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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국 Mar 04. 2023

[42] ‘선동열급 루키’ 김경원의 등장과 암흑기 청산

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1. “OB엔 이 투수들이 전부입니까.”


1991년 일본 쓰쿠미 스프링캠프. 세이부 라이언스에서 OB 구단으로 파견된 나카니시 기와하루 포수 인스트럭터는 OB 선수들을 며칠 지도하더니 구단 관계자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렇습니다만….”


김태룡 매니저(현 두산 단장)와 함께 통역 업무까지 맡은 구경백 운영과장(현 일구회 사무총장)은 영문을 몰라 한마디 대답만 한 채 나카니시의 얼굴을 쳐다봤다.


말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감이 왔다. 한마디로 투수다운 투수가 안 보인다는 얘기였다.


#2. 세이부 네모토 리쿠오 관리부장(메이저리그의 단장 격)의 추천으로 나카니시 기와하루 포수 인스트럭터, 니시 마쓰오 투수 인스트럭터 등을 쓰쿠미 캠프에 초빙한 박용민 사장은 어느 날 저녁, 이들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박 사장은 며칠 전 이들이 말한 게 생각났다. 술을 한 잔 한 뒤 편한 분위기가 되자 질문을 던졌다.


“솔직히 우리 투수들 어떻습니까.”


인스트럭터들은 다소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박 사장이 귀를 쫑긋 세우자 나카니시 인스트럭터가 단호하게 말했다.


“일본 사회인야구 투수보다 못한 투수들이 많습니다.”


#3. 그로부터 2년 뒤. 이번에도 쓰쿠미에 스프링캠프가 열렸다. 그런데 일본인 인스트럭터들은 한 투수의 피칭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는 한마디 내뱉었다.


“와~. 우리가 이제야 제대로 된 투수를 봅니다.”


“공끝이 매우 특별합니다.”


일본인 인스트럭터들도 엄지를 치켜든 이 투수는 다름 아닌 1993년 OB 베어스에 입단한 루키 김경원이었다.


[베팬알백] 42번째 주제는 1993년 선동열급 마무리투수로 혜성처럼 등장해 OB를 암흑기에서 구출한 슈퍼 루키 김경원과 베어스의 감격적인 6년 만의 포스트시즌 진출 스토리다.


1993년 묵직한 공을 앞세워 뒷문을 책임졌던 김경원 ⓒ두산베어스


가을바람의 낙엽 같은추억의 이름 김경원


『프로 출신 제1호 감독 윤동균이 지휘봉을 잡은 OB는 3위에 안착, 성공적인 항해를 마쳤다. OB의 성공을 이끈 선수들을 살펴보면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 신인 우완 김경원이었다. 1989년 동대문상고 졸업반 당시 OB 1차지명을 받고도 중앙대에 진학했던 김경원은 2학년을 마치고 중퇴, 프로로 뛰어들어 9승3패23세이브(LG 김용수와 공동 2위)를 마크, 억대 계약금이 절대로 부끄럽지 않은 호성적을 올려 팀이 6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오르는 데 공헌했다.』 <한국야구사 1352페이지>


김경원. 우리는 어쩌면 그의 이름 석 자를 서서히 잊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가을바람에 간간이 흩날리는 낙엽처럼, OB 베어스의 지난날을 추억할 때면 그의 이름 석 자가 문득문득 바람결에 스쳐 지나가곤 한다.


‘맞아, 김경원이 있었지.’


올드 팬들이라면 무릎을 탁 칠만한 이름. 찬란했던 시간은 짧았지만, 누구보다 굵직한 울림을 줬던 선수. 그런 김경원을 떠올리면 1993년의 함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1988년부터 이어진 기나긴 암흑기. 1990년과 1991년에는 2년 연속 최하위라는 굴욕의 역사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통 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두운 법. 그 어둠의 터널을 지나 OB는 1992년 5위로 뛰어오르며 희망을 노래했다.


그리고 1993년, 마침내 빼앗긴 들에 봄이 왔다.


『국가대표 투수 김경원이 28일 OB 베어스와 계약금 1억 원, 연봉 1200만 원에 계약을 맺었다. 동대문상고 재학 시절이던 89년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로 뛰며 초고교급 투수로 꼽혔던 김경원은 1990년 중앙대에 진학해 대표 생활을 이어갔다. 김경원은 그러나 췌장암이 악화된 아버지 김용모(53) 씨의 수술비 마련을 위해 지난해 12월 자퇴한 뒤 그동안 OB와 입단교섭을 벌여왔다.』 <한겨레신문 1992년 12월 29일자>


무엇보다 1993년엔 1차지명 선수가 한꺼번에 무려 3명이나 OB에 들어왔다는 점이 눈에 띈다. 1991년 1차지명을 받은 뒤 실업팀 한국화장품에 입단했던 전천후 내야수 황일권이 2년 만에 OB행을 결심했고, 1993년 1차지명을 받은 대학 최고 거포 추성건도 입단했다.


