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김 감독, 어디야?”
OB 베어스 강남규 스카우트 부장의 전화였다.
“선배님, 전 대구에 와 있습니다.”
스포츠서울 객원기자로 활동하고 있던 김인식 전 쌍방울 감독은 야구 선배인 강남규 부장이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오자 관전평을 쓰기 위해 대구로 출장을 와 있다고 설명했다.
“그럼 서울엔 언제 올라오나?”
“오늘 경기 관전평 쓰고 내일 아침에 서울로 올라갑니다.”
“괜찮으면 내일 서울에서 좀 만났으면 좋겠는데.”
“무슨 일 있나요?”
“자세한 건 내일 직접 만나서 얘기하자고. 관세청사거리 영동우체국 쪽에 ‘14세기’라는 레스토랑이 있어. 거기서 점심이나 하자고.”
“마침 제가 내일 오후 그 근처로 갈 일이 있었습니다. 그럼 내일 뵙도록 하겠습니다.”
전화를 통해 두 사람의 대화가 오간 것은 1994년 페넌트레이스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9월 17일. 이날 대구시민운동장야구장에서는 4강을 포기할 수 없는 5위 삼성이 단독 선두를 질주 중인 LG를 불러들여 경기를 치르고 있었다.
상위권 팀들이 포스트시즌 진출의 꿈을 그리며 안간힘을 쓰고 있던 당시, OB 구단은 매우 어수선했다. 1994년 9월 4일 시즌 도중 선수단 집단이탈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고, 열흘 만인 14일에 윤동균 감독이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페넌트레이스를 6경기 남겨둔 시점이었다.
OB로선 7위로 내려앉아 포스트시즌은 이미 물 건너간 상황. 창단 후 최대 위기에 빠진 OB 구단은 일단 최주억 코치를 감독대행으로 올려 남은 6경기를 소화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집단이탈에 가담한 17명의 선수는 구단 자체 징계를 기다리며 전열에서 제외돼 있었고, 2군에서 올린 선수들로 엔트리를 채워 나머지 경기를 소화해야 했다.
OB 구단 프런트는 선수단과는 별개로 분위기를 수습하고 다음 시즌을 준비할 차기 감독 선임 작업을 서둘렀다.
[베팬알백] 44번째 주제는 OB 베어스의 제6대 사령탑 김인식 감독 선임 과정 얘기다. 김 감독은 OB 베어스와 두산 베어스 시대를 관통하는 감독으로, 2003년까지 무려 9시즌 동안 팀을 이끌어 지금까지 베어스 역사상 최다 시즌을 지휘한 감독으로 남아 있다.
●김응용과 동급대우…6대 사령탑 김인식 감독 계약 '막전막후'
강남규 부장은 1939년생으로 1947년생의 김인식보다 8살 많은 야구 선배였다. 휘문고 시절이던 1958년 5월 25일 제13회 청룡기 서울시 예선 서울공고전에 선발등판해 해방 후 최초의 퍼펙트게임을 달성한 전설적인 투수 출신. KBO 운영부장으로 근무하다 1987년 2월에 OB의 제의를 받고 최초로 프로구단의 전문 스카우트 부장이라는 직책을 맡게 된 인물이기도 하다. 초창기 선수육성에 가장 앞장섰던 OB 구단이 스카우트 분야에서도 또 하나의 최초 기록을 썼다.
김인식은 1990년 쌍방울 레이더스 창단 감독에 오른 뒤 1992시즌을 끝으로 지휘봉을 내려놓고 야인으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1993년부터 2년째 스포츠서울 객원기자로서 신문에 관전평을 쓰며 야구판 전체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훑어보고 있었다.
김인식은 통화를 한 다음날 서울로 올라와 약속된 장소로 나갔다. OB 베어스 스카우트 부장인 강남규 선배가 나와 있었다. 그 옆에 안면이 없는 이가 함께 앉아 있었다. 김의식 총무부장이라고 했다.
“김 감독도 아시다시피 지금 우리 팀 분위기가 많이 안 좋은 상황이야. OB 감독을 맡아줬으면 좋겠어. 우리 구단에서는 김 감독이 이 위기를 수습할 적임자라고 결론을 내렸어. 그래서 오늘 계약을 하고 싶어 이렇게 만나자고 했던 거야.”
