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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국 Mar 11. 2023

[50]‘우동수 트리오’ 탄생…“굿바이 OB 베어스”

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국가대표 4번타자 김동주(22·고려대)가 프로야구 사상 야수 최고액을 받고 OB에 입단했다. OB는 2일 98시즌 1차지명 선수인 김동주와 계약금 4억5천만 원, 연봉 2천만 원에 입단계약을 했다. 이로써 김동주는 지난해 LG에 입단한 외야수 이병규(4억4천만 원)를 제치고 역대 야수 계약금 1위, 투수를 포함해도 임선동(LG·7억 원), 차명주 손민한(이상 롯데·5억 원)에 이어 4위의 ‘귀하신 몸’이 됐다.』 <1997년 12월 3일자 동아일보>


1998년을 얘기하자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우동수 트리오’ 탄생이다. 원년부터 OB 베어스를 상징하던 스타 박철순이 1997년 은퇴식을 통해 무대 저편으로 떠나면서 베어스는 새로운 간판스타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때 새로운 얼굴들이 나타났다. 바로 김동주와 타이론 우즈였다. 4년 전인 1994년 입단한 심정수와 함께 이들은 곧바로 파워풀한 베어스의 공격 야구를 만들어가게 된다.


[베팬알백] 50번째 주제는 KBO리그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강력한 중심타선 ‘우동수 트리오’의 시작과 17년간 지속돼 온 OB 베어스 마지막 시즌 이야기다.


국가대표 4번 타자 출신으로 베어스 유니폼을 입은 김동주 ⓒ두산베어스


LG 주사위 던지기한풀이미래의 두목곰김동주 입단


OB는 1997년 여러 측면에서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우선 부상으로 신음했던 김민호 심정수 김상진 등이 정상 컨디션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배명고-한양대 출신의 투수 이경필을 1차지명했고, 2차지명에서는 고려대 포수 진갑용과 인하대 좌완투수 김영수 등 대학야구 스타들을 선택해 나름대로 전력보강을 했다고 판단했다.


시즌 중반까지는 줄곧 4강권을 형성했다. 그러나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다시 예상치 못한 주전들의 줄부상이 이어졌다. 심정수가 어깨 관절통을 호소하며 6월 중순부터 전열에서 이탈했고, 팀 내에서 최고 타격감을 유지하던 안경현은 팔꿈치 통증으로 8월부터 사라졌다. 이종범과 경쟁하며 생애 첫 도루왕에 도전하던 정수근이 왼쪽 손가락 골절상으로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여기에 김상호와 김형석 등 중심타자들도 부진했다. OB는 결국 시즌 57승5무64패로 5위에 그치며 가을야구에 나서지 못했다. 1996년 최하위를 생각하면 위안을 삼을 수 있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다음 시즌을 향한 희망적인 뉴스가 나왔다. 바로 1998년 신인 1차지명 최대어로 평가받던 김동주를 뽑았기 때문이다.


1997년 11월 8일. OB는 LG와 1차지명 우선권을 가리기 위해 다시 주사위 던지기를 했다. 주사위 2개를 3차례 던져 숫자가 높은 팀이 우선권을 가져가는 방식. OB는 여기서 23-12로 이겼다. 1990년대 들어 마침내 처음으로 서울 연고 선수의 1차지명 우선권을 갖게 됐다.


사실 OB는 4년 전에 당시 배명고 소속으로 투타에서 초고교급 활약을 하던 김동주를 곧바로 영입하기 위해 역대 최고 대우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김동주가 고려대 진학을 선택하면서 OB는 4년 후 1차지명을 노릴 수밖에 없었다.


4년을 기다린 끝에 주사위 던지기에서 다시 패해 김동주마저 놓친다면? 상상하기조차 싫은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주사위 던지기의 한도 풀고, ‘미래의 두목곰’이 될 김동주를 잡았으니 OB로선 콧노래를 부를 만도 했다.


김동주는 대학 시절에도 국가대표 중심타자로 맹활약했다. 고려대 4학년 시절이던 1997년 대만에서 열린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됐다. 이 대회에서 타율 0.538(26타수 14안타), 9홈런, 19타점을 기록했다. 특히 훗날 일본 대표팀 에이스이자 메이저리그에도 진출한 우에하라 고지를 상대로 예선과 결승에서 홈런 4방을 몰아쳐 일본 관계자들마저 깜짝 놀라게 했다.