여기에 1990년 1차지명 투수 김경원이 OB 유니폼을 입었다. 마운드 재건이 OB 구단의 암흑기 탈출과 팀 재건을 위한 필수 요소. 신인 김경원이 아마추어 시절의 명성만 살려준다면 신구 조화를 통해 뭔가 일을 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와 희망이 부풀어 올랐다.



초고교급 투수KBO 고졸 최초 1차지명, 그러나

1993년 팀을 이끌었던 윤동균 감독. 윤 감독의 김경원의 동대문상고 선배이기도 했다. ⓒ두산베어스


묵직한 얼굴, 묵직한 몸매, 그보다 더 묵직한 강속구.


김경원을 회상하자면 먼저 동대문야구장의 옛 추억이 떠오른다. 김경원은 초고교급 투수로 만년 하위 팀 동대문상고(현 청원고)를 전국 최강의 반열에 올려놓으며 각광받았다. 2학년 때인 1988년 봉황대기에서 팀을 4강에 진출시키며 우수투수상을 수상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3학년 때인 1989년엔 청룡기 우승을 이끌며 MVP와 우수투수상을 받았다.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 신분으로 성인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기염을 토했다.


OB는 1990년 신인드래프트에서 파격적으로 고졸 김경원을 1차지명했다. 당시엔 구단별로 2명을 1차지명할 수 있었는데 LG가 주사위 던지기에서 이겨 1순위와 4순위로 각각 김동수(서울고-한양대)와 이병훈(선린상고-고려대)을 뽑았고, OB는 2순위 임형석(서울고-한양대)에 이어 3순위로 동대문상고 김경원을 선택한 것. KBO 1차지명 제도 도입 후 고졸 최초의 1차지명이 탄생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경원은 프로행 대신 중앙대 진학을 선택했다.


“당시엔 대학 가서 국가대표 되는 것이 엘리트 코스로 여겨지던 시절이었죠. 프로 1차지명을 받아 좋기도 했지만 저도 국가대표 한 번 하고 싶다는 생각이 커서 중앙대 진학을 선택했습니다.”


김경원은 1990년 당시 1차지명과 대학 진학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설명했다.


OB는 앞서 설명한 대로, 1990년과 1991년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2년 연속 꼴찌에서 허우적거렸다.


“당시 OB는 주사위 던지기를 하는 족족 LG에 지기도 했지만, 들어오는 투수마다 부상자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투수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꼴찌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당연히 투수력을 보강해야 하는데 신인도 시원찮고 트레이드도 잘 안 됐죠. 항상 아등바등하다가 투수력 때문에 뒷심 부족으로 지고, 지고, 또 졌어요. OB 프런트 직원들끼리 술만 마셨다 하면 ‘왜 김경원이를 1차지명까지 해놓고 못 데리고 왔냐’고 신세 한탄을 하곤 했죠.”


구경백 현 일구회 사무총장의 기억이다.


김경원 역시 중앙대 진학 후 우여곡절을 겪었다. 1학년 때 팔꿈치가 아파 뼛조각 수술을 받았고, 2학년 때는 야구부원들끼리 농구를 하다 무릎 연골이 찢어지는 부상으로 수술을 해야만 했다. 재활의학도 주먹구구이던 시절, 무릎을 강화한다고 쪼그리고 앉았다 일어나는 훈련을 반복하다 무릎이 더 망가지고 말았다. 훗날 무릎 통증은 그가 선수 생활 내내 달고 다닌 고질이 됐고, 은퇴를 앞당긴 주범이 되고 말았다.



중앙대 중퇴와 OB 최초 계약금 1억원에 숨은 사연

OB베어스 최초 계약금 1억원 시대를 연 김경원. 경기 후 수훈선수 인터뷰 장면이다. ⓒ두산베어스


대학 2학년 시절이던 1991년,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췌장암 진단을 받고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가세가 기울었다. 야쿠르트 배달을 하던 어머니의 수입만으로는 버티기 힘들었다. 돈이 필요했다.


“왜 1차지명을 해놓고 김경원이를 못 데려왔냐”고 술자리에서 한탄하던 OB 운영팀이 움직였다.


“어떻게 해서든 김경원을 데려오자.”