강 부장이 전날 김인식에게 전화를 걸어왔던 건 결국 OB 베어스 감독직을 제의하기 위해서였다. 김의식 총무부장은 아예 계약서까지 들고 와 있었다.
OB 구단으로선 모든 요구를 다 들어줄 듯한 태도였다. 대우도 당시 해태 김응룡 감독과 한화 강병철 감독과 같은 국내 최고 수준으로 제시했다. 김인식이 몇 가지 조건들을 요구했지만 계약에 걸림돌이 될 부분은 없었다. 세부적인 부분은 추후에 논의해도 될 만한 것들이었다.
김인식도 그 전부터 관전평을 쓰면서 OB를 지켜본 결과 매력적인 팀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팀 분위기만 만들면 전력 면에서 해볼 만한 팀으로 봤다. 일사천리로 얘기가 진전됐다.
“자자, 이제 식사도 끝났으니 우리 차나 한 잔 하러 갑시다.”
강 부장 일행은 기분 좋은 목소리로 김인식 감독을 다음 장소로 안내했다.
곧바로 강남의 한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OB 베어스 경창호 사장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강 부장이 김인식 감독과 계약에 합의하면 이곳으로 모셔오는 걸로 동선을 미리 짜놓았던 것이었다.
“감독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경 사장은 김인식 감독에게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했다.
『김인식 전 쌍방울 감독이 OB의 새 지휘봉을 잡았다. 프로야구 OB 구단은 21일 김인식 씨와 계약기간 3년, 계약금과 연봉 각 7천만 원에 감독직 계약을 했다. 이는 해태 김응룡, 한화 강병철 감독이 받는 액수와 같은 수준으로 프로야구 감독 중 최고액이다. 김 감독은 22일 선수들과 상견례를 가진 뒤 팀에 합류하며, 페넌트레이스 종료와 함께 시작되는 마무리훈련부터 본격적인 지도에 나선다. OB 구단은 지난 4일 박철순 등 주전 17명이 윤동균 전 감독의 지도방법에 불만을 품고 팀을 이탈하자 지난 14일 윤동균 감독의 사표를 수리하고 최주억 코치 체제로 팀을 꾸려왔다.』 <1994년 9월 22일자 동아일보>
●“김인식밖에 없다”…OB 구단의 내부 회의
OB 구단이 새 사령탑으로 김인식을 발 빠르게 선임한 데에는 “이 위기를 수습할 적임자로는 사실상 김인식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구단 내부 회의를 한 결과 신기할 정도로 이견이 없었다.
“당시 경창호 사장 이하 팀장급들이 차기 감독 후보들을 놓고 회의를 했어요. OB는 초창기부터 다른 구단과 달리 야구인들을 프런트 요원으로 많이 중용했는데 중요한 정책이나 방향 등을 결정할 때 야구인들의 의견을 많이 들어줬죠. 그때 윤동균 감독 후임 후보로 자천타천 이름들이 언급됐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반대 의견이 나왔지만 김인식 감독에 대해서는 모두 찬성을 하더라고요. 당시 야구계에서 김인식을 싫어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사실상 이견 없이 김인식 감독 한 분으로 압축이 됐죠.”
정희윤 당시 홍보팀장의 기억이다. 1983년 OB 베어스에 입사한 뒤 1998년까지 OB 프런트에서 희로애락을 함께한 그는 현재 콘텐츠 프로덕션인 ‘노사이드 스튜디오’ 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감독 선임 시 늘 그렇지만 당시에도 많은 이들이 감독 후보 물망에 오른 건 사실이다. 선수단을 강하게 휘어잡을 수 있는 백인천 감독도 살짝 거론되기는 했지만 이내 반대에 부딪쳤다. 전임 윤동균 감독이 강한 리더십으로 선수들을 이끌다 반발을 불러일으켰는데 강성 이미지의 백 감독 카드를 선택하기는 쉽지 않았다. 잠실 라이벌 LG 감독을 지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도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최주억 코치의 감독 승격, 신용균 강태정 전 감독 등을 영입하는 방안에 대한 의견도 나왔지만 말 그대로 후보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언급만 됐을 뿐 깊이 있게 논의되지 않았다.
그러나 김인식만큼은 모두가 찬성했다. 무엇보다 상처받은 선수들을 품을 수 있는 인품, 흩어진 선수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리더십 등 덕장으로서 높은 점수를 얻었다.
