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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국 Mar 06. 2023

[45] 선수단 집단이탈…비극으로 끝난 1994년


1994년에 앞서 거의 모든 전문가와 언론에서는 OB 베어스를 우승 전력이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OB는 그해 시범경기에서 5승1패로 단독 1위에 올랐다. 예나 지금이나 시범경기 성적이 정규시즌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OB로서는 시즌에 앞서 희망을 노래할 만한 요소가 많았다.


그러나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듯, 야구 역시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OB 베어스에게 1994년은 크나큰 변화를 겪는 해였고, 구단 역사에서 가장 아픈 상처를 남긴 시즌이 되고 말았다.


[베팬알백] 45번째 주제는 1994년 선수단 집단이탈이 발생한 격동과 파란의 1994년 이야기다.


불의의 부상으로 개막 엔트리에서 빠진 마무리 김경원 ⓒ두산베어스


김경원 부상 이탈예상치 못한 불운의 시작


OB는 부푼 가슴으로 출항을 하려던 순간, 예상치 못한 폭풍우를 만나고 말았다. 1994시즌 불운의 전주곡이자 먹구름의 암시 같은 뉴스였다.


개막 열흘 전 김경원의 부상 소식이 들렸고, 결국 개막 엔트리에서도 제외돼야만 했다. 구단은 “목욕탕에서 넘어져 손바닥을 다쳤다”는 언론 발표용 설명을 했지만, 실제로는 김경원이 집에서 오른손으로 방 유리를 내리치다 손에 유리 파편이 박히는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김경원은 이에 대해 [베팬알백] <42편>에서 “사춘기가 늦게 왔는지 이런저런 반항심이 생겼다”면서 “2년생 징크스인지 스프링캠프와 시범경기까지 치렀는데 공도 안 나오고 몸도 안 올라오니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OB는 이런 악재 속에서도 ‘개막전의 팀’ 답게 일단 4월 9일 잠실에서 열린 1994시즌 개막전에서 쌍방울에 4-3으로 승리하며 산뜻한 출발을 했다. 3-3으로 맞선 8회말 대타 박현영의 적시타와 박철순의 구원승 속에 거둔 승리여서 더욱 값졌다.


박철순 ⓒ두산베어스


개막 이튿날인 10일엔 김영삼 대통령 부부가 휴일을 맞아 잠실구장을 찾아와 경기를 관전했다. 1982년 동대문구장에서 열린 원년 개막전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시구를 한 적은 있지만, 그 이후 현직 대통령이 야구장을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잠실구장 개장 후 최초의 대통령 방문이기도 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대통령이 야구장에 뜨는 것은 이례적인 일.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양 구단의 구단주들까지 총출동하자 구단 관계자들은 물론 선수단도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 대통령의 야구장 나들이는 그만큼 큰 이슈였다.


양 팀 선수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통령과 구단주들 앞에서 뭔가 보여주려는 듯 마치 한국시리즈 7차전처럼 싸웠다. 요즘이라면 외부 환경에 신경 쓰지 않고 짜놓은 플랜대로 경기를 운영했겠지만, 두 팀은 예정에 없던 필승 카드들을 쏟아부으며 승리를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


쌍방울 한동화 감독은 김원형을 비롯해 에이스급 투수 3명을 투입했고, 5회에는 트리플스틸을 성사시키는 묘기 대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OB는 선발 장호연이 5-1 리드를 잡자 또 다른 선발 요원 강병규 카드까지 꺼냈고, 김익재 구동우 홍우태 등으로 맞섰지만 허무하게 5-8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OB에겐 불행의 시작이었다.


여기에 시즌 초반부터 장호연 권명철이 자신의 페이스를 찾지 못했고, 이광우도 전열에 가담하지 못했다. 포수 박현영과 2루수 이명수마저 부상으로 이탈했다.


5월 12일까지 5할 승률 안팎을 기록하며 그나마 4위를 유지했으나, 13일 전주 쌍방울전부터 20일 청주 한화전까지 5연패를 당하며 8개 구단 중 7위로 내려앉았다. 5월 26일 인천 태평양전부터 31일 잠실 LG전까지 또다시 5연패의 늪에 빠졌다. 5월 들어 두 차례나 반복된 5연패가 OB의 초반 레이스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반면에 당초 전력이 약화돼 하위권으로 평가받았던 LG는 예상을 뒤엎고 신바람을 내며 선두 질주를 이어갔다. 유지현-김재현-서용빈 신인 3총사의 돌풍과 해태에서 트레이드해 온 한대화가 해결사로 부활하면서 1위로 치고 나갔다.


