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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국 Mar 10. 2023

[49] 마이웨이…'불사조' 박철순의 파이널 커튼

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And now the end is near~

그리고 이제 끝이 가까워져요

 

And so I face the final curtain~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 커튼을 맞이해요

 

(중략)

 

And more much more than this~

그리고 이보다 , 훨씬  중요한 

 

I did it my way~

  방식대로 그걸 했다는 거죠


프랭크 시내트라의 노래 ‘마이웨이(My way)’가 잠실야구장에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불혹을 훌쩍 넘긴 중년의 선수는 파노라마 필름을 훑어보듯 관중석을 찬찬히 둘러봤다.


짧았던 영광과 긴 시련. 그 사이 감정마저 메말라 버린 고통의 세월. 그러나 관중석을 가득 메운 팬들의 기립박수를 보는 순간, 그의 눈가엔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베팬알백] 49편은 OB 베어스를 상징하는 최고 스타, ‘21번’ 투수의 은퇴식 추억이다. KBO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가장 아름다운 은퇴식. ‘불사조’ 박철순은 1997년 4월의 봄날 밤, 마운드 투수판에 키스를 한 채 마지막 날개를 접고 있었다.


40대의 나이에 최초로 마운드에 섰던 박철순 ⓒ두산베어스


 인마,  1  은퇴를 결심하게 만든 술자리


1996년 시즌 말미. OB 베어스는 잠실 라이벌 LG 트윈스와 꼴찌 경쟁을 하고 있었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반게임차로 1~2위를 주고받았던 두 팀이었다. OB는 그 치열한 싸움을 뚫고 페넌트레이스와 한국시리즈 우승 고지를 밟았다.


그러나 1년 만에 우승팀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한 성적표. 김민호 이명수 김상진 등 핵심 전력들의 잦은 부상과 이탈이 이어졌고, 이도형 등 주력 선수들의 군복무 문제가 겹친 탓이었다.


사실 전력 보강 측면에서만 본다면 꼴찌도 나쁘지 않았다. 당시엔 전력 평준화 차원에서 최하위 팀에겐 신인드래프트 2차지명 1라운드 때 먼저 2명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포수”라는 평가를 듣던 고려대 진갑용이 최대어로 나온 해였다.


그러나 우승 팀이 이듬해 곧바로 최하위가 되는 건 KBO 역사상 최초의 일. 1996년은 두산그룹 창립 100주년. 이를 기념해 한국시리즈 2연패를 노리던 OB로선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OB 사령탑을 맡자마자 ‘우승’이라는 천당을 경험한 뒤 곧바로 ‘꼴찌’의 나락으로 떨어진 김인식 감독의 속도 가벼울 수 없었다.


“야, 소주나 한잔 하자.”


시즌 종료를 앞둔 어느 날, OB 김인식 감독은 백전노장 박철순을 불렀다.


‘아, 끝이구나. 이제 그만둘 때도 됐지. 그래, 이 정도면 야구 오래 했어.’


1956년생. 박철순은 당시 KBO 최고령 투수였다. 지금이야 KBO리그에서 불혹을 넘긴 투수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시대지만, 당시만 해도 박철순은 40대의 나이에 마운드에 선 최초의 투수였고 유일한 투수였다. 한마디로 노장 중의 노장이었다.


감독이 마련하는 술자리. 박철순은 김 감독의 부름에 “예, 알겠습니다!”라는 한마디를 하고선 뒤따라 나섰지만, 은퇴를 권유하기 위해 특별히 부르는 자리라고 짐작했다.


박철순은 1995년 9승을 올리면서 OB가 13년 만에 우승하는 데 힘을 보탰다. 9승은 1982년 24승을 올린 뒤 자신의 한 시즌 개인 최다승이었다. 1994년 말 선수단 집단 이탈로 팀이 풍비박산난 상황. 윤동균 감독도 물러났다. 팀 맏형으로서 죄책감을 씻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공을 던진 결과였다.