OB와 김동주는 입단 협상을 벌이며 줄다리기를 했으나 결국 12월 1일 계약금 4억5000만 원에 최종합의했다. 이는 1년 전 LG 유니폼을 입은 이병규의 4억4000만 원보다 1000만 원 많은 당시 역대 야수 최고 대우였다.


1993~1994년에 김인식 감독은 쌍방울 사령탑에서 자리에서 물러난 후 고려대에서 잠시 투수 인스트럭터 생활을 한 적이 있다. 당시 인연이 4년 후 OB 감독과 중심타자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외국인선수 제도 도입타이론 우즈 계약 뒷얘기

1998년 처음 도입된 외국인 선수 제도를 통해 베어스 유니폼을 입은 우즈 ⓒ두산베어스


“당초 우즈는 우리 팀 우선 후보가 아니었어요. 내야수 에드가 캐세레스를 1라운드에서 뽑고, 2라운드는 메이저리그 경력이 있는 스위치히터 주니어 펠릭스 또는 삼성에 입단하게 된 왼손투수 스코트 베이커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죠. 그런데 2라운드에서 OB에 앞서 지명권을 가진 LG가 주니어 펠릭스를 찍더라고요. 베이커는 OB의 숙원사업인 왼손투수라는 점에서 눈여겨봤지만 김인식 감독님께서 ‘센터라인과 장타력 보강이 시급하다’고 해서 결국 캐세레스와 타이론 우즈를 선택하게 됐습니다.”


1997년 OB 스카우트팀장을 맡아 미국 플로리다로 날아갔던 구경백 현 일구회 사무총장의 기억이다.


1998년은 KBO리그에서 제도적으로 터닝포인트가 되는 해였다. 바로 외국인선수를 처음 도입했기 때문이다. 1994년 박찬호가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에서 데뷔하고, 1996년 선동열이 일본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 유니폼을 입으면서 국내 유망주들이 대거 미국과 일본 무대로 빠져나가던 상황이었다. KBO 구단의 전력 보강은 물론 팬들의 관심을 모으기 위해 외국인선수를 수입하는 방안을 결정했다.


1997년 11월 14일, 미국 플로리다주 세인트피터스버그 힐튼호텔에서 1998년에 입단할 외국인선수 드래프트가 진행됐다. 당시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구단별로 자율적으로 계약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트라이아웃 캠프를 열고 참가 선수 중 각 구단이 순서대로 지명하도록 했다.


첫 트라이아웃에는 KBO리그 입성을 노리는 총 54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KBO와 구단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훈련 및 5차례 평가경기가 열렸다. 쌍방울이 모기업 재정난으로 트라이아웃 캠프 도중 철수를 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7개 구단이 외국인선수 지명행사에 참여했다.


지명순서는 최근 3년간(1995~1997년) 페넌트레이스 성적을 합산한 역순. 1라운드에서는 현대-한화-롯데-OB-삼성-LG-해태 순으로 지명하고, 2라운드에서는 해태부터 시작해 현대로 끝나는 ‘ㄹ’자 방식이었다. 총 5라운드까지 지명한 뒤 2명까지만 계약할 수 있었는데, 첫해 연봉 상한선은 입단 보너스와 부대비용을 포함해 12만 달러로 제한했다.


1라운드에서 현대가 가장 먼저 강속구 투수 조 스트롱을 지명했다. 메이저리그 출신의 내야수 강타자 마이크 부시와 저울질을 하다 스트롱을 선택한 것. 그러자 한화가 곧바로 부시를 지명했다. 이어 롯데가 우완 투수 빅터 콜을 찍었다.


OB 차례가 왔다. OB는 김인식 감독의 뜻에 따라 에드가 캐세레스를 우선 지명했다.


캐세레스는 유격수와 2루수를 볼 수 있고, 스위치히터란 강점이 있었다. 특히 국내 선수는 흉내조차 내기 힘든 유려한 글러브질이 압권이었다. 캐세레스는 베네수엘라 출신으로 당시 메이저리그 최고 유격수로 꼽히던 오마르 비스켈과 어린 시절 국가대표 키스톤 콤비를 이뤘던 사이였다.


다른 팀은 대부분 에이스급 투수와 거포를 우선적으로 눈여겨보던 상황. OB 구단 프런트에서도 숙원사업 같은 왼손투수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김인식 감독이 “캐세레스를 찍자”고 주장하면서 프런트는 고민에 휩싸였다.


