사이클링 히트’는 일본과 한국에서 사용하는 변형된 용어로, 메이저리그에서는 ‘히트 포 더 사이클(hit for the cycle)’이라 부른다. 또 전능(全能)한 안타라는 의미로 ‘올마이티 히트(Almighty hit)’라고도 한다.)


사이클링 히트는 사실 ‘대기록(大記錄)’이라기보다는 ‘진기록(珍記錄)’에 가깝다. 좀처럼 보기 드문 특이하고도 진기한 기록이기에 야구선수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쳐보고 싶은 ‘버킷 리스트’에 속한다. 


그러나 평생 기록하지 못하고 유니폼을 벗는 선수가 대다수다. 아무리 슈퍼스타라도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할 순 없다. 그런 면에서 임형석은 행운을 잡은 셈이었다.


임형석의 안타 행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8회말 마지막 타석에서 2타점 우전안타를 날렸다. 5타수 5안타 7타점. 당시 역대 한 경기 최다타점 타이기록이었다(훗날 정경배 등의 15차례 8타점이 나왔고, 박석민이 삼성 시절이던 2015년 9타점으로 한 경기 최다타점 기록을 수립했다). 이날 OB 선발 이진은 5.2이닝 무실점으로 시즌 첫 승을 기록했다. 나머지 3.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은 김보선이 시즌 2세이브를 따냈다.


“요즘엔 기록을 달성하면 경기가 잠시 중단되면서 선수가 팬들에게 인사도 하고 세리머니도 하지만, 당시엔 그런 문화가 없었어요. 1루에서 이삼열 코치님과 하이파이브를 한 게 다였던 것 같아요.



KBO 최다’ 사이클링 히트 구단베어스의 역사


1992년 임형석의 사이클링히트 소식을 크게 다룬 조선일보

KBO리그 역사상 1호 사이클링 히트는 원년이던 1982년에 나왔다. 6월 12일 삼성 오대석이 삼미전에서 기록한 바 있다. 이어 빙그레 이강돈이 1987년 8월 27일 잠실 OB전에서 2호를, 롯데 정구선이 같은 해 8월 31일 인천 청보전에서 3호를 기록했다. 그리고 1990년 8월 4일 빙그레 강석천(현 두산 베어스 수석코치)이 대전 태평양전에서 4호를 달성했다.


이로써 임형석은 KBO 역대 5호이자 베어스 역사상 최초의 사이클링 히트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지금까지 KBO에서 사이클링 히트는 2021년 양의지(NC)와 이정후(키움)까지 총 29차례 기록됐다. 1년에 채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진기록. 그중 베어스는 무려 5차례나 사이클링 히트를 작성해 삼성(5회)과 함께 가장 많이 기록한 구단이다.


그런데 OB 시절엔 사이클링 히트가 잘 나오지 않았다. 임형석이 유일했다. 두산으로 이름이 바뀐 뒤 이종욱(2009년), 오재원(2014년), 박건우(2016년), 정진호(2017년) 등 4명이 차례로 진기록을 만들면서 ‘사이클링 히트’ 하면 ‘베어스’라는 등식이 만들어지게 됐다.


삼성은 양준혁이 2차례(1996년, 2003년) 달성해 인원으로 따지면 삼성은 4명, 베어스는 5명이다. 결국 베어스가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한 선수를 가장 많이 배출한 구단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사이클링 히트의 산실’로 공인받고 있는 베어스 역사에서 그 시초의 인물이 바로 임형석인 것이다.