그런데 1996년에 성적이 시원찮았다. 21경기(선발 11경기)에 등판해 2승6패1세이브, 평균자책점 2.62. ‘약방의 감초’ 같은 몫은 해냈지만 전년도 성적에 비해 하향세였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선발등판 일정이 잡히기만 하면 몸 여기저기가 아팠다는 점이었다. 김인식 감독이 1996년 개막전 선발로 일찌감치 내정하는 배려를 했지만, 개막 이틀 전에 허리가 고장 나면서 마운드에 서지 못했다. 대신 김상진과 진필중을 놓고 고민을 하다 컨디션이 좋은 진필중이 선발등판해야 했다.


박철순은 4월 말에서야 시즌 첫 등판을 했는데 그 이후에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허리뿐만이 아니었다. 선발등판 당일에 잠을 잘못 자는 바람에 목이 움직이지 않아 선발 펑크를 내는 일도 있었다. 나이가 드니 회복도 더뎠다. 체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


박철순은 “그해 나 때문에 선발 로테이션이 꼬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1996시즌 팀이 최하위로 떨어진 데에 스스로도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불사조' 은퇴식에서 박철순에게 꽃다발을 건네는 김인식 감독 ⓒ두산베어스


그런데 김인식 감독은 박철순에게 소주잔을 건네며 한마디를 툭 던졌다.


“야 인마, 너 1년 더 해. 1년 더 충분히 던질 수 있어. 나 도와줘.”


은퇴를 종용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반대였다.


“사실 1996년 그해에 팀은 꼴찌지, 저는 선발등판 일정만 되면 몸에 탈이 났어요. 감독님께 정말 죄송했어요. 속으로 ‘먼저 그만두겠다고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감독님께서 1년 더 뛰라고 하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진심으로 말이죠. 솔직히 그 자리에서 너무 뜻밖이라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했어요. 감독님의 말씀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어요. 끝이라고 생각했다가 희망의 불빛을 본 기분이랄까.”


박철순은 그날의 일을 기억의 주머니에서 끄집어내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그렇게 술자리를 파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더라고요. 당시 ‘박수칠 때 떠나라’라는 유행어가 있었는데, 감독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때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감독님 짐을 덜어드려야겠다라고. 오히려 감독님 말씀에 감동해서 그날 밤에 은퇴를 결심했던 거예요. 정말로.”


김인식 감독에게 그날의 일에 대해 물었더니 “박철순은 구위도 괜찮았지만 경기 운영하는 노하우가 있으니 충분히 1년은 더 던질 수 있다고 봤던 것”이라면서 “베테랑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아도 팀에 꼭 필요하지. 어린 선수들한테 한마디 해주는 게 큰 힘이 돼. 팀이 어려울 때 한 번씩 거들어주면 되는데, 본인이 은퇴를 하겠다고 하니 나로선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라고 돌이켰다.


박철순은 1996년 정규시즌이 끝난 뒤 10월 4일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정장을 입고 나온 그는 이 자리에서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다”면서 “매 시즌 은퇴를 생각해 왔었다. 그동안 용기가 없어서 은퇴를 차일피일 미뤄왔다. 가장 큰 이유는 체력의 한계를 몸으로 느낄 정도였다. 나이와 상관없이 성적이 시원찮았다. 다른 큰 이유는 없다”며 은퇴의 변을 밝혔다.



불사조 은퇴식, 잠실 라이벌 LG전으로 맞춰 준비하다

1982년 프로야구 원년 타자들에게 생소했던 박철순의 너클볼 그립 ⓒ두산베어스


1997년 4월 29일. 화요일 야간경기였다. 전년도 꼴찌를 다투던 잠실 라이벌 두 팀은 시즌 초반 반등의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천보성 감독이 새롭게 지휘봉을 잡은 LG는 전날까지 9연승을 달리며 단독 선두를 질주했고, OB도 5할 안팎의 승률로 4강권에 포진했다.