당시는 프로(KBO)와 아마추어(대한야구협회)가 앙숙처럼 으르렁거리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프로-아마 협정서. 일종의 신사협정서였다. 이에 따르면 대학 자퇴 선수는 1년을 쉬어야 했다.


그래도 OB 구단이 살기 위해선 1년이라도 먼저 김경원을 데려와야 했다. OB 구단의 스카우트를 책임지던 고 강남규 부장이 중앙대 감독과 학교 측을 설득하고, 양승호 스카우트가 김경원을 마크했다.


“1989년 동대문상고가 우승할 때 제가 신일고 감독을 하고 있었는데 김경원한테 밀려서 졌거든요. 김경원이 어떤 투수인지는 사실 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죠.”


양승호 고양 위너스 총괄단장(전 롯데 감독)은 30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김경원은 1991년 11월에 중앙대에서 중퇴했다. 규약상 1년을 무적 선수로 지내야 했다. 중앙대에서도 공을 던질 수 없고, OB에 입단할 수 없는 신분이어서 홀로 친구가 보조코치로 있었던 배명고에서 개인훈련을 했다.


“틈만 나면 김경원을 찾아가서 밥 사주고, 생맥주 사주고, 같이 자고 그랬죠. 그때 제가 신혼 때였는데 김경원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나중엔 집에 있는 것보다 김경원하고 같이 있는 시간이 더 많다시피 했어요.”


김경원은 1992년이 넘어가기 전, 12월 28일에 마침내 계약금 1억 원과 연봉 1200만 원의 조건에 OB와 계약했다. 1억 원은 OB 구단 역사상 최초의 억대 계약금. 언론 발표용과 달리 실제로는 위로금조로 계약금 800만 원을 보탰다. 신인 연봉 상한선인 1200만 원까지 합쳐 1억2000만 원을 채워준 셈이었다.



김경원 등장, OB 반격의 역사 시작

김경원 ⓒ두산베어스

“박동희하고 선동열 합친 거 아냐?”


누군가는 머리가 크다고 해서 ‘대가리’라 불렀고, 누군가는 곰을 닮았다고 해서 ‘곰탱이’이라 말했다. 과묵한 데다 진중한 성격이라 ‘애늙은이’이라고도 했다. 그러고 보니 외모부터 곰군단에 입단할 상이었다.


묵직한 얼굴은 박동희(롯데)를 연상시켰고, 하체를 쭉 끌고 나가 던지는 투구 폼은 선동열(해태)을 떠올리게 했다. 신인이지만 일본 쓰쿠미 스프링캠프부터 140㎞ 중후반대의 강속구를 포수 미트 속에 펑펑 꽂아 넣자 모두들 그의 외모와 투구폼, 구위를 놓고 한마디씩 품평회를 했다.


그러던 사이 앞서 설명한 대로 일본인 인스트럭터들이 “우리가 이제야 제대로 된 투수를 본다”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동대문상고 직속 선배인 윤동균 감독도 김경원의 투구만 보면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1993년 4월 10일 개막전. 사직에서 전년도 한국시리즈 우승 팀 롯데를 상대해야 했다. 4-1로 앞서던 게임을 8회말 한꺼번에 3점을 내주는 바람에 결국 4-5로 역전패했다.


출발이 좋지 않았지만 OB는 이튿날 값진 승리를 챙겼다. 선발 장호연이 8회 선두타자 김응국을 볼넷으로 내보낸 뒤 한영준에게 적시 2루타를 맞아 3-2로 쫓기자 윤동균 감독은 마침내 김경원을 호출했다.


김경원의 프로 데뷔전이었다. 무사 2루 상황. 김경원은 계속된 1사 1·3루에서 대타 최계영에게 우익수 파울플라이를 유도했지만 희생플라이로 이어져 동점을 허용했다.


돌아선 9회초. 1사 1·3루에서 임형석이 전년도 신인왕 롯데 염종석을 상대로 희생플라이를 날려 OB가 다시 4-3 리드를 잡았고, 김경원은 9회말을 삼진 1개 포함 삼자범퇴로 처리하면서 데뷔전에서 프로 첫 승을 올리게 됐다.


OB의 1993년 첫 승이자 ‘김경원 시즌’을 위한 경쾌한 출발 신호였다. 김경원은 그 이후 승승장구했다. 4월 14일 잠실 삼성전 구원승(5.2이닝 2실점), 4월 20일 인천 태평양전 구원승(6.2이닝 1실점)을 올렸다. 구원투수지만 승부처에 등판해 5~6이닝도 마다하지 않고 던지며 3연승 무패를 달렸다.