 ■베어스 역대 사이클링히트                    



‘3형석 추억 그리고 서울 홈런왕’ 임형석

‘3형석’ 중 맏형인 김형석의 타격 모습 ⓒ두산베어스


임형석을 추억할 때 1990년대 초반 OB 베어스의 라인업을 장식한 ‘형석 트리오’를 빼놓을 수 없다. 1985년 입단해 OB 베어스의 핵심 타자로 자리 잡은 김형석, 그리고 1990년 입단 동기인 외야수 강형석(휘문고-건국대)과 임형석. 이들은 ‘3형석’으로 자주 회자되곤 했다. 종종 3~4~5번을 돌아가며 클린업 트리오에 포진하기도 했다. 그중 임형석은 유일한 우타자였다. 여기에 보성고 출신으로 1989년 입단한 1루수 겸 외야수 김종석까지 전광판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면 ‘4석’이 줄줄이 포진하는 광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임형석은 암흑기의 마지막 시즌이던 1992년, OB 베어스에서 가장 찬란히 빛난 별이었다. 팬북 프로필에 키 184㎝·몸무게 76㎏으로 적혀 있지만 실제로는 체중이 74㎏에 불과했던 호리호리한 몸매의 소유자. 그런 가냘픈 몸으로도 1992년 무려 26개의 홈런을 터뜨려 장종훈(41홈런), 김기태(31홈런)에 이어 홈런 부분 단독 3위에 이름을 올렸다. 26홈런은 훗날 타이론 우즈가 1998년 OB에 입단해 42홈런을 기록하기 전까지 잠실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는 타자 중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이었다.


“어릴 때부터 살이 안 찌는 스타일이었어요. 1992년에 홈런을 많이 치니까 기자들이 와서 제 손목을 만져보곤 했어요. 근데 저는 손목도 굉장히 가는 편이었거든요. 다들 깜짝 놀라곤 했죠. 어떻게 이렇게 마른 몸으로 홈런을 치냐면서요. 프로 들어와서 ‘헐렝이’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처음엔 그게 싫었어요. 원체 마른 체형이다 보니 초등학교 시절부터 항상 ‘힘이 없어 보인다’는 얘기를 많이 듣고 살았거든요. 오기가 생겨서 그런지 어릴 때부터 타구를 멀리 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선수들끼리 경쟁이 붙어 훈련도 열심히 했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타구가 멀리 가더라고요. 1992년 홈런 숫자가 늘어나니까 상대 투수들이 몸쪽 승부를 잘 안 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밀어 치면 타율도 높고 타구가 더 멀리 가는 스타일이었어요. 센터를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가는 홈런이 많았죠.”


현재 서울 서대문구에서 유소년 야구단 어린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는 그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추억에 젖었다.


베어스 어린이야구대회에 앞서 모교 후배를 지도하는 임형석 ⓒ두산베어스


임형석은 서울고와 한양대 시절 유격수가 주 포지션이었다. 1990년 신인으로 입단할 때만 해도 유격수를 보던 그는 1992년 주로 3루수로 나섰다. 112경기에 출장해 타율 0.290(410타수 119안타), 2루타 18개에 73타점(10위)까지 곁들였다. ‘잠실 홈런왕’이라는 타이틀 하나만으로도 당연히 3루수 골든글러브를 노려볼 만했다. 더군다나 3루수 터줏대감이던 해태 한대화가 부진했던 시즌이라 더 큰 기대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났다. LG의 2년생 3루수 ‘로보캅’ 송구홍. 그해 121경기에 출장해 타율 0.304(451타수 137안타), 20홈런, 2루타 23개, 20도루, 59타점을 기록했다. 특히 역대 5호이자 잠실구장을 사용하는 팀 타자로서는 최초로 ‘20홈런-20도루’ 클럽에 가입하면서 ‘잠실 홈런왕’만큼이나 큰 화제를 몰고 왔다.


시즌 후 골든글러브 전망 기사가 나올 때마다 3루수는 가장 치열한 포지션으로 예상됐다. 1985년 박종훈이 외야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이후 6년간 황금장갑과 인연을 맺지 못했던 OB는 구단 직원들까지 홍보전에 가세해 ‘임형석 수상자 만들기’에 힘썼다.


그러나 투표 결과 10표차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송구홍이 77표, 임형석이 67표였다. 1992년 골든글러브 전 포지션을 통틀어 최소 표차로 당락이 결정된 포지션이 3루수였다. 다시 말해 그해 가장 아쉬운 탈락자가 임형석이었던 셈이다. 임형석은 지금도 그 아쉬움을 잊지 못한다.


“그해에 유격수 쪽 후보들 성적이 좋지 않아 시즌 도중에 주변에서는 ‘유격수로 포지션을 옮기는 게 어떻느냐’라고 조언하는 분도 많았어요. 저는 지는 걸 싫어하거든요. 계속 3루수를 보겠다고 했어요. 결국 송구홍이 골든글러브를 받더라고요. 1993년에 한양대 1년 후배 황일권이 입단했는데 대학 시절 제가 유격수를 보고, 황일권이 3루수를 봤거든요. 그런데 송구홍이 1993년 유격수로 옮긴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그래, 유격수 쪽에서 또 붙어보자’는 생각으로 제가 황일권한테 ‘넌 대학 때도 3루수를 봤으니 내가 유격수로 갈게’라고 말했어요.”