평일이었지만 이날 잠실구장은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OB와 LG의 잠실 라이벌전이기도 했지만, KBO리그를 상징하는 원년 최고 스타 박철순의 은퇴식을 보기 위해 구름관중이 몰려들었다. 당시 잠실구장 만원관중인 3만500명이 가득 들어찼다.


“박철순! 박철순!”


경기 시작 전부터 팬들은 박철순 이름을 연호했다. 박철순은 이날 OB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마운드에도 오를 수 없었다. 팬들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선수로서 마지막 날이기에 ‘이때가 아니면 언제 다시 불러보겠냐’는 듯 박철순의 이름을 목 놓아 불렀다.


OB는 당초 은퇴식뿐만 아니라 은퇴경기를 열어 마지막 투구하는 모습을 팬들에게 선사하려 했다. 1989년 윤동균이 은퇴경기에서 멋진 2루타로 마지막을 장식한 것처럼, 박철순도 마지막 삼진을 잡고 팬들과 작별을 한다면 그보다 멋진 장면도 없을 거라고 봤다.


그러나 박철순 스스로 은퇴경기를 거절했다. 처음엔 구단의 제의에 고마움을 느꼈지만, 자신이 은퇴경기를 욕심낸다면 후배 중 누군가는 엔트리 한 자리를 양보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박철순은 팀에 민폐를 끼치기 싫다며 은퇴경기를 고사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OB는 그해 시즌 초반 4강 싸움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은퇴경기를 고사한 박철순이 경기 후 마운드에서 마지막 공을 던지는 모습 ⓒ두산베어스


박철순이 은퇴경기를 고사하는 상황이라 OB 베어스는 그 대신 최고의 은퇴식을 준비하기 위해 시즌 개막 전부터 구단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움직였다. 박철순은 OB 베어스뿐만 아니라 KBO리그의 ‘살아있는 전설’. 박철순 이름 석 자가 주는 무게감은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9년에 윤동균 선수 은퇴식을 KBO 최초로 기획하고 진행했지만 사실 대대적인 이벤트는 아니었어요. KBO 전체에서도 윤동균 선수 다음 은퇴식이 해태 타이거즈 김성한 선수였는데, 경기 후에 은퇴사를 밝히는 정도의 조촐한 은퇴식이었죠. 그 시절엔 그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지만요.”


박철순 은퇴식을 준비하고 기획한 당시 OB 베어스 이운호 홍보팀장은 설명을 이어갔다.


“박철순은 당시 KBO리그의 상징적인 인물이었잖아요. 불사조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팬들에게 인기도 높았던 선수라 기억에 남을 만한 은퇴식을 만들고 싶었어요. 1997시즌 개막 전부터 준비를 시작했죠. 날짜와 상대팀을 놓고 고민하다가 잠실 라이벌인 LG전으로 선택했어요. 해태라든지 다른 팀도 의미는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LG가 더 의미가 있고 적합한 상대 팀이라고 판단했죠. 팬들도 많이 올 수 있으니까 그날로 잡았습니다. 박철순의 마지막 등판은 없는 일이 됐고, 경기가 끝난 뒤에 대대적인 은퇴식을 열기로 했죠.”


이날 경기 흐름은 초반부터 LG로 넘어갔다. LG는 OB 선발투수 강병규를 상대로 2회초 4점을 뽑아내며 기선을 잡았다. OB가 0-5로 뒤진 6회말 1점을 따라갔지만, LG는 7회초와 9회초에도 1점씩을 뽑아내며 7-1로 승리했다. ‘불사조’ 박철순이 은퇴하게 되면서 KBO 최고령 투수 타이틀을 넘겨받은 LG ‘노송’ 김용수는 이날 선발로 나서 5.1이닝 5안타 1실점으로 호투하며 시즌 2승째를 올렸고, 7회부터 마운드를 이어받은 차명석이 경기를 마무리하며 시즌 2세이브(2승)를 기록했다.


10연승의 LG는 시즌 12승3패로 1위를 질주했고, OB는 7승1무7패 5할 승률로 4위를 유지했다.