OB는 5월말까지 17승25패로 승패마진이 -8로 불어났다. 쌍방울(14승1무26패)이 있었기에 꼴찌는 면했지만, 이미 1위 LG(29승13패)와는 12게임차까지 벌어졌고 4위 삼성에도 4게임차로 밀려났다.

설상가상으로 4월 말에 복귀해 조금씩 구위를 찾아가던 김경원이 6월 또다시 부상으로 쓰러졌다. 인천 태평양전에서 1루로 베이스 커버를 하다 1루로 전력질주하던 태평양 타자 이근엽의 스파이크에 발등을 찍히면서 사실상 시즌을 마감해야 하는 불운을 겪었다.


계약 만료의 해를 맞이한 OB 윤동균 감독은 뭔가에 쫓기는 듯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매일 라인업이 바뀌고, 선수들의 플레이를 질책하는 일이 잦았다. 감독과 선수들의 불협화음이 곳곳에서 감지되기 시작했다.


시즌 중반을 들어서는 시점에서 OB 구단은 감독 교체와 재계약을 놓고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OB는 6월 어느 날 윤 감독에게 재계약 언질을 했다. 윤 감독의 조급증도 해소시켜 줄 수 있고, 감독의 손을 들어주는 모양새가 되면 선수단 통솔에도 힘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OB는 반등은커녕 6월말부터 7월 하순까지 또다시 5연패를 두 차례나 반복하면서 포스트시즌 진출 레이스에서 이탈하게 됐다.


선수단 집단이탈베어스의 뼈아픈 상처

1994시즌 태평양전에서 안타를 친 김형석 ⓒ두산베어스


시즌이 종착역으로 다다르던 9월 4일. OB는 군산구장에서 열린 쌍방울전에서 1-2로 역전패했다. 8월말부터 3연패 후에 1승, 4연패 후 1승을 했지만 이날 다시 지고 말았다. 시즌 성적은 50승1무63패. 4위 한화에도 9게임차나 뒤졌다.


윤동균 감독은 갈수록 흐트러져 가고 있는 팀 기강을 다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쌍방울전에서 역전패한 뒤 버스를 타고 숙소인 전주 코아호텔로 이동하던 중 최주억 수석코치에게 “도착 즉시 2층에서 미팅을 갖겠다”고 말했다. 최 수석코치는 감독의 뜻에 따라 선수들을 연회장으로 집합시켰다.

“너희들은 게임하는 자세가 글러먹었다. 오늘은 내가 매를 좀 들어야겠다.”


윤 감독은 최 코치에게 야구방망이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 시절 운동부 선배가 후배들을 집합시켜 단체 얼차려를 주고 물리적 폭력을 가하는 것은 전통처럼 내려온 악습. 아마추어뿐만 아니라 프로 초창기에도 선수단 내에서는 그런 일이 종종 벌어졌다. 다만 감독이 직접 나서서 매를 들고 단체 군기를 잡는 것은 프로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주장 나와.”


본보기로 주장인 김상호부터 불렀다.


“저희도 최선을 다했지만 경기가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못 맞겠습니다.”


김상호가 반발했다.


“그래? 그럼 김형석 나와.”


“저도 못 맞겠습니다.”


“좋다. 맞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 일어서 봐.”


박철순을 비롯해 선참 선수들이 하나둘씩 일어서기 시작했다.


윤 감독은 흥분된 목소리로 옆에 있던 최주억 수석코치에게 “최 코치, 얘들 저녁 먹여서 서울로 올려 보내시오. 이번 일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라고 말한 뒤 밖으로 나가버렸다. 


곰 이미지와 가장 흡사했던 캐릭터의 윤동균 ⓒ두산베어스


사실 시즌 중에도 감독과 선수단 사이에 균열의 조짐은 나타나고 있었다. 감독은 선수들에게 더 강한 드라이브를 걸었고, 선수들은 감독의 지휘 방식에 불만을 품었다. 게임이 풀리지 않자 감독이나 선수들이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윤 감독은 원년 우승 멤버로 선수단의 맏형 같은 존재였다. 남자다운 풍모에다 구단이나 후배들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 선수 시절에는 그것이 리더십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과유불급. 의욕이 지나친 나머지 선수들을 후배로 보고 강압적으로 끌고 가려고 한 게 문제였다.