황일권은 1991년 OB 1차지명 선수였다. 당시 신인 1차지명 우선권을 놓고 주사위 던지기를 한 결과 LG가 이기면서 건국대 출신의 송구홍을 1차지명했고, OB는 한양대 출신으로 국가대표 1번타자로 활약한 황일권을 선택했다. 송구홍은 곧바로 LG에 입단했지만, 황일권은 실업팀 한국화장품에 입단했다가 2년 후인 1993년 OB 베어스 유니폼을 입었던 것이다.


그러나 1993시즌 개막 직후 OB는 내야 쪽에 실책이 연발되면서 균열이 생겼다. 유격수 임형석이 3루수로 가고, 3루수 황일권이 유격수로 가는 등 수비 위치가 다시 바뀌며 어수선한 상황에서 시즌 출발을 했다.


반딧불처럼 짧고 굵게 빛났던 임형석의 1992

임형석의 수비하는 모습 ⓒ두산베어스


1992년 혜성처럼 등장했던 임형석. 그러나 문제는 그 한 해에만 불꽃처럼 반짝했다는 사실이었다. 1992년의 성적을 바탕으로 프로야구를 휘어잡을 유망주로 기대했지만, 빛났던 시즌은 그해 한 시즌뿐이었다.


임형석은 1993년 68경기에 출장해 홈런 1개만 때려냈다. 1994년 109경기에서 6홈런, 1995년 82경기에서 3홈런, 1996년 51경기에서 1홈런. 결국 자유계약선수로 풀린 임형석은 1997년 롯데 유니폼을 입었으나 36경기에 출장해 1홈런에 그치며 유니폼을 벗었다.


1990년부터 1997년까지 통산 홈런수는 48개. 1992년 기록한 홈런수(26개)가 나머지 시즌을 모두 합친 홈런수(22개)보다 더 많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993년 시즌에 들어갔는데 스윙을 하다 왼손 엄지손가락을 다쳤어요. 파울이 될 때 방망이가 돌면서 엄지가 꺾였어요. 수술도 생각해 봤는데 당시엔 수술도 안 된다고 해서 참고 기다렸죠. 한동안 쉬다가 다시 방망이를 잡았는데 헛스윙이 되거나 파울이 되면 다시 왼손 엄지가 붓더라고요. 혹시나 통증이 올까 봐 의식을 하다 보니 스윙을 제대로 못했어요. 장기간 쉬어야 했지만 야구선수가 방망이를 돌리지 않고 쉴 수가 있습니까. 시즌이 끝나고 깁스도 해봤지만 다시 훈련을 시작하다 보면 손가락이 붓고…. 고질적인 허리 통증도 있었지만 그건 윤동균 감독님이 관리를 잘해주셔서 괜찮았어요. 그런데 손가락은 어떻게 해보질 못하겠더라고요. 지금도 조금씩 아플 때가 있어요. 그래서 저는 골프도 못 쳐요.”


서대문에서 유소년을 지도하고 있는 그에게 간혹 어린 제자들이 인터넷을 뒤지다 자신의 존재를 알고는 ‘1992년 잠실 홈런왕’의 전설을 묻곤 한단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응, 동명이인이야”라면서 농담처럼 웃어넘긴다고 했다.


간혹 OB 올드팬들은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할 때가 있다. 그들도 꼭 1992년의 이야기를 물어보곤 한단다.


그 역시 1992년 찬란했던 그 시절을 잊을 수 있을까.


“다 옛날 얘기죠. 그래도 찬란했던 그 해가 있었으니까, 그때의 추억이 생각나기도 해요. 다만 다른 시즌에 야구를 잘하지 못하고 은퇴해 아쉽기도 하고요. 요즘엔 자주 프로야구를 보지는 않아요. 서울고 코치 시절 제자였던 최원준(KIA-상무)이나 강백호(kt)가 야구하는 모습에 가끔씩 TV에 눈길이 가기도 하지만요. 아, 간혹 누군가가 사이클링 히트 쳤다는 소식을 들으면 혼자 씩 웃곤 해요.”

베어스 구단 최초의 사이클링히트 진기록을 세운 임형석 ⓒ두산베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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