박철순의 시간팬들이 불사조에게 보낸 마지막 선물

지난 세월을 떠올리며 팬들에게 은퇴사를 전하는 박철순 ⓒ두산베어스


경기는 싱겁게 끝났다. 그러나 이때부터 KBO 역사에 길이 남게 될 하이라이트가 시작됐다. ‘박철순의 시간’이 펼쳐졌다.


OB 선수단이 박철순 뒤로 도열했다. 박철순은 마운드 앞에 서자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호흡을 한번 크게 했다. 입풍선을 불자 볼살이 부풀어 올랐다.


어느 순간부터 박철순을 상징하는 노래가 된 프랭크 시내트라의 ‘마이웨이’가 잠실구장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박철순은 오른손으로 한번, 왼손으로 한번 관중석 곳곳을 가리키며 인사를 했다.


경기가 끝났지만 팬들은 잠실구장을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 LG 팬들도 모두 자리를 지켰다. 평소 만나기만 하면 “OB 꼴찌”, “LG 바보”라며 으르렁거리던 양 팀의 팬들도 이 순간만큼은 모두 하나 되어 “박철순”을 외쳤다. 다 함께 기립해 라이터를 켜고 위대한 스타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잠실구장 관중석을 빼곡히 수놓은 라이터의 영롱한 불빛. 프로야구 최고의 별이 떠나는 순간, 팬들은 수만 개의 라이터 불꽃을 만들어 마지막 선물을 했다. KBO 출범 원년에 우리에게 프로야구란 무엇인지, 그 참맛을 알게 만들어준 원조 스타에 대한 헌정의 인사였다. 그야말로 장관을 연출했다.


“지금도 기억나요. 그때 촘촘히 팬들이 라이터를 켜고 있었는데, 마운드에서 멀리 보니까 그 불꽃들이 하나하나 점처럼 보였어요. 지금도 어떻게 감사한 마음을 전할 방법은 없지만, 그 잘에 계신 한 분 한 분 모두 소중한 팬들이었죠. 선수 생활 내내 저한테 보내온 함성, 칭찬, 비난…. 전부 진심이었을 거예요.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니까 가슴이 벅차올랐어요. 벅차다는 말로도 부족하죠. 감사하다는 말로도 부족하죠.”


등번호 21번의 투수가 목에 화한을 걸고 은퇴식을 진행하는 사이, 등번호 81번의 감독이 마운드에 뚜벅뚜벅 올라와 15년간 수고한 불사조의 오른쪽 어깨를 두들기며 격려했다.


그러더니 농담처럼 한마디를 던졌다.


“짜아식, 내가 1년 더 하라니까. 수고했어.”


박철순은 그 자리에서 김인식 감독에게 인사를 올리면서 웃고 말았다.


이어 상대팀 LG 주장 노찬엽이 다가와 꽃다발을 건네자 박철순은 포옹을 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때만큼은 잠실 라이벌도, 적군도 아니었다. 서로 존경하는 선배였고, 사랑하는 후배였다.


그러던 순간, 회색 양복을 입은 신사가 꽃다발을 들고 마운드로 다가왔다. 윤동균 전 감독, 아니 윤동균 선배였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당시 선수를 대표해 선서를 했던 인물. 1989년 KBO 최초로 은퇴식을 했던 주인공. 1993년 KBO 선수 출신 최초로 감독에 오른 사나이. 그러나 1994년 OB 선수단의 집단이탈로 불명예스럽게 유니폼을 벗은 감독.


박철순과 윤동균은 서로 보자마자 뜨겁게 포옹했다. 박철순은 그 순간 자신의 얼굴을 선배 왼쪽 어깨에 파묻었다.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1995년 우승 순간 박용민 전 사장을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한 것처럼, 다시 어린아이마냥 하염없이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윤동균은 말없이 후배의 등을 토닥거렸다.