김인식은 배문고 출신으로 실업야구 크라운맥주에 입단한 1965년에 9승2패를 거두며 신인왕에 올랐고, 국가대표에 발탁될 정도로 촉망받는 투수였다. 그러나 1967년 어깨 부상으로 내리막길을 걸은 뒤 해병대와 한일은행에서 구위를 회복하지 못하고 72년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말았다.
은퇴 후 1973년 모교 배문고 감독을 맡은 뒤 상문고와 동국대 감독을 거쳤다. 특히 1983년 동국대를 야구부 창단 47년 만에 우승으로 이끄는 등 1980년대 동국대 전성시대를 열며 지도자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1986년부터는 해태 투수코치와 수석코치를 맡아 김응용 감독을 보좌하면서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 신화를 만들었다. 김응룡 감독이 강한 카리스마로 선수단을 휘어잡았지만, 그 과정에서 김인식 코치가 상처받은 선수들을 어루만지며 팀을 하나로 묶어냈다. 4연패의 숨은 힘이었다는 사실은 야구계 내부에서는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해태를 투수 왕국으로 만든 최고의 투수 전문가이기도 했다.
이런 평가 속에 1990년 창단한 쌍방울 레이더스 초대 사령탑에 올랐지만 3년간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루지 못하면서 1992년을 끝으로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창단 팀 쌍방울의 부족한 전력을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이미 동국대 감독 시절과 해태 코치 시절 승부사적 기질과 리더십을 보여줬고, 야구에 대한 깊이 있는 내공 역시 야구계에서는 인정을 받아왔다. 따뜻하면서도 냉철함을 갖췄기에 선수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지도자로도 손색없었다. 그동안 OB와 인연이 없었던 외부 인사지만, 균열이 생긴 팀 내부 상황에서 그만한 적임자를 찾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믿음과 기다림…선수들이 자발적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주억 코치가 감독대행으로 잔여 6경기(3승3패)를 소화한 가운데 OB는 1994년 페넌트레이스를 마무리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53승1무72패(승률 0.425)로 7위였다.
김인식 감독은 멀리서 OB의 잔여경기를 지켜보면서 다음 시즌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10월 10일부터 소집된 마무리훈련. 그러나 집단이탈에 가담한 17명의 선수가 빠진 상태라 온전한 인원이 참가할 수 없었다. 젊은 선수 위주의 유망주들을 관찰하면서 다음 시즌을 구상하는 시간이었다.
1995년 새해가 시작됐다. 그동안 아무 말 없이 주력 선수들을 기다려왔던 김인식 감독은 스프링캠프를 떠나기 전 1월에 집단이탈 선수 전원을 서울 강남 모 음식점에 따로 불러 모았다. 17명 중 강영수가 태평양으로 무상 트레이드돼 빠졌고, 나머지 선수가 모였다. 김 감독이 OB 사령탑으로 취임한 뒤 이날 처음으로 이들과 미팅을 했다.
“나를 믿고 잘해보자. 나 역시 너희들을 믿겠다.”
김 감독은 이 자리에서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짧은 말로 인사를 끝냈다. 그게 그의 스타일이었다.
2월 15일 일본 쓰쿠미로 날아가 한 달간의 전지훈련에 돌입했다. 김 감독은 여기서도 선수들을 묵묵히 지켜봤다. 특별한 주문이 없어도 박철순 김형석을 비롯한 베테랑 선수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가운 바람이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이 외투를 벗겼다. 베테랑들이 움직이니 젊은 선수들도 따라 움직였다. 얼었던 분위기가 풀렸고, 선수들의 얼굴에도 조금씩 웃음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심정수 이도형 캠프부터 장타력 폭발…2차지명 진필중 정수근 눈길
기존의 주전 선수들은 어차피 모두 아는 인물. 그런데 김 감독의 눈길을 사로잡는 젊은 선수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 선수가 백스크린 너머로 까마득하게 홈런 타구를 펑펑 날려댔다. 바로 프로 2년생 ‘소년장사’ 심정수였다. 동대문상고(현 청원고)를 졸업하고 1994년 입단한 심정수는 첫해 1군 무대에서 출장 기회를 많이 잡지 못했다. 32경기에서 홈런 3개를 때려냈을 뿐이었다. 심정수는 결국 1995년 무려 21개의 홈런포를 터뜨리는 괴력을 발휘한다.