데뷔 후 3경기 연속 등판 승리는 KBO 역사상 최초의 기록. 그 이후 지금까지 누구도 이 기록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2002년 KIA 김진우와 2006년 한화 류현진이 타이기록까지만 작성했다. 다시 말해 KBO 역사상 단 3명밖에 없는 진기록이다.



김원형 노히트노런 희생양충격 딛고 5 반등

일본 캠프에서 훈련 중인 투수진 단체 사진 ⓒ두산베어스


OB는 개막 이후 8경기를 치르는 동안 묘하게 패-승-패-승-패-승-패-승을 반복했다. 이어 4월 20일 인천 태평양전에서 김경원의 구원승 속에 시즌 처음 2연승을 올려 5할 승률 +1을 기록하게 됐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4월 21일 인천 태평양전부터 27일 잠실 LG전까지 내리 5연패. LG는 4연승 신바람 속에 9승5패로 2위를 달렸고, OB는 5승9패로 6위로 내려앉아 분위기가 대조됐다. OB는 4월 28일 LG전에서 노장 박철순의 역투 속에 간신히 5연패 사슬을 끊었다. 그러나 29일 다시 LG에 4-5로 졌다.


그리고 4월 30일 쌍방울전. 쌍방울 ‘어린왕자’ 김원형(현 SSG 감독)에게 노히트노런을 내주며 0-3 충격패를 당했다. 6회 김민호가 볼넷 하나를 얻지 못했더라면 퍼펙트게임을 당할 뻔했다. OB로선 1988년 장호연이 개막전에서 노히트노런을 달성한 적은 있지만, 노히트노런을 헌납한 것은 구단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개막 첫 달인 4월까지의 성적은 6승11패로 6위에 그쳤다. 승패 마진이 -5로 불어났다. 위쪽을 바라보고 출발했지만 오히려 아래쪽 7위 쌍방울(6승12패)과 최하위 태평양(4승1무10패)에 0.5게임차로 쫓기는 신세가 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나마 4월 6승 중에 신인 김경원이 3구원승을 챙겼다. 만약 김경원마저 없었더라면 OB는 1993년 시즌 초반에 회복불능의 나락으로 떨어졌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노히트노런 패배의 충격파로 OB는 침잠했을까. 아니다. 정반대였다. 5월 첫 6경기에서 5승1패로 반등했다. 그 사이 김경원이 5월 6일 잠실 롯데전에서 구원승을 챙겨 시즌 4승을 올렸다. 빙그레 송진우와 다승 공동 1위가 됐다.


OB는 5월에 13승2무8패 호조 속에 시즌 19승2무19패로 5할 승률을 맞췄고, 순위도 4위로 점프했다.



LG 대역전 레이스정규시즌 최종일에 감격의 3 점프 

1993년 후반기 맹렬한 기세를 올린 OB베어스 선수단 ⓒ두산베어스


OB는 그해 ‘홀짝제’처럼 홀수 달에 상승세를 타고, 짝수 달에 브레이크가 걸리기를 반복했다. 6월에 10승2무14패(승률 0.423)로 가라앉았지만, 7월에 무려 14승1무5패의 놀라운 승률(0.725)을 올렸다. 8월에 다시 12승2무15패(승률 0.448)로 다소 부진했지만, 9월에 막판 스퍼트로 ‘미러클 레이스’를 펼쳤다.


9월 시작하자마자 3연승을 달렸다. 특히 9월 3일 경기에서는 8월 하순부터 비틀거리던 LG를 5연패로 몰아넣으면서 반전 드라마를 준비했다.


LG는 8월 19일까지만 하더라도 시즌 58승2무36패(승률 0.615)로 1위 해태(62승1무34패)에 3게임차로 따라붙어 선두탈환까지 노리던 팀이었다. 그런데 이후 5연패, 1승 다음에 다시 5연패. 11경기에서 1승10패의 난조 속에 시즌 59승2무46패로 3위로 내려앉았다. 반면 OB는 9월 3일 LG를 잡고 시즌 57승5무48패로 4위로 도약했고, 3위 LG에도 2게임차로 따라붙었다.


LG가 9월 한 달 동안 7승1무14패(승률 0.341)로 내리막길을 걷는 사이, OB는 월간 12승7패(승률 0.632)로 반등하며 최종일의 기적을 완성했다.


정규시즌 마지막 3연전은 극적이었다. LG가 3연패를 한 반면 OB는 3연승으로 마침내 순위가 뒤바뀌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최종전을 하루 앞둔 9월 27일, OB가 LG와 시즌 마지막 맞대결을 펼쳤다. 여기서 OB가 5-2로 승리하며 마침내 공동 3위로 도약했다.