결국 당시 트라이아웃 현장에 있던 강건구 단장이 서울에 있는 경창호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현장과 프런트의 생각을 설명했다. 그러자 경 사장은 “감독 뜻대로 해줘”라며 교통정리를 했다.


1998년 OB베어스에 입단한 '스위치히터' 내야수 에드가 캐세레스 ⓒ두산베어스


김 감독은 왜 캐세레스를 먼저 선택했을까.


“당시 유격수 김민호는 군 문제가 걸려 있었고, 이명수는 구단에서 방출한 상황이라 내야 쪽에 변수가 많았어요. 센터라인을 보강해야 하는데 캐세레스를 보니 수비와 주루에 능하고 야구센스가 뛰어나더라고. 메이저리그에서도 잠시 뛰었으니 KBO리그에 오면 방망이도 어느 정도는 해줄 걸로 봤죠.”


당시 삼성 곽홍규 스카우트팀장(훗날 OB 베어스 단장으로 부임)은 지명에 앞서 “OB가 누굴 찍을지 알려줘야 우리도 준비를 할 게 아니냐”며 힌트를 줄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삼성 지명 순서가 OB 다음이었기 때문. OB가 캐세레스를 찍자마자 삼성은 호세 파라를 선택했다. 이어 LG가 투수 마이클 앤더슨, 해태가 외야수 숀 헤어를 지명하면서 1라운드 선발이 끝났다.


2라운드로 넘어간 상황. OB는 타자 2명을 영입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애초에 메이저리그까지 경험한 주니어 펠릭스를 시야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펠릭스의 태도를 보고는 포기했다. 드래프트에 앞서 OB 측에서 오며 가며 펠릭스와 잠시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여자 친구가 이곳에서 보석상을 하고 있다”는 둥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다른 팀과 이미 얘기가 끝났거나 지명을 하더라도 웬만한 조건으로는 한국행을 결정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당시 OB 구경백 스카우트팀장과 통역을 맡은 조성일 사원(현 두산 운영2팀 부장)은 외국인선수들이 묵는 낮은 등급의 숙소를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KBO와 다른 구단 프런트는 모두 최고급 하얏트 호텔에 묵고 있던 상황에서 둘만 선수들과 같은 숙소를 썼다.


OB가 이렇게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거기서 어떤 선수가 술을 먹고 밤늦게 들어오는지, 어떤 선수가 혼자 방망이라도 돌리고 있는지 등을 면밀히 체크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밤마다 트라이아웃에 참가한 외국인선수 한 명씩 숙소 방으로 초대해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개인사와 성격까지 알아보려고 했던 것이었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우즈를 선택하게 되는 팁을 얻게 된다.


김인식 감독이 “마지막으로 펠릭스를 한번 만나 보라”고 하자, 구경백 팀장과 조성일 사원이 펠릭스의 방 앞에 “우리 방에서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다”며 쪽지를 놔뒀다. 그러나 끝내 응답이 없었다.


반면 우즈는 달랐다.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OB 구단에 감동했다. 우즈는 1969년생으로 메이저리그 경력이 없는 유망주로 트리플A까지만 뛰었다. OB 프런트가 묵는 방까지 직접 찾아와 자신을 어필했다.


한번은 OB 조성일 사원이 우즈에게 “너는 발이 느린 것 같더라”고 하자 펄쩍 뛰었다. 그러더니 다음날 평가경기 때 2루도루를 시도하기도 했다. 비록 아웃됐지만 김인식 감독이나 OB 프런트는 이 장면을 감명 깊게 봤다. ‘반드시 KBO리그에서 뛰고 싶다“는 절실함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우즈는 당시 트라이아웃에 참가한 선수 중 파워 하나만큼은 최상급이었다. 다소 거칠어 보이긴 해도 프리배팅 때 타구를 담장 너머 까마득하게 날려대자 김인식 감독은 “맞기만 하면 공이 150m는 날아가겠다”며 웃었다.


앞서 설명한 대로 2라운드는 'ㄹ' 자로 최근 3년간의 성적순으로 지명을 하게 됐다. 쌍방울이 불참한 가운데 해태-LG-삼성-OB-롯데-한화-현대 순으로 진행됐다.


해태가 먼저 투수 윌리엄 저비를 찍었다. 다음 차례인 LG가 주니어 펠릭스를 선택했다. 그리고 삼성이 좌완 스콧 베이커를 지명했다. OB로서는 오히려 고민이 사라졌다.