윤동균 선배의 오른쪽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을 쏟는 박철순 ⓒ두산베어스


“제가 큰 죄를 지었죠. 선배로서 그걸 못 막았던 게….”


박철순은 은퇴식에서 윤동균 감독을 붙잡고 울었던 상황을 설명하다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회한의 눈빛. 그 아래로 다시 눈물이 고였다.


“1994년 선수단 집단 이탈 때 제가 막았어야 했어요. 그 때문에 감독님이 유니폼을 벗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제 은퇴식을 빛내 주시러 오셨잖아요. 감사했어요. 만약 입장 바꿔서 나였으면 안 갔을 것 같아요. 대인배 같은 성격이죠.”


이날 은퇴식에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참석해 아쉬움과 축하의 마음을 전했다. 박용오 구단주는 물론 평소 박철순의 열렬한 팬이라는 사실을 공공연히 밝혔던 김종필 자민련 총재를 비롯한 정치권 인사들까지 찾아왔고, 백혈병어린이 후원회, 배명고 동문회, 불사조 후원회 등 박철순과 인연을 맺은 10여 개의 단체 대표와 팬클럽 대표들도 줄을 이었다.


무엇보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당시 생존자인 박승현 씨가 그라운드에 나와 많은 팬들의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박철순은 당시의 기억을 돌이키며 “그날 정말 많은 분들이 오셔서 축하를 해주셨는데, 삼풍백화점 사고 당시 살아남았던 박승현 씨와 후원을 했던 백혈병 어린이가 왔던 게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박승현 씨는 ‘불사조’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었고, 오랜 기간 아파봤던 그였기에 백혈병 어린이 또한 눈에 밟혔다.


 

투수들만의 의식…’원조 마운드 키스 어떻게 시작됐을까

은퇴식 전광판에 찍힌 작별 인사 'good bye! 박철순' ⓒ두산베어스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잠실구장 전광판에 ‘잘 가요 박철순’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가운데 프랭크 시내트라의 ‘마이웨이’ 노래가 다시 잔잔히 울려 퍼졌다.


박철순은 오른손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그동안 많은 사랑과 질타를 주셨던 팬 여러분….”


그 말을 하는 순간, 모질었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숱한 절망과 질곡의 시간을 이겨낸 불혹의 사나이는 말을 잇지 못했다. 왼손으로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쳤다. 숨죽이며 은퇴사를 들으려고 귀를 쫑긋 세운 팬들이 응원의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보내자 박철순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그동안 많은 사랑과 고통을 받았던 마운드를 떠나려 합니다. 그동안 많이 보내주신 신뢰와 사랑은 저의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제 마음속 깊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팬 여러분, 이제 저는 마운드를 떠나가지만 언제나 여러분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관중석의 팬들은 다시 함성과 함께 기립박수를 보냈다.


박철순은 마운드 위에 서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오른손으로 자식의 얼굴을 어루만지듯 흙으로 뒤덮인 투수판을 정성스럽게 쓰다듬었다. 가로 24인치(61㎝), 세로 6인치(15.2㎝)의 직사각형 고무 평판. 이 작은 투수 플레이트에 자신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천천히 작별의 키스를 했다. 마지막 입맞춤.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투수판에 진한 키스를 끝낸 불사조는 다시 일어섰다. 환호를 보내는 팬들을 향해 OB 베어스를 상징하는 삼색 모자를 흔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마운드 키스’는 지금도 박철순의 은퇴식을 상징하는 명장면으로 기억된다. 그렇다면 이 의식은 어떻게 시작된 걸까.


“당시만 해도 은퇴식 사례가 많지 않았잖아요. 외국 사례를 참고하려고 해도 지금처럼 동영상이 있는 시절이 아니니까 한계가 있더라고요. 서적이나 잡지 등을 찾아보고 그랬죠. 메이저리그 전문가나 기자 등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해외축구나 다른 해외 스포츠 스타들의 은퇴식 등에 대해서도 조사를 하기도 했어요. 그래도 마땅한 아이디어가 안 떠오르더라고요. 그런데 그때 중앙일보 이태일 기자(전 NC 다이노스 사장)한테 조언을 구했더니 마운드 키스가 어떻겠느냐고 아이디어를 주더라고요.”