OB는 65승5무55패, LG는 66승3무56패. 현재처럼 승률 계산 시 무승부를 버리는 계산법이라면 OB가 0.542의 승률로 LG(0.537)에 앞서 단독 3위가 됐겠지만, 당시엔 승률 계산 시 무승부를 버리지 않았다. 1무를 0.5승과 0.5패로 더한 뒤 게임수로 나눴다. OB와 LG의 성적은 사실상 67.5승 57.5패로 계산해야 했던 것. 그렇다 보니 승률은 0.540으로 같아져 공동 3위가 됐다.


9월 28일 시즌 최종전 결과에 운명이 달렸다. OB는 인천에서 태평양을 상대로 0-2로 끌려가다 2-2 동점을 만든 뒤 5회초 김상호의 결승 투런홈런 등으로 3점을 뽑아내 5-4로 극적인 역전을 거뒀다. 김경원은 마지막 3.1이닝을 2안타 2볼넷 6탈삼진 무실점으로 막고 값진 세이브를 올렸다.


반면 LG는 대전에서 빙그레를 상대로 실책 등이 겹치며 4-5로 패하고 말았다. 인천과 대전에서 똑같은 스코어 5-4가 나왔지만, OB는 이겼고 LG는 졌다.


이로써 정규시즌 126경기 최종 성적은 OB 66승5무55패(승률 0.544), LG 66승3무57패(승률 0.536). 시즌 중반까지 6위를 맴돌던 OB는 8월 18일 태평양전 승리로 4위로 올라섰고, 결국 LG에 1경기차로 앞서며 단독 3위로 정규시즌을 마감하는 기적을 만들었다. 개막 이후 172일 동안 줄곧 LG에 뒤지다 단 하루 단독 3위에 올랐는데, 그것이 시즌 최종 성적이었다.


OB가 페넌트레이스 전체 성적을 기준으로 단독 3위에 오른 것은 1984년 이후 9년 만이며, 포스트시즌 진출은 1987년 이후 6년 만의 감격이었다. 5년간의 기나긴 암흑기를 벗어난 것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곰 특유의 끈기와 뒷심이 부활한 점이었다. 비로소 베어스다운 야구를 하기 시작했다.



찬란한 ERA 1.11KBO 역사에서 선동열 다음 가는 기록

하체를 끌고 나가는 투구폼과 묵직한 구위가 일품이었던 김경원 ⓒ두산베어스


1993년의 김경원은 강한 임팩트를 남겼다. 시즌 126경기 체제에서 48경기에 등판했다. 6월 3일 잠실 롯데전 더블헤더 제2경기에 선발등판(4이닝 1실점)한 것을 제외하면 47경기에 구원등판했다.


데뷔 시즌 성적은 9승3패23세이브. 당시 구원 부문은 구원승과 세이브를 합친 ‘세이브포인트’로 집계했는데 김경원은 32세이브포인트로 해태 선동열(42세이브포인트)에 이어 LG 김용수와 공동 2위에 올랐다. 팀의 66승 중 김경원은 절반에 가까운 32승에 관여한 셈이었다.


김경원은 기본적으로 7회부터 등판해 세이브를 기록하기는 일이 잦았다. 심지어 6회부터 마무리로 나서 세이브를 올리기도 했다. 구원 투수인데 129.1이닝을 던져 규정이닝까지 채웠다. 놀라운 것은 17실점 16자책점으로 평균자책점 1.11을 기록했다는 사실. 그해 선동열이 KBO 역사상 최저 기록인 0.78을 기록하는 바람에 2위에 랭크됐지만 모두가 놀란 수치였다.


평균자책점 1.11. KBO리그 역사상 선동열이 3차례 0점대 평균자책점(1986년 0.99-1987년 0.89-1993년 0.78)을 기록한 것을 빼면 지금까지 그보다 낮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투수는 아무도 없다. 다시 말해 역대 4위의 기록이다.


만약 선동열이라는 인물이 KBO 역사에 없었더라면, 김경원의 1993년 1.11 평균자책점은 역대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인 셈이다. 선동열은 불세출의 투수였고, 1993년의 김경원은 선동열 다음 가는 투수로 역대급 위력을 떨쳤다고 보면 된다.


김경원은 많은 구종을 던지는 투수도 아니었다. 140㎞ 중후반의 빠른 볼과 슬라이더의 ‘투피치 투수’였다. 바깥쪽 승부 일변도였지만, 낮고 묵직하게 깔려오는 공에 타자들의 방망이는 알고도 당하기 일쑤였고, 쳐도 밀리기 일쑤였다.