결국 OB 선수단 17명은 숙소를 집단 이탈했다. 감독이 홧김에 코치에게 “서울로 보내”라고 한 것이지만, 선수들은 감독의 그 말을 곧이곧대로 실행했다. 전주에서 삼삼오오 택시를 타고 대전역에 모인 뒤 다시 열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잠실운동장에 주차된 차를 타고 집에 들어간 선수들은 다음날 다시 잠실야구장 앞에 모였다가 양평 플라자콘도로 거점을 옮겨 윤동균 감독의 퇴진을 요구하며 집단 농성을 벌였다.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OB는 선수 부족으로 2군 선수들을 불러올려 1군 잔여경기를 소화해야 했고, 시즌 도중 재계약 언질까지 받았던 윤동균 감독은 사건 발생 5일 후인 9일 OB 구단사무실을 방문해 결국 사퇴의사를 밝혔다.


『윤동균 감독이 사의를 표명했다. 선수단 집단이탈사태로 곤경에 처해 있던 윤 감독은 9일 상오 구단사무실을 방문, 경창호 사장에게 최근의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는 뜻을 전했다. (중략) 윤 감독은 “폭력 감독이라는 누명은 벗고 싶다”며 “어쨌든 팀에 합류하지 않은 박철순, 김형석 등 고참선수 5명이 다치지 않고 계속 야구를 했으면 좋겠다. 팀을 떠났던 후배들이 내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세월이 지나면 내 마음을 알 것이다”라며 눈물까지 글썽였다.』 <1994년 9월 10일자 스포츠서울>


팬들에게 공을 던져주는 윤동균 ⓒ두산베어스


‘백곰’ 윤동균은 1982년 3월 27일 KBO 출범 공식 개막전에 앞서 6개 구단 선수 대표 선서를 한 역사적인 인물이다. 1989년에는 KBO 선수 최초로 은퇴식과 은퇴경기를 했고, 1992년부터는 KBO 선수 출신 최초로 감독 자리에 오른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윤 감독은 원년 우승의 꿈을 재현하지 못하고 9월 14일 공식적으로 구단에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OB 구단과 13년 인연을 정리하게 됐다.


선수단 집단 이탈은 OB 베어스의 간판스타였던 윤 감독의 퇴진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상처를 남겼다.


박철순 장호연 김형석 김상호 강영수 등 선수단 집단이탈 사태의 주동자로 꼽힌 선참 5명은 시즌 종료까지 79일간 연봉지급정지라는 징계를 받았다. 아울러 강길용 김상진 이광우 권명철 김익재 박현영 김종석 이종민 안경현 임형석 추성건 김종석 등 단순 가담자 12명은 연봉의 5%를 벌금으로 공제당했다.


그 과정에서 김형석의 연속경기출장 기록이 622경기에서 중단됐다. MBC 청룡의 ‘베트콩’ 김인식이 원년부터 1987년까지 606연속경기출장 기록을 세웠는데, 김형석은 이를 넘어 신기록을 계속 연장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1989년 9월 24일 인천 태평양전(더블헤더 제2경기)부터 이어오던 연속경기 출장 행진은 9월 4일 군산 쌍방울전을 끝으로 마감되고 말았다. 김형석의 기록은 훗날 쌍방울과 SK에서 활약한 ‘철인’ 최태원이 깬 뒤 1009경기(1995년 4월 23일 잠실 OB전~2002년 9월 8일 문학 현대전)로 늘리게 된다.


아울러 거포 강영수는 집단 이탈 17명 중에서 유일하게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대구상고 선배인 태평양 정동진 감독의 요청에 OB 구단이 무상 트레이드로 보내줬다.


OB는 126경기에서 53승1무72패(승률 425)의 전적으로 1994시즌을 마감했다. 8위 쌍방울이 압도적으로 저조한 성적(47승5무74패)에 그쳐 7위의 순위표를 받았지만, 시즌 개막에 앞서 우승 후보로 꼽혔던 것을 떠올리면 사실상 꼴찌나 다름없었다. OB에겐 상처만 남은 1994년이었다.


그러나 비 온 뒤에 땅이 굳듯 참혹했던 상처에 굳은살은 박이고, OB는 아픔의 마디를 딛고 1995년 누구도 꿈꾸지 못한 ‘미러클 베어스’ 신화를 만들어낸다. 김인식 감독이 부임하면서 그 기적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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