“자, 다음 OB 베어스 발표하세요.”


KBO에서 원년부터 기록위원으로 일하다 외국인선수 트라이아웃을 기획하고 준비한 박기철 기획실장(작고)이 행사를 진행했다.


“OB 베어스 지명하겠습니다. 타이론 우즈!”


순간 장내가 웅성거렸다. 프리배팅 때는 타구를 까마득하게 펑펑 날렸지만, 실전 평가경기에서는 계속 헛방망이만 돌리던 우즈였다. 타 구단에서는 다소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이어 롯데가 내야수 더그 브래디, 한화가 내야수 조엘 치멜리스, 현대가 내야수 스콧 쿨바를 찍는 등 5라운드까지 지명이 완료됐다. 구단마다 최대 5명까지 지명하고 2명과 계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OB 프런트는 계약을 위해 우즈와 만났다. 당시 대부분의 에이전트가 이곳까지 찾아와 KBO 구단들과 몸값 협상을 벌였으나, 우즈의 에이전트는 어찌 된 일인지 플로리다까지 오지도 않았다. 그때는 지금처럼 휴대폰이 일반적으로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조성일 사원이 우즈의 개인 전화기를 빌렸다. 볼티모어에 있는 에이전트에게 전화를 걸어 협상을 시작했다.


에이전트는 OB에 다소 부담스러운 조건을 요구했다. 협상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통화가 끊어지지 않자 우즈는 옆에서 “전화요금 많이 나온다”며 “빨리 끊으라”고 재촉했다. 당시만 해도 마이너리그 연봉만 받던 우즈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더니 에이전트에게 전화상으로 “너무 까다롭게 굴지 말라”면서 OB 구단 측이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이자고 했다.


결국 OB는 우즈와 9만4000달러(계약금 2만 달러+연봉 7만4000달러), 캐세레스와 9만5000달러(계약금 2만 달러+연봉 7만5000달러)에 합의하면서 외국인선수 계약을 마무리하게 됐다.

 

 

개막전부터 화끈한 신고식우즈 데뷔 타석 홈런포+김동주 신인 최초 연타석포

잠실구장에 수많은 아치를 수놓은 심정수와 김동주 ⓒ두산베어스


4월 11일. OB는 광주 무등야구장에서 해태 타이거즈와 1998년 시즌 개막전을 치렀다. 김인식 감독은 외국인선수를 중심에 포진시킨 새로운 라인업을 들고 나왔다.


  ■OB 베어스 시대의 마지막 1998시즌 개막전 라인업


에드가 캐세레스를 유격수로 넣으면서, 유격수 터줏대감 김민호를 2루수로 이동시킨 부분이 눈길을 끈다(시즌 도중 김민호와 캐세레스가 자리를 맞바꾸게 된다).


중심타선에 3번 캐세레스~4번 김동주~5번 우즈를 포진시켰다. 외국인 선수들이야 그렇다 쳐도 신인이 단숨에 4번타자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 실제로 신인이 개막전 4번타자를 친 것은 KBO리그 역사에서도 1995년 롯데 마해영 이후 역대 두 번째였다.


김동주는 배명고 시절엔 투수와 유격수를 보고, 고려대 시절에도 유격수와 외야수를 맡았을 정도로 다재다능한 선수였다. 1998년 개막전에는 김동주가 좌익수, 장원진이 지명타자를 맡았다(시즌 도중 김동주는 3루수로 이동하게 된다).


우즈가 개막전 첫 타석에서 화끈한 신고식을 했다. 0-1로 뒤진 2회초 해태 에이스 이대진을 상대로 좌월 솔로포를 날렸다. KBO리그 데뷔 첫 타석에서 홈런포로 인사를 시작한 최초의 외국인타자가 됐다.


엄청난 파워를 자랑하며 타구를 담장 너머로 날려 보내는 우즈 ⓒ두산베어스


이번엔 김동주 차례. 8-5로 앞선 5회초 세 번째 타석에서 2점홈런을 터뜨리더니 7회초에도 3점홈런을 날렸다. KBO리그 역사상 신인 최초 개막전 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는 순간이었다. 앞서 4회초 홈런성 타구를 낚아챈 박재용의 호수비만 아니었다면 개막전 최초 3연타석 홈런을 기록할 뻔했다.


