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손아귀
한 집에서 동생과 살아왔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우리는 너무나 오래 각자로 살아왔다. 그래서 더욱 엄마와 동생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냥 알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엄마의 만행이 퍼즐처럼 맞춰졌다. 그곳에서 빨리 빼내주지 못했음에 가슴이 먹먹했다. 엄마와 사는 삶은 피곤 그 자체였다.
통금시간 9시
엄마는 통금시간을 저녁 9시로 정했다.
이유는 엄마가 9시에 자야 하기 때문이다. 들어가면 현관문 소리와 물소리에 잠을 깰 수 있으니 그전까지 들어와야 했고, 8시 30분부터 언제 올 것인지, 어디쯤 왔는지 동생을 재촉했다. 동생은 숨 가쁘게 달려오거나, 아예 집에 들어오는 것을 포기하고 친구집에서 자는 것을 택했다.
맛이 달라진 치킨집 사장과 면담
엄마는 단백질을 보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주 1회 삼겹살 파티, 한 달에 한번 치킨을 먹는데 어느 날은 치킨이 그 집 맛이 아니라며 다시 시켜달라고 했다. 같은 치킨집이지만 맛이 다르다는 엄마의 잔소리에 치킨 사장이 바뀌었는지 전화로 확인했다. 사장은 바뀌지 않았다. 엄마는 동생의 눈으로 사장이 바뀌었는지 보고 오라고 했고, 직접 그 치킨집에 가서 사장을 확인했다. 바뀌었는지 안 바뀌었는지 이전 사장을 보지 않았으니 알 수 없었지만, 갔다 왔다는 증빙을 요구했다. 결국 치킨집은 항상 우리 전화에 새 기름을 튀겨 주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수제 비누가 불러온 가내 수공업
폐식용유와 가성소다를 섞어 비누를 만드는 법을 배운 엄마는 환경에 도움이 된다는 자부심에 꽤나 많이 비누를 만들어 대기 시작했다. 욕조에는 비누를 만들다가 고형이 되지 못한 가루들이 있었고, 이것을 개어서 세탁기에 넣어서 사용했다. 이런 취미를 나쁘다 할 수 없는데, 엄마의 가내 수공업 행태의 빨래세제는 욕실의 반을 사용할 수 없게 했고, 세탁기 사용을 위해 미리 물을 내려서 세제를 풀어 녹인 뒤 세탁기를 돌려야 하는 가내수공업 빨래를 하게 되었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세탁세제가 잘 녹지 않아 헹구는 것을 다시 하는 일도 비일 비재 했다. 만들어 놓은 세제가 많다 보니 동생은 손빨래를 하는 일도 많아졌다.
떡값 30만 원
이웃과 나눠 먹기를 좋아하는 엄마는 언제부터인가 삼삼오오 모이는 마실에 가고 싶어 했다. 동네 어르신들이 모여서 밥도 해 먹고 화투도 치는데 빠지고 싶지 않아서 종종 놀러 간다 했다. 맨손으로 가기 뭣해서 집에 있는 휴지나, 과일 등을 싸가다가 어느 날은 동생이 사 온 떡을 나눠 주기 시작했다. 고급 떡이라 맛이 좋았던 모양인지 엄마는 마실용 떡값은 한주에 7~8만 원씩 들어가기 시작했다. 떡 말고 빵이나 다른 것을 가지고 갔더니 다들 떡을 찾더란다. 떡값으로 한 달에 30만 원이 들었고 고스란히 동생 주머니에서 나가고 있었다. 이 사실을 내가 뒤늦게 알았고, 엄마에게 떡은 너무 비싸니 안되고 과자나 그런 거 가끔 가지고 가라고 한소리 보탰다. 엄마는 떡 없이는 마실을 가기 힘들었는지 드물게 발걸음을 하더니 결국 마실을 가지 않았다.
가슴 후비는 말본새
엄마는 내가 장녀라 항상 어려워했다. 결혼할 당시에 장남에게 시집은 절대 못 보낸다는 이유로 반대를 하다가도 순순히 허락해 주는 유한 모습의 엄마였다. 그런데 동생에게만은 유독 고집을 피웠다. 한두 번 동생이 엄마 시중을 들다 보니 이제는 동생에게 이래라저래라 시키는 것이 많아졌다.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데 어떤 대목에서는 동생이 해주지 못하면 " 내가 죽기를 바라는 것이지 " " 내가 고생해서 키웠는데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냐" " 나한테 돈 쓰는 게 그렇게 아깝냐" 울고 불고 난리를 쳤다. 화가 나서 던진 말은 독을 품고 동생의 심장을 쑤시기가 여러 번이 있다.
이별여행
동생은 엄마가 늙어서 이곳저곳이 성치 않아 지자, 딸로서 간병인처럼 엄마를 돌봤다. 직장에서 돌아오면 무릎 통증 때문에 다리미로 본인 무릎을 살살 문지르고 있었고 그걸 본 동생이 대신 다리를 주물러주는 일을 했다. 동생이 엄마의 다리를 주무르는 것은 일상이 되었다. 엄마가 고관절이 부러져 입원을 했을 때, 휴가를 내고 동생이 2주간 엄마를 간병했다. 코로나 상황인데 교대하기도 쉽지 않았고, 나보다 본인이 하는 게 속편 하겠다면서 자청했다. 너무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 뒤로 세균 간염으로 개인 병원을 알아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간병인을 쓰자고 하는 걸 거절하고 동생이 간병을 자청했다.
엄마와 마지막 여행이 될 것 같아
그냥 호텔에서 둘이 지낸다고 생각할게
병실의 간이 베드에서 잠을 자느라 얼마나 불편할까. 전문 간병인도 아닌데 옆에서 하는 것을 보고 배우며 간병을 하면서 몸도 마음도 곪고 있었다. 나도 참 못된 언니지. 차마 동생을 대신하겠다고 말 못 했다.
(이 글을 쓰는 순간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엄마는 동생과 대학병원에서의 한 달 호텔 생활을 마무리하고 요양병원으로 재 입원 했다.
엄마와 동생은 이제 분리되었다. 동생은 요양 병원에 입원시킨 것도 죄의식을 느끼며 계속 망설였다.
엄마가 불쌍해서 안 되겠다는 것이다. 요양병원 갇혀서 치매가 올 것이고, 계속 누워있다가 아예 걷지도 못하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인터넷 카페에 보면 모든 것이 그런 수순으로 될 것이므로 본인이 최대한 돌봐야 한다며 며칠을 망설였다. 단호하게 말해야 했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사는 거야. 너도 이제 네 삶을 살아야 해.
아.. 그렇구나, 언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언니, 나는 엄마가 불쌍해.
난 네가 불쌍해 미치겠다.
나의 쓴소리와 함께 엄마와 동생은 요양병원이라는 의료시스템으로
확실히
다행히
분리되었다.
그리고 3년이 흘렀고, 모두가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