3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에 성공한 에이스 김상진 ⓒ두산베어스


그해 OB는 10승 투수를 대거 탄생시켰다. 김상진이 11승을 올리면서 연습생 투수 최초로 3년 연속 10승 투수가 됐고, 베테랑 장호연은 10승으로 2년 연속 10승을 거두며 명성을 이어갔다. 1992년 2차 1라운드 지명 투수 권명철이 데뷔 2년 만에 10승 투수로 도약한 것도 반가웠지만, 1991년 성남고 졸업 후 곧바로 데려온 강병규가 데뷔 3년 만에 마침내 10승을 올린 점이 눈길을 모았다.


OB가 한 시즌에 10승 투수를 무려 4명이나 배출한 것은 구단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기에 노장 박철순이 3년 연속 7승으로 팀 마운드에 불사조의 기운을 불어넣은 것도 고무적이었다.


OB는 그러면서 그해 팀평균자책점 2.88로 1위를 차지했다. 전년도 4.21에서 1.33이나 낮췄다. OB가 팀평균자책점 1위에 오른 것은 1986년(2.61)에 이어 7년 만이었다. 10승 투수를 4명 배출한 것도, 팀평균자책점 1위에 오른 것도 철벽 마무리 ‘김경원 효과’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부터 OB가 계산된 야구를 할 수 있었어요. 그전까지만 해도 앞서고 있다가 막판에 뒤집힌 경기가 부지기수였죠. 그러다 보니 투수를 어떻게 써야할지 계산을 할 수 없었어요. 윤동균 감독도 비로소 계산이 서는 야구를 하기 시작한 거죠. 오늘은 3점을 내는 게임이다, 1점 승부다, 이런 걸 계산하고 선수 기용과 작전을 구상할 수가 있었어요. 뒤에 김경원이 있으니까 가능했던 거였죠.”

구경백 사무총장은 김경원 입단 효과를 이렇게 설명했다.


타선에서도 베테랑들이 힘을 냈다. 김형석이 147안타로 OB 역사상 최초로 안타왕에 올랐고, 김광림(0.300)이 3할 타자로 복귀했다. 타점 부문에서도 김형석(62타점), 김상호 이명수(56타점)가 10위 안에 포함됐다.


1992년 김광수의 은퇴 후 마침내 주전 2루수와 2번타자 자리를 차지한 5년생 이명수의 화려한 변신도 반가운 대목이었다.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한 채 연습생처럼 들어와 계약금과 연봉 1000만 원의 헐값에 입단한 김민호가 유지훤 이후 적임자를 찾지 못하던 유격수에 자리 잡은 것도 1993년의 최대 수확이었다. 왼손투수와 기동력만 보강된다면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는 팀이 만들어졌다.



암흑기 사상  LG 덕아웃 시리즈 추억


사상 첫 서울팀간 포스트시즌. 잠실야구장 1루와 3루 덕아웃만 바꿔서 치르는 일명 ‘덕아웃 시리즈’가 성사됐다.


3전 2선승제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 선발투수로 OB 윤동균 감독은 3년 연속 10승을 기록한 ‘배트맨’ 김상진을, LG 이광환 감독은 9월에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며 상승세를 탄 김태원을 내세웠다.


1회말 OB는 선취점을 뽑았다. 그러나 1개의 볼넷과 3안타를 날렸지만 대량득점 대신 1점을 얻는 데 그친 점이 아쉬웠다. 선두타자 김광림이 볼넷을 골라나간 뒤 투수 견제구에 걸려 아웃됐고, 1사 후 연속 안타로 만들어진 1·3루에서 중전 적시타를 때린 김상호가 포수 김동수의 견제로 런다운에 걸린 사이 3루주자 김형석이 홈을 파고들다 아웃되면서 찬물을 끼얹었다.


어쩌면 이 장면이 준플레이오프 전체 승부의 분수령이 됐는지 모른다. 4회초 LG 공격 때 무사 2·3루에서 노찬엽의 좌익수 깊숙한 희생플라이로 1-1 동점이 됐다. 이어 김상훈의 내야땅볼이 2루수 이명수 앞에서 불규칙 바운드되며 튀어 올라 우익수 쪽으로 달아났다. 공식기록은 2루수 실책. 이것이 결국 2-1로 끝난 1차전 결승점이 되고 말았다.


김상진의 8이닝 2실점 호투 후 뒤집기를 노리며 투입한 김경원이 9회초 등판해 1이닝 무실점으로 막았지만, OB 타선은 김태원(8.2이닝 1실점)과 김용수(0.1이닝 무실점)를 넘어서지 못했다.