우즈와 김동주가 데뷔전에서 홈런포로 강렬한 신고식을 하면서 OB는 13-7로 승리하며 산뜻하게 출발했다.


스프링캠프를 치르면서 김동주에게 “리노(Rhino·코뿔소)”라는 별명을 붙였던 우즈는 개막전 연타석 홈런을 보고는 김동주를 향해 “슈퍼스타다. 탤런트가 있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우즈가 한국선수 중 유일하게 인정하는 타자가 있었으니 바로 김동주였다.


우즈와 김동주는 개막전에서 더할 나위 없는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그러나 이후 고비가 찾아왔다. 시즌을 치르면서 슬럼프를 겪었다. 특히 바깥쪽 변화구에 약점을 보였다. 성급한 팬들은 “퇴출하라”, “2군 보내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기다림의 미학’ 김인식 감독은 인내심을 발휘하며 이들을 뚝심 있게 중심타선에 기용했다. 스스로 밤새 방망이를 돌릴 정도로 훈련벌레였던 우즈는 어느 순간부터 바깥쪽 공도 밀어 쳐서 홈런을 만들기 시작했다. 김동주 역시 정교함을 찾아가며 감독의 믿음에 보답하기 시작했다.


우즈는 한여름부터 홈런 생산 속도를 끌어올렸다. 줄곧 멀리 앞서나가던 삼성 이승엽의 홈런수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9월 13일 시즌 37호포를 기록하면서 마침내 이승엽과 타이를 이뤘다. 우즈는 당시 13경기에서 8개의 홈런을 몰아치는 괴력을 발휘했다. 이승엽은 8경기째 홈런포가 침묵해 타이를 허용하고 말았다.


그 시점에 OB는 109경기, 삼성은 120경기를 소화하고 있었다. 1998년은 팀당 126경기 치르던 시즌. 이승엽은 단 6경기만 남겨두고 있었고, OB는 17경기가 남아 우즈가 훨씬 유리해진 상황이 됐다.


이후 우즈는 잠시 침묵 모드에 들어갔다. 이승엽도 좀처럼 홈런을 추가하지 못했다. 9월 20일 잠실 해태전. 우즈는 마침내 시즌 38호포를 쏘아 올렸다. 6경기 만에 홈런을 추가하면서 11경기째 홈런수를 추가하지 못한 이승엽을 추월했다.


10월 1일 잠실 현대전. OB의 시즌 124번째 경기였다. 우즈는 0-1로 뒤진 4회말 무사 1루서 현대 에이스 정민태를 상대로 백스크린 약간 오른쪽을 스치는 비거리 140m 초대형 대포를 쏘아 올렸다. 9월 26일 사직 롯데전에서 41호를 기록한 뒤 3경기 만에 시즌 42호를 터뜨렸다. 이는 1992년 장종훈(당시 빙그레)이 작성한 한 시즌 최다홈런 41개를 넘어서는 KBO 새 역사였다.


우즈는 1998년 126경기에 모두 출장해 타율 0.305(452타수 138안타), 42홈런, 103타점을 기록하며 KBO리그 첫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그리고는 그해 KBO 정규시즌 MVP(최우수선수)를 차지했다. 최고령 다승왕(18승6패2세이브)에 오른 LG ‘노송’ 김용수와 2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MVP를 거머쥐었다. 베어스 선수로는 1982년 원년 박철순, 1995년 김상호에 이어 구단 역대 3번째 MVP가 됐다.


그러나 우즈는 골든글러브 1루수 부문에서는 삼성 이승엽에 밀려 탈락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겪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KBO 역사상 시즌 MVP가 골든글러브를 타지 못한 유일한 사례로 남아 있다.


1998년 페넌트레이스 MVP 주인공 타이론 우즈 ⓒ두산베어스


그해 김동주는 타율 0.265로 정교함에서는 다소 기대에 미치지 못했으나 24홈런, 89타점을 올리며 차세대 주포로서 기반을 만들었다.


여기에 4년 전 입단했던 ‘소년장사’ 심정수도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1995년 21홈런을 때리며 센세이션을 일으킨 심정수는 1996년에도 19홈런으로 베어스의 중심 거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1997년 부상으로 5홈런에 그친 뒤 1998년 부상에서 회복하며 타율 0.294, 19홈런, 73타점의 호성적을 올렸다.


