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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 에포크 Mar 30. 2024

초보 반장 적응기

그리고 엄마의 반성문

잘 지나셨나요?

정신없이 바빴던 새 학기 3월이 어느덧 지나가고 있네요.

그간 첫째 딸의 중학교 입학과 막내 아들내미 새 학년 준비로 정말 바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 아들의 기존 특수학급이 아닌 새 특수학급 교실배정으로 아들이 천천히 적응할 수 있게 간헐적 수업을 했고, 개별화회의(일명, IP 회의)를 통해 아들의 한 학기 수업 배정과 스케줄 또는 배울 내용을 정하고, 제가 염두에 두었던 (아들의 성교육 부분) 행동에 대한 이해와 양해, 과잉행동에 대한 대응방법 등을 논의하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가족에게는 조금 새롭고 특별한 사건이 하나 있었더랬습니다.

어느 날 딸이 학급회장이 되어 왔습니다.

그렇게 딸의 생애 첫 초보 반장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 나 이번에 반장 선거에 꼭 나갈 거야."


그냥 지나가는 말인 줄 알았습니다.

그냥 하는 말이겠거니 했어요.

설마, 그럴 리가... 하고 지나쳤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희 부부는 어찌 보면 대단한 내향형(요즘 말하자면, 대문자 I)들입니다.

적극적으로 앞으로 나서거나 자기주장을 강력하게 어필하기보다는 이야기를 듣고 상대에 맞춰 신중하게 말하는 쪽입니다. 스스로도 인사이더는 절대 아니고 아웃사이더에 가까운, 취향독특한 마이너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나이를 어느 정도 먹고 가치관이 뚜렷해지면서 이제야, 이렇게 글로 쓰면서 표현하며 용기를 내봅니다만, 전 딱 이 정도 선일뿐입니다.

주목받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부담스럽고, 튀지 않으려 최선을 다해 노력합니다.

4명 이상 모이는 자리는 여전히 꺼려지지만 꼭 참여해야 하는 자리라면, 큰맘 먹고 딱 한 번만 참자는 마음으로 나가며, 이런 자리는 한 해 손꼽히는 이벤트 중의 이벤트라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이런 자리를 한번 행사처럼 치르고 나면 집에서 한 이틀은 조용히 잠적해야 치유되는 내향형의 대표적 표본이랄까요...ㅎㅎ

오히려 뒤에서 조용히 서포트하거나 매니지먼트하는 게 마음이 편합니다. 그래서 여태껏 살아오면서 학교에서 써본 감투는 초등학교 시절 5학년때 부회장, 중학교 2학년 때 미화부장 정도가 다였습니다.

대학교 축제 때도 음식 만드는 쪽이거나 세팅하거나 재료 준비하는 쪽이지, 앞에 나와 손님을 응대하는 팀 쪽은 아니었어요.

그렇다고 친구를 아예 못 사귀는 정도는 아니고, 그래도 나름 친구들 사이에서는 솔직하고, 비밀은 잘 지키는 친구, 또는 이야기나 상담을 잘 들어준다는 평판으로 어느 정도 평이한 사교 생활 중이긴 합니다.

남편은 저보다 더 내향형이라 회사 생활이 아니었다면 사람들과 어울리는 방법을 제대로 터득도 못 했을 것 같은 전형적 대한민국의 무뚝뚝한 경상도 출신 공대 남자(대한민국 경상도 출신 공대 남자분들께 미리 사죄드립니다.)의 이미지 그 자체입니다.ㅎㅎ


그래서 당연히 우리 부부 사이에 태어난 아이니, 딸도 저희와 같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초등 생활하면서도 저학년 때까지만 해도 조용하고 부끄러움이 많았어요.

고학년이 되면서 딸이 활달해지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외향적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6학년 때 반장하고 싶다고 했을 때도 지나가는 말인 줄 알았고, 오히려 제가 "반장 되면 할 일도 많고 피곤해." 하며 말리는 쪽이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한 이유는, 아이가 좀 더 가볍고 즐겁게 학교 생활 하기를 바랐고 반장이라는 책임이 힘들 것 같았어요. 저는 '직책'이란 부담스럽고 책임 막중한 무거운 일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딸이 중학교 들어가자마자 "이번에는 꼭 반장선거에 나갈 거야."란 말을 했을 때, 저는 이번에도 안일하게 흘려 들었어요.

그게 반장 되고 싶다고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친구들은 새 학기, 새로운 체제, 새로운 생활과 새 반에 적응하기도 정신없이 바쁜데 직책까지 짊어지면 제대로 적응도 못하고 힘들 것 같았어요.

괜히 나섰다가 손해 볼 것 같은 것도 좀 싫었고, 웬만하면 저의 학창 시절처럼 조용히 튀지 않은 반의 일원이길 바라는 마음도 좀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생케어로 정신없는데 여기서 더 일이 늘어날까 조바심이 난 부끄러운 저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이번 학기는 "좀 상황을 보고 결정하렴", "일단 적응부터 하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자" 등의 말을 했었어요. 그래도 반복적으로 반장을 해보고 싶다는 말에 내심 '내 딸이 맞나?...'란 생각도 잠깐 했었더랬어요. 어렸을 때의 저와 워낙 달랐으니까요.

그런데 몇 번이고 반장 선거에 나갈 거란 말을 했을 때, 딸이 확고하고 단호한 말투여서 좀 놀라기는 했어요.

초등 시절 못해봤던 학급회장에 대한 열의가 이렇게 있을 줄 모르고 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 모든 상황을 제 관점에서, 제 방식대로만 생각했던 거죠....