벼랑 끝에 몰린 OB는 2차전 선발투수로 이광우 카드를 빼들었다. 시즌 동안 중간계투로 활약했지만 LG 킬러의 면모(정규시즌 3승1패1세이브)를 보인 우완투수였다. LG는 예상했던 대로 2선발 우완 정삼흠을 투입했다.


1993년 준플레이오프 2차전 선발 중책을 맡은 OB베어스 투수 이광우 ⓒ두산베어스


양 팀의 승부는 단 1점으로 갈라졌다. 4회초 OB 공격. 이명수가 전날 실책을 만회하려는 듯 1사 후 정삼흠의 주무기 슬라이더를 받아쳐 우중간을 뚫는 3루타를 날렸다. 이어 시즌 최다안타 김형석이 중전 적시타를 터뜨려 1-0 리드를 잡았다.


OB는 4회말 무사 1·2루 위기를 맞았다. 타석에는 LG에서 가장 날카로운 방망이를 휘두르는 ‘검객’ 노찬엽. 이광우가 병살타를 유도했다. 그러자 윤동균 감독은 지체 없이 김경원을 호출했다.


2사 3루에서 이병훈을 삼진으로 돌려세운 김경원은 묵직한 강속구로 LG 타선을 막아나갔다. 9회까지 5.1이닝 2안타 무실점으로 틀어막고 1-0 승리를 지켜냈다.


이날은 윤동균 감독의 결혼 20주년 기념일. 윤 감독은 이날 감독으로서 포스트시즌 첫 승이자 마지막 승리를 거뒀다(윤 감독의 가을잔치 마지막 승리가 된 것은 3차전에서 패한 데다 1994년 예상치 못한 선수단 집단이탈 사태가 발생하면서 지휘봉을 내려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3차전에서 LG는 소방수 김용수를 선발로 내는 파격적인 승부수를 던졌다. 시즌 내내 단 한 번도 선발로 등판하지 않았던 투수였다. OB는 원년 우승의 영웅 ‘불사조’ 박철순 카드를 꺼내 들었다. 부산에 사는 부친의 교통사고 소식을 들었지만 눈물을 머금고 마운드에 섰다.


훗날 양 구단 영구결번의 주인공이 되는 간판스타 맞대결이어서 그 자체로 흥미 만점이었다.


김용수가 먼저 무너졌다. 3회에 이명수에게 적시 3루타를 맞고 선취점을 내주자 LG는 4회부터 차동철로 교체했다. 박철순도 5회초 2사 2·3루 위기에 몰렸다. 그러자 윤동균 감독은 다시 전가의 보도처럼 김경원을 호출했다. 여기서 유격수 김민호의 실책으로 1-1 동점을 허용하고 말았다.


OB는 돌아선 5회말 김상호의 솔로홈런으로 7회까지 2-1로 앞서나갔다. 8회와 9회만 막으면 플레이오프 진출. 하지만 메이저리그 명포수 출신 요기 베라의 명언처럼 야구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김경원이 하루를 쉬었다고는 해도 1~2차전 연투를 했고, 특히 2차전에서 5.1이닝을 던졌다.


8회초 LG 선두타자 송구홍이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김경원을 상대로 좌전안타로 나갔다. 1루 견제 악송구와 박종호의 볼넷 등으로 만들어진 1사 1·2루. 김상훈의 동점 우전 적시타, 김동수의 역전 좌전 적시타가 연이어 터졌다. 여기서 김상진이 구원등판했지만 박준태의 우전 적시타, 노찬엽의 중견수 희생플라이까지 나오면서 OB는 한꺼번에 4점을 내줬다. 스코어는 단숨에 5-2로 벌어졌다.


OB는 6회부터 구원등판한 LG 김태원에게 하나의 안타도 때리지 못하고 끝내 9회말까지 무득점에 그쳤다. 1승2패로 허무한 탈락. 윤동균 감독은 경기 후 라커룸에서 북받치는 울음을 삼킨 뒤 기자회견에 나서 “경원이를 당초 7~8회 정도에 투입할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조급했다”고 자책하면서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힘을 길러 내년에 다시 한번 도전하겠다”는 소감을 밝혔다.


사실 맞은편 LG 이광환 감독은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면 사퇴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이날 승리로 인해 계속 지휘봉을 잡았고, 1994년 신바람 야구로 우승까지 이끌게 됐다.