심정수는 개막전을 비롯해 시즌 초반에는 하위 타선에 들어섰지만, 시즌 6번째 경기인 4월 19일 잠실 LG전에서 시즌 1호 홈런을 신고한 뒤 점차 중심타선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러면서 우즈~김동주~심정수로 이어지는 ‘우동수 트리오’가 탄생하게 됐다.


‘우동수 트리오’는 그해 85홈런을 합작하면서 상대에겐 그야말로 ‘공포의 삼총사’로 자리매김했다. 이듬해인 1999년엔 우즈(34홈런 101타점), 김동주(22홈런 84타점), 심정수(31홈런 110타점)가 99홈런과 295타점을 뽑는 가공할 시즌을 만들었다(우동수 스토리는 추후 베팬알백 두산 베어스 시대에서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막판 8연승 미러클 베어스0.5G 해태 제치고 가을잔치 티켓


홈런을 친 뒤 유지훤 3루 코치와 하이파이브를 하는 김동주 ⓒ두산베어스


사진 7) 홈런을 친 뒤 유지훤 3루 코치와 하이파이브를 하는 김동주


1998년 시즌에 앞서 OB는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 중 하나로 꼽혔다. 그러나 계산대로 되지 않았다. 에이스 김상진과 마무리투수 김경원이 부진하고, 권명철도 2군으로 내려가는 등 마운드가 흔들렸다. 주포 김상호도 일찌감치 전열에서 이탈했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으로 개막 첫 달에만 5할승률(7승7패)을 유지했을 뿐, 8월말까지 월간 승률이 줄곧 3할대와 4할대를 오르내렸다. 8월까지 시즌 43승53패2무(승률 0.448)로 꼴찌로 처졌다.


설상가상으로 9월 시작부터 1위 현대와 3연전을 펼쳐 모조리 패했다. 현대는 4일 OB를 3-2로 꺾고 정규시즌 1위를 확정했지만, OB는 씁쓸한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OB는 우천 취소된 경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잔여경기 일정이 벅찬 상황이라 4강 진출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 우선 탈꼴찌부터 생각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기적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두 차례 4연승을 올려 탈꼴찌에 성공하더니 9월 24일 대전 한화전부터 시즌 최종전인 10월 4일 광주 해태전까지 남은 8경기를 모두 승리하는 놀라운 막판 스퍼트를 펼쳤다.


특히 10월 3일과 4일 해태와 광주에서 치른 시즌 최종 2경기는 시즌 최고의 하이라이트였다. OB는 2일까지 6연승 속에 59승3무62패를 기록하며 5위까지 치고 올라간 상황. 4위 해태(61승1무62패)에 1게임차로 따라붙었다.


그렇더라도 해태는 2경기에서 1무승부만 기록해도 준플레이오프 티켓을 거머쥘 수 있어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고, OB는 2경기를 모두 이겨야만 가을야구를 할 수 있었다.


3일 경기에서 OB는 1-1로 맞선 9회초 승기를 잡았다. 2사 1·2루에서 정수근의 유격수 쪽 내야안타와 상대 실책으로 2점을 뽑아내 3-1로 달아났고, 9회말을 1실점으로 막아 3-2 승리를 챙겼다.


이어 추석을 하루 앞둔 4일. 일요일 낮경기였다. OB는 여기서 타선이 대폭발을 일으키며 해태를 11-5로 크게 이겼다. OB는 시즌 61승3무62패(승률 0.496)로 해태(61승1무64패)를 1게임차로 끌어내리면서 포스트시즌 진출의 마지노선 4위에 턱걸이하게 됐다.


믿기지 않는 기적. OB 베어스 시대의 마지막 페넌트레이스는 그야말로 ‘미러클 베어스’의 완결판이었다. OB는 1995년 페넌트레이스에서 0.5게임차로 LG를 제치고 1위를 할 때도 추석 연휴 광주 4연전에서 해태에 전승을 거두면서 기적을 만들었는데, 이번에는 시즌 최종 2연전에서 해태를 광주에서 잡고 다시 기적을 완성했다. 반대로 1980년대부터 왕조를 구축한 해태는 1984년 이후 14년 만에 처음으로 5위라는 낯선 순위표를 받아 들었다.



LG 덕아웃시리즈OB 베어스의 마지막 게임

1998년 팀을 이끈 김인식 감독과 김영덕 초대 감독 ⓒ두산베어스


OB는 비록 극적인 8연승으로 가을야구로 가는 막차에 탑승했지만, 그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다. 우천으로 추가 편성된 일정을 빡빡하게 소화하면서 선수들의 피로도가 급상승했다.