당시 OB 베어스 홍보팀장을 맡고 있었던 이운호 씨는 설명을 이어갔다.


“홍보팀과 응원단이 은퇴식과 관련해 매일 회의를 하고, 당사자인 박철순 선수도 직접 회의에 참가해 의견교환을 하고 있었는데 모두들 이 아이디어에 찬성을 했어요. 그런데 무릎을 꿇는 방향을 어디로 할지를 놓고도 갑론을박했던 기억이 나네요. 홈플레이트 방향으로 보고 엎드릴 거냐, 아니면 전광판을 보고 엎드릴 거냐, 옥신각신하다가 백스톱 뒤쪽 팬들에게 엉덩이를 보이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다는 의견에 따라 결국 홈플레이트를 보고 엎드리게 됐습니다.”


이태일 기자(현 스포티즌 부사장)는 어떻게 ‘마운드 키스’ 아이디어를 낸 것일까.


“당시 OB 베어스 구단에서 박철순 은퇴식 때 어떤 세리머리를 하면 좋겠느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때 메이저리그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전설적 타자 조지 브렛의 은퇴식 장면이 생각났어요. 브렛은 타자여서 홈 플레이트에 키스를 했죠. 박철순은 투수니까 투수 플레이트에 키스를 하는 게 어떨까 싶어 이야기를 했더니 그게 채택이 됐더라고요.”


박철순 이후 KBO 후배 투수들은 이제 은퇴식을 할 때면 모두 의식처럼 마운드에 무릎을 꿇고 투수판에 키스를 하고 있다. KBO리그 투수 은퇴식 문화에서 하나의 전통처럼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당시엔 이벤트 업체도 없을 때라 구단 홍보팀과 응원단이 밤을 지새우면서 아이디어 회의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박철순 아닙니까. 멋있는 은퇴식을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은퇴식 사흘 전부터는 잠실구장에서 직접 리허설도 했고요. 팬들께서는 지금도 박철순 은퇴식 장면이 기억에 남아 있다고들 해요. 은퇴식을 준비했던 당사자로서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2011년 두산 베어스에서 퇴사한 이운호 전 홍보팀장은 박철순 은퇴식 이야기가 나오자 “OB 베어스가 곧 박철순이었고, 박철순이 곧 OB 베어스였다”며 다시 한번 1997년 4월 29일의 밤을 추억했다.


박철순은 그날 마운드 키스를 한 뒤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는 선수 시절 입었던 21번 유니폼을 벗어 강건구 단장에게 반납하면서 90번이 새겨진 코치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당시엔 국내에 영구별번 문화도 일반화하지 않았을 때라 박철순의 21번 영구결번식은 그 후 2002년에 별도로 이뤄졌다.



마이웨이그리고 에이스를 위하여

불사조 박철순이 은퇴식에서 마운드에 키스하는 모습 ⓒ두산베어스


박철순은 KBO리그 역사에서 위대한 투수 이상의 의미를 갖는 선수다. 프로야구 원년 ‘22연승 신화’를 썼던 영웅이지만, 우리가 그를 기억하고 감동하는 것은 선수생명이 끝날 뻔한 숱한 부상에도 포기하지 않고 일어선 불굴의 의지와 도전정신인지도 모른다.


[베팬알백] <9편> ‘불사조 박철순, 7전8기 악몽의 시작’에서 설명했지만 그의 선수생활은 불운과 눈물의 연속이었다.
 

진통제 주사를 맞고 허리를 붙잡아가며 1982년 원년 우승을 위해 공을 던졌던 대가는 컸다. 1983년 2월 대만 스프링캠프 도중엔 허리 디스크 증세로 쓰러져 일본 병원으로 후송됐고, 오랜 재활 후 그해 9월 22일 MBC전에 복귀했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1회말 송영운의 직선타구에 허리를 맞고 그 자리에서 쓰려져 구급차에 실려 나갔다.