사실, 저희 딸은... 이제야 돌이켜보면, 어릴 때부터 저희 부부와는 다른 특별한 점들이 있긴 있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사람 좋아하는 강아지 같은 성격이죠.

남편이나 저 특히 아들은 굳이 비유하자면, 고양이들에 가깝거든요.

혼자 있는 거 좋아하고, 마음 내킬 때만 사람 찾으며 집에 있는 게 그렇게 즐거운 그런 고양이들이요.

딸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그렇게 좋아합니다.

선천적으로 밝고 명랑한 사교적인 성격이라 어릴 때 어느 키즈카페에 데려가도 반드시 누구 한 명과는 친구가 돼서 돌아왔어요. 어떨 때는 코피가 터지는데도 친구랑 놀려고 휴지를 꼬아 꼽고는 늦은 시간까지 놀던 아이 었답니다.ㅎㅎ

이런 성격 탓에 간혹 친구들에게 상처도 잘 받고, 그 때문에 울기도 했던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딸은 여전히 늘 주변 사람들의 좋은 점들을 먼저 발견할 줄 알고, 그 점을 또 좋아하며 쉽게 다가갑니다.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밝게 웃어주며 힘든 저의 일상의 쉼이 되어주는 아이입니다.


"이번에 왜 학급회장이 꼭 되야겠단 생각을 하게 됐어?"


"우리 반에 내 동생(이름)이랑 비슷한 발달장애 도움반 친구가 있는 거야. 동생(이름)이 많이 떠오르더라.

이번에 도움 주는 짝꿍 하는 남자애가 있는데 그 애가 서투르게 도와주는 걸 보면서 아, 저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에 몇 번이고 답답한 거야.

알다시피 엄마, 난 경험 많은 경력직이잖아.ㅎㅎ내가 막 알려주고 싶더라.

우리 반이 대체적으로 조용하기도 해서 우선 밝은 분위기로 만들고 싶고, 동생을 떠올리게 하는 그 친구도 우리 반 모두가 함께 할 수 있고, 모두가 친해지는 반으로 내가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딸의 반장 선거 당시 발표한 공약 글


딸의 말과 공약글을 읽으며 울컥 해졌습니다.

이 울컥임에는 아마 여러 가지 생각들과 감정들이 교차해서인데요.

딸이 제가 생각한 것보다 더 깊은 생각을 하는 아이라는 안도감과 그에 수반할 책임의 무게에 대한 염려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 생각들이 가지를 치며 이어져, 제가 경험해 온 이런저런 책임들과 무게감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이미 아들을 케어하며 받아온 싸늘한 시선들과 편견들, 그리고 학교에서 수시로 분리조치를 받으며 또래와 섞이기 힘든, 어쩌면 앞으로 세상에서 섞이려고 해도 섞일 수 없는 아들의 차가운 현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을까요?

저도 모르게 딸 앞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아니요... 필시, 푸릇푸릇한 중학교 1학년 어느 반에 이루어질 '모두'와 '함께'가 가능한 세상을 꿈꾸며, 그 구심점이 되어 학급회장을 해보겠다고 포부를 당당히 밝히는 딸에게 감사와 위로를 받았기 때문일 겁니다.


딸은 촌스럽게 펑펑 울어버린 철없는 이 엄마의 눈물의 의미를 알까요?

딸은 어른스럽게 절 가만히 안아주었습니다.

그렇게 딸과 저의 포옹은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한 동안 묵묵히 이어졌습니다.




초보 반장인 딸은 요즘 정신이 없습니다.

생애 첫 반장직이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경험 중입니다.

반 친구들의 이름을 번호 순서대로 모두 외우고, 점심시간 줄 통솔을 하며 조그맣던 목소리를 힘껏 목청을 키워도 봅니다.

교복도 더 단정히 입으려고 몇 번이고 체크하고, 늦잠꾸러기였던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려 노력합니다.

친구들에게 먼저 인사하고, 한 번이라도 먼저 말을 걸어본다고 합니다.

청소도 늦게 까지 하고, 하교도 제일 늦게 합니다.

한 번은 학급회의 진행 순서를 몰라 버벅거려서 오히려 부반장인 친구와 반 친구들이 도와주었다는 말을 전해 들으며 서로 깔깔 웃어봅니다.

다행히 선생님과 반 친구들이 많이 도와주며 더 친해졌다고 합니다.

저는 딸이 이번 한 학급의 반장 경험을 통해 누군가를 이끄는 리더의 경험보다는 모두가 함께 하는 즐거움과 보람을 경험했으면 합니다. 어느 방향이든 딸에게는 좋은 경험치가 될 것라 믿습니다.

이런저런 초보 반장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학교가 재밌고 하루하루가 즐겁다고 말하는 딸을 보며...

한 때, 딸이 남 앞에 나서는 걸 오히려 말리며 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저의 좁은 마음을 반성하게 되었어요. 아무리 자식이라도 나와 같을 리 없는 독립적인 인격체임을 새삼 다시 깨닫는 경험이었습니다.

좀 더 딸의 고유의 특성을 인정해 주고 스스로 해내는 모습을 더 격려해 주며 딸의 장점이 더 블루밍 할 수 있게 엄마인 저도 노력해야겠다는 반성을 했습니다.


딸이 공약으로 세운 '나 혼자 먼저'보다는 '우리 함께 같이'라는 슬로건처럼 반짝반짝 빛이 나는 같은 반친구들과 딸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 사진 이외의 사진이나 그림은 네이버등의 이미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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