게다가 9월 29일에는 구단버스가 빗길에 전복 사고를 당하는 일도 있었다. 28일 롯데와 부산 야간경기를 마치고 광주로 이동하던 중 29일 새벽 1시께, 선수들을 태운 2호차 버스가 경남 하동군 금남면 계천리 부근 남해고속도로에서 빗속 커브길을 돌다 미끄러지면서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옆으로 넘어졌다.


다행히 큰 부상자는 없었지만 투수 이경필과 이혜천, 류택현 등이 타박상과 찰과상 등을 입었다. 이경필은 왼쪽 무릎이 부어올랐고, 이혜천은 왼쪽 정강이와 왼손 새끼손가락을 다쳤다. 천만다행이지만 OB로선 포스트시즌에서 선수의 가동폭이 좁아져 경기력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준플레이오프 상대는 공교롭게도 잠실 라이벌 LG. 1993년 준플레이오프 이후 5년 만에 가을잔치에서 만나게 됐다. 5년 전에는 1승2패로 져서 탈락했는데, OB로선 그 빚을 갚아야 할 기회를 잡았다.


10월 4일 최종전을 치른 OB는 4일간 휴식을 취한 뒤 9일 LG와 3전2선승제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을 맞이했다.


1차전에 OB는 선발투수로 강병규(시즌 5승1무10패, 평균자책점 3.63)를 내세웠다. 김상진과 박명환, 이경필 등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강병규가 정규시즌에서 LG에 나름대로 강한 면(2승2패, 평균자책점 2.25)를 보였기 때문이다. LG 선발투수는 최고령 다승왕 김용수였다.


1차전부터 숨 막히는 접전이 펼쳐졌다. 라이벌 의식까지 더해져 경기 흐름은 한순간도 예측할 수 없는 난전으로 이어졌다.


선취점은 LG가 올렸다. 탐색전도 없이 1회말 외국인선수 주니어 펠릭스가 우월 2점홈런을 터뜨리며 펀치를 날렸다. 가만히 있을 OB가 아니었다. 2회초 김동주, 심정수, 캐세레스의 3연속 안타와 연속 땅볼 등으로 3점을 뽑아내며 단숨에 3-2로 역전에 성공했다.


다시 LG가 4회말 3-3 동점을 만들었다. 강병규는 4이닝 3실점으로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OB는 6회초 캐세레스의 중전 적시타와 김민호의 2타점 우익선상 3루타로 6-3으로 앞서나갔다. 김용수는 그 사이 5이닝 4실점의 부진한 투구로 강판됐다. OB의 시즌 막판 8연승의 기세가 이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LG는 6회말 김재현의 중전 적시타와 OB 3번째 투수 이경필의 폭투 등으로 2점을 뽑고, 허문회의 좌전 적시타로 다시 6-6 동점을 만들었다.


9회에도 장군멍군을 불렀다. OB는 9회초 선두타자 정수근의 3루타와 김실의 사구로 무사 1·3루의 황금 기회를 잡았다. 타이론 우즈 타석에서 LG는 김기범을 내리고 외국인투수 마이클 앤더슨을 올렸다. 그런데 앤더슨이 보크를 범했다. OB는 7-6으로 앞서나갔다. 계속된 무사 2루. 그러나 OB로선 여기서 추가득점에 실패한 것이 아쉬웠다.


아니나 다를까. 9회말 LG가 반격했다. 7회부터 등판한 진필중이 선두타자 김재현의 중전안타를 내줬다. 심재학 이병규의 연속 볼넷으로 1사 만루. 김동수의 2루수 앞 땅볼로 7-7 동점이 이뤄졌다.


숨 막히는 접전 속에 연장 승부에 돌입했다. 10회말 LG 선두타자 이준용의 우전안타와 유지현(현 LG 류지현 감독)의 희생번트로 1사 2루. 여기서 결정적인 장면이 나온다. 김재현의 2루수 쪽 땅볼을 수비의 귀재 에드가 캐세레스가 가랑이 사이로 빠뜨리고 말았다. 2루주자가 홈을 밟으면서 LG가 8-7 승리를 가져갔다.


KBO 포스트시즌 역사상 최초의 끝내기 실책. 캐세레스를 추억할 때면 지금도 1998년 준플레이오프 1차전의 그 끝내기 실책 장면부터 떠오른다. 그만큼 OB 팬들에겐 통한의 장면으로 남아 있다.