1984년 미국으로 건너가 두 차례 허리수술을 받았지만, 오히려 하반신이 마비됐다. 머리카락이 다 빠진 채 휠체어를 타고 귀국하는 모습을 본 야구관계자들은 두 눈을 질끈 감아야만 했다. 운동선수는커녕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영위하기도 어려워진 몸 상태. 그러나 박철순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마운드에 돌아왔다.


1988년에는 속옷 CF 촬영을 새벽에 하면서 점프를 하고 착지하는 과정에서 왼쪽 발목의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인대를 잇는 수술을 했지만 왼쪽 발뒤꿈치가 땅에 닿지 않는 시련이 이어졌다. 걷기조차 힘든 몸. 그는 초인적인 의지로 재활에 성공했고, 또다시 마운드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7전8기 인생. 수없이 쓰러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야구에 대한 사랑, 바로 그것이었다. 팬들은 날개가 꺾여도, 허리가 부러져도, 다리가 끊어져도, 죽지 않고 살아나는 그를 두고 ‘불사조’라 불렀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힘들고 지친 삶 속에서 그런 박철순을 보고 다시 도전하겠다는 의지와 희망을 되살리곤 했다. 그가 마운드에 돌아올 때마다 팬들이 뜨거운 함성과 박수로 그를 맞이한 이유다.


어쩌면 박철순이 15년간 마운드에서 버티며 던진 것은 공이 아닌 혼이었는지 모른다. 1995년 펴낸 자전적 에세이 제목도 ‘혼을 던지는 남자’였다.


박철순이 2023년 개막전 시구를 위해 잠실구장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


1956년생. 박철순은 이제 일흔을 앞둔 초로의 신사가 됐다. 순박한 미소는 여전하지만, 깊게 파인 얼굴의 주름과 듬성듬성한 흰 머리카락. 지난날 그가 겪었던 시련과 세월의 풍파가 느껴진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투수는 지금도 가끔씩 라디오를 듣다 프랭크 시내트라의 ‘마이웨이’ 노래가 흘러나오면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린다고 한다. 그 노래만 나오면 야구를 했던 그 시절 그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고 한다.


“사실 난 처음엔 마이웨이라는 노래가 있는 줄도 몰랐어요. 구단에서 내가 등판할 때마다 틀어주다 보니 그냥 내 노래가 돼버렸던 거죠. 나하고 이미지가 딱 매치됐다고 해요. 가사를 번역해도 내 인생과 닮았다고 하고. 그 노래가 나오면 팬들도 괜히 울컥울컥 했다고 그러더라고요. 사실 저도 그랬어요. 투수가 등판하면 경쾌하고 밝은 노래를 틀어줘야 하는데 속으로 ‘아, 난 왜 이렇게 됐지? 왜 이렇게 짠한 사람이 됐지?’라는 생각 때문에 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고 그랬어요.”


그의 말처럼 ‘박철순’ 하면 ‘마이웨이’가 연관검색어처럼 떠오르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를 상징하는 새로운 테마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가수 권인하의 노래 ‘에이스를 위하여’다.


투수 박철순은 수많은 전설을 남기고 25년 전 봄날에 우리 곁을 떠났다. 그러나 팬들은 지금도 가끔씩 그가 그리워질 때면 ‘마이웨이’와 함께 ‘에이스를 위하여’를 부르며 ‘불사조’를 추억한다.


너와 함께 했던 많은 날을 기억해

세상에서 주는 갈채와 환호 속에서도

너는   곁에 함께 했었지

때로는 기쁨으로 때로는 눈물로 엉킨 

네가 밟고  베이스를 넘고 넘어서

우리에게 주어진 희망으로

승리를 위해 외로이 달리는

오직  하나만을 위해

 

- 가수 권인하의 에이스를 위하여가사  -

은퇴식에서 마지막 헹가래를 받는 박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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