또 다른 젊은 타자도 파워를 자랑했다. 1993년 입단한 포수 이도형이었다. 1994년 처음 1군 무대에 올라와 60경기를 백업 포수로 뛰며 4홈런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도형은 1995년 주전 포수로 발탁되며 ‘잠실 홈런왕’으로 성장한다.
“심정수는 입단 후에 3루수를 보면서 백업으로 내야 여기저기를 왔다갔다 하고 있었어. 당시 주전 3루수 후보로 임형석이 있으니까 심정수를 쓰쿠미에서 외야로 돌렸지. 그게 성공한 케이스야. 이도형도 방망이가 괜찮았어. 그해 주전포수로 올라섰는데 결정적일 때 홈런을 많이 때렸지.”
김인식 감독의 회상이다.
이에 앞서 OB는 1994년 8월 말에 ‘1995년 신인 1차지명’ 주사위 던지기를 한 결과 패하고 말았다. 그해 최대어는 충암고 고려대 출신의 좌타 거포 심재학. OB와 LG가 1차지명 선수 이름을 적어 넣은 봉투를 교환한 결과 양 팀 모두 심재학을 선택했던 것이다. 결국 양 팀 모두 2개의 주사위를 세 차례씩 던져 숫자를 합치는 방식으로 우선권을 가렸는데 OB는 LG에 13-20으로 지고 말았다. 1986년부터 잠실 라이벌 두 팀이 1차지명 우선권을 놓고 주사위 던지기를 해왔는데 이로써 주사위 전적 2승7패로 밀리게 됐다.
LG는 심재학을 데려가게 됐고, OB는 심재학의 충암고 동기인 건국대 우완투수 송재용을 선택했다. 송재용은 첫 시즌에 전체적으로는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를 냈지만 막판 1995년 페넌트레이스 우승에 결정적인 승리를 올리게 된다.
OB로선 2차지명에서 수확이 있었다. 2차 2라운드에서 선택한 진필중(휘문고-중앙대)이 훗날 큰 몫을 해내는 투수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덕수상고 출신으로 고졸 연고지명 신인으로 뽑은 외야수 정수근도 눈길을 끌었다. 체격이 작고 파워가 떨어져 배팅연습을 할 때도 타구가 내야를 넘어가지 못할 때가 많았지만 발 하나만큼은 발군이었다. 대주자와 외야 대수비로 충분히 활용할 만한 자원으로 보였다.
김인식 감독은 1993년과 1994년 2년간 스포츠서울 객원기자를 하면서 OB 베어스를 객관적인 눈으로 관찰해 왔다. “OB 전력이 나쁘지 않다”고 평가를 했던 김인식 감독은 스프링캠프에서 예상하지 못한 신인급 선수들까지 눈에 띄자 내심 더 큰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한번 해볼 만하다” 김인식 감독의 자신감
1994년 바닥까지 떨어졌던 OB. 1995시즌 개막에 앞서 OB를 강팀으로 분류하는 전문가들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모래알 같이 흩어진 팀 분위기를 김인식 감독이 수습만 해도 다행”이라고 평가했다.
구단 내부에서도 “그룹 탄생 100주년이 되는 1996년에 우승에 도전한다”는 목표를 세워두고 있었기에 1995시즌은 그 가능성을 만드는 것만 해도 성공적인 시즌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김인식 감독은 쓰쿠미 전지훈련을 마친 뒤부터 “한번 해볼 만하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시즌 개막에 앞서 각 언론사가 출사표를 물을 때마다 “4강 이상은 무난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선수들에게 높은 목표 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목적만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계산을 끝낸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다.
그리고 시범경기에서 5승1패를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여줬다. 롯데(5승1무)에 이은 2위였지만 타격 10위 안에 4명이나 포진하는 등 팀타율 1위를 기록하면서 시즌 개막에 대한 기대감을 끌어올렸다.
『선수들이 하고자 하는 의욕을 가지고 있는 등 팀 분위기가 좋아졌다. 지난해에도 가능성이 있는 팀이었는데 엉뚱한 일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제까지 드러난 단점은 기동력으로 보완하는 야구를 보여주겠다. 선수들이 제 기량만 발휘한다면 4강 이상은 무난하다는 생각이다.』 <1995년 4월 15일자 한겨레. OB 김인식 감독 개막전 출사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