부상과 불운1993년의 김경원은 돌아오지 않았다

김경원(왼쪽)과 장호연 ⓒ두산베어스


1993년 구세주처럼 등장해 특급 마무리로 팀을 3위로 끌어올렸던 김경원은 그러나 1994년 개막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사우나에서 목욕을 하다 넘어져 손바닥을 다쳤다는 게 OB 구단의 설명이었다. 언론에도 그렇게 보도됐다. OB에게 어쩌면 1994년 다시 먹구름과 폭풍우가 몰려오는 복선이었는지 모른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았어요. 사춘기가 늦게 왔는지, 그때 이런저런 반항심이 많이 생겼죠. 2년생 징크스인지 스프링캠프와 시범경기까지 치렀는데 공도 안 나오고 몸도 안 올라오니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나도 모르게 방 유리를 오른손으로 쳤어요. 손에 유리 파편이 박혔죠. 회복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고요.”


김경원은 1994시즌 개막 후 한 달 이상을 허송세월한 아픈 기억을 더듬었다. 5월 중순 복귀를 했지만 컨디션이 빨리 올라오지 않았다. 6월부터는 몸과 구위가 비로소 돌아오는 듯했다.


그런데 다시 불운이 닥쳤다. 인천 태평양전에서 1루 커버를 하다 엉겁결에 오른발로 베이스를 더듬는 바람에 베이스 위를 밟고 미끄러졌다. 1루로 전력질주하던 태평양 이근엽이 안간힘을 쓰며 다리를 쭉 뻗어 공중에 떴다 베이스에 착지하는 순간 사고가 났다. 이근엽의 스파이크 징에 발등을 찍히고 만 것. 이근엽 잘못이라기보다는 김경원의 실수였다.


발등이 7~8㎝ 길이로 찢어졌고, 부상 깊이도 1.5㎝가량이나 됐다. 발등에서 피가 솟구쳤다. 그 길로 사실상 시즌이 마감됐다. 그해 성적은 19경기 1승2패4세이브, 평균자책점 4.95. 9월에 복귀했지만 선수단 무단이탈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시즌을 마무리하고 말았다.


김경원은 격년제처럼 홀수해와 짝수해에 번갈아 부활과 부진을 반복했다. OB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1995년은 그나마 부활한 시즌이었다. 그러나 하체를 끌고 나가는 투구폼인데, 무릎 통증과 발등 부상 여파로 하체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 체력과 공끝이 무뎌졌다. 김인식 감독은 김경원 단독 마무리 대신 1993년 입단한 이용호(3승5패10세이브)와 더블 스토퍼 체제를 꾸렸다. 김경원은 그해 6승3패15세이브, 평균자책점 2.93을 기록했다.


1996년엔 무릎 부담 속에 3승7패9세이브, 평균자책점 3.42로 부진했다. 그해 5월 3일 잠실 LG전에서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9회초 김상호의 솔로홈런으로 3-3 동점이 만들어진 상황에서 9회말 등판했다가 LG 선두타자 김재현에게 초구에 끝내기 홈런을 맞은 것. KBO 역사상 최초로 ‘1구 패전투수’라는 기록을 세웠다.


1997년 3승2패24세이브, 평균자책점 1.96의 호성적을 올렸다. 우리가 알던 김경원의 모습으로 돌아온 듯했다. 그러나 그런 모습도 그해가 마지막이었다.


1998년 6승6패5세이브 평균자책점 3.02로 평범한 성적을 거뒀고, 1999년 5월 15일엔 한화 홍원기 전상열과 2대 1 트레이드로 정든 OB를 떠나 대전으로 내려갔다.


한화에서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로 반지를 끼기는 했지만 별다른 활약은 없었다. 한때 우상이던 박철순의 최고령 투수 기록들을 깨는 것이 목표였던 김경원은 2001년을 끝으로 만 30세에 유니폼을 벗고 말았다.


김경원은 은퇴 후 2003년 춘천고 코치를 시작으로 대전고 코치, 안산공고 코치, 경찰청 코치로 후진을 양성했다. 2012년 두산 코치와 전력 분석요원으로 활약하다 다시 군산상고과 경찰청 코치로 활동했다. 최근 서울 구의동에 자신의 이름을 딴 레슨장 ‘김경원 투수 아카데미 스트라이크’를 열고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다.


1993년. 한 번이었지만 누구보다 찬란하게 타올랐던 불꽃 시즌이었다. 우리는 김경원을 그렇게 기억한다. 김경원은 당시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1993년은 야구하고 나서 가장 빛났던 시절이었어요. 그땐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으니까요. 가끔씩 만나는 팬들도 항상 1993년 이야기를 해요. 저도 1993년을 발판으로 해서 선동열 선배의 0점대 평균자책점 기록을 깨보고 싶다는 목표를 세우기도 했지요. 비록 깨지는 못했지만 그런 꿈이 있었기 때문에 행복했던 시절이지 않았나 싶어요.”


꿈만 같았던 그 시절이 꿈 같이 지나갔다. 추억의 책장 너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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