캐세레스는 수비 하나만 놓고 보면 최고의 플레이어였다. 당시 OB뿐만 아니라 다른 팀 선수들도 캐세레스의 메이저리그급 수비를 보고 새로운 교본으로 삼았을 정도다. 젠틀맨이었고, 성실한 자세와 야구에 대한 진지한 태도 또한 귀감이 되는 선수였다.


캐세레스는 진심으로 KBO리그에서 성공하고 싶어 했다. 트라이아웃에서 OB에 지명되자마자 라식 수술부터 하고 한국에 들어왔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이 어쩌면 패착이 됐는지 모른다. 야간경기 때 빛 번짐 현상으로 타격 시 어려움을 겪었다. 첫 시즌에 타율 0.250, 2홈런, 36타점에 그쳤다. 전형적인 거포 스타일의 외국인선수가 아니라 수비와 주루(18도루) 등에서 팀에 도움을 준 선수였다.


OB로선 1차전 연장 패배의 결과는 뼈아팠다. 1989년 도입된 3전2선승제 준플레이오프에서 1차전 승리팀이 100%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통계를 본다면 OB로선 벼랑 끝에 몰린 처지가 됐다.


1998년 준플레이오프 2차전 선발로 나선 김상진. OB 베어스 시대의 마지막 경기 선발투수가 됐다. ⓒ두산베어스


2차전 선발투수는 LG 최향남과 OB 김상진. 초반에 승부가 갈렸다. 김상진은 1회초 3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잡으며 쾌조의 스타트를 끊었으나, 2회초 LG 김동수에게 좌월 솔로홈런을 맞았다. 이어 3회초 한꺼번에 7점을 내주면서 승기를 넘겨주고 말았다.


OB는 0-11로 뒤진 7회말 2점을 내고, 9회말 3점을 뽑으면서 마지막까지 반격을 시도했으나 결국 5-14로 패하면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OB는 시즌 막판 8연승으로 포스트시즌 진출 티켓을 거머쥐는 기적을 만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선수단 내에 크고 작은 부상 선수가 속출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선수단 버스 전복 사고까지 일어나면서 전력이 제대로 가동되기 힘든 상황이었다. 손가락 등을 다친 이경필, 이혜천, 류택현 등이 준플레이오프 마운드에 올랐지만 모두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패장 김인식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아쉬움을 나타냈다.


“부상선수가 너무 많아 정상적인 경기를 할 수 없었던 것이 2연패로 이어졌다. 특히 박명환 등 투수들이 줄줄이 부상을 당한 것이 아쉽다. 그나마 투혼을 잃지 않고 잘 싸워준 선수들이 고맙다. 내년 시즌에는 더 좋은 모습으로 팬들을 만날 것을 약속한다” <조선일보>


“1차전에 석패한 것이 못내 아쉽다. 원래는 1차전에 박명환을 투입하고 2차전에 강병규를 내세울 생각이었으나 박명환이 부상으로 나올 수 없어 차질이 있었다. 선발과 마무리투수를 보완해 내년 시즌에 대비하겠다.” <동아일보>


1998년 준플레이오프는 유니폼 가슴에 ‘OB BEARS’라는 팀명을 달고 뛴 마지막 경기였다.


OB 베어스는 늘 최초의 팀으로 우리에게 기억된다. 최초로 프로야구단을 창단하고, 최초로 어린이회원을 모집했다. 최초로 우승 역사를 썼고, 최초로 MVP(박철순)와 신인왕(박종훈)을 배출했다. 최초로 이천에 2군 전용구장을 지었고, 최초로 메이저리그팀(세인트루이스)과 자매결연을 맺었다.


그렇게 최초의 역사와 기록을 써오던 ‘OB 베어스’는 17년의 세월을 마무리했다. 1999년부터는 모기업인 두산그룹의 이름을 따서 ‘두산 베어스’라는 팀명으로 새출발하게 된다.


[베팬알백_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는 이로써 OB 베어스 시대 50가지 이야기를 완성했습니다. 1982년 1월 15일 KBO 최초 프로야구단으로 출발한 두산 베어스는 창단 40주년을 맞아 [베팬알백] 50가지 이야기를 책으로 묶어 출간할 예정입니다. 팬 여러분의 많은 기대와 성원 부탁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이어질 두산 베어스 시대 50가지 이야기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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