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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리바라기 Jul 08. 2024

책들의 시간 93. 엉망으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 일기떨기, 천선란, 윤혜은, 윤소진_한겨레 출판

  이 책이 끌렸던 이유는 표지 때문이다. 여름날 여유로운 어떤 풍경의 일러스트, 세 동물의 늘어짐, 흔들리는 커튼으로 알 수 있는 바람, 그리고 선풍기, 누워있는 강아지와 배 위에 올려져 있는 책. 

  주말이면 소파에 누워 책을 읽다가 스르르 잠이 들 때가 많다. 그럼 안경도 벗지 못한 채 손은 늘어트리고, 책은 배 위에 올려둔다. 그러다 잠이 깨면 뒤척이다 책을 떨어트린다. 그럼 다시 부스스 일어나 누운 채로 책을 읽는다. 그런 풍경의 어떤 모습이 떠오르는 일러스트 때문이었을까? 이 책이 읽고 싶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를 찾자면, 언젠가 독서 모임으로 읽었던 책 ‘천 개의 파랑’ 작가 ‘천선란’이 참여한 책이라는 것. 그래서 읽어보아야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재미있게 잘 읽었다.     

 

  책 ‘엉망으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는 팟캐스로 진행된 <일기떨기>에 소개된 내용과 참여한 사람들의 일기로 구성된 책이다. 서로의 일기가 공개되고 그에 대한 진행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주제에 대한 자유로운 수다. 책을 읽으면서도 팟캐스트 방송을 듣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물론 <일기떨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은 없었지만 책을 다 읽고 찾아봐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소설가, 책방 운영가, 문학 편집자가 모여 자신의 일기를 공유하고 수다를 떠는 것.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었다. 

 

1. 마음에 품고 사는 섬


  우리가 머무는 흙집으로 돌아와 팬에 섬 가지를 구웠다. 도시에서 본 가지보다 길이가 짧고 뭉툭한 게 어쩐지 둔해 보이기까지 한 가지를 댕강댕강 잘라 소금 간을 살짝, 그 위에 후추를 뿌린 후에 저녁을 먹었다. 가열된 팬에 가지도 굽고, 새송이 버섯도 굽고, 어제저녁에 먹다 남은 토마토도 구웠더니 내내 허했던 속이 은근하게 데워지는 느낌이었다. 이렇듯 섬에 몇 번 오가는 것만으로도 나의 일상은 한결 더 가뿐해진다. 가리는 것 없이 넉넉해지는 마음이 금세 또 빈곤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잠시 마음을 둘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온전해졌다. (44쪽)


  윤소진 작가의 일기였다. 마음에 품고 사는 섬 하나, 얼마 전 참 존경하는 지인이 청산도에 다녀왔다고 말씀해 주신 적이 있었다. 반딧불이를 보러 다녀왔다고 하셨다. 이름만으로도 푸르름이 확 드는 청산도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는데, 주변에 다녀왔다는 사람이 있으니 괜스레 궁금해졌다. 그런데 이렇게 책을 읽는데 청산도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참 재미있는 우연들이 나에게는 종종 일어난다. 선물을 받은 기분. 


  윤소진 작가가 마음에 품고 사는 섬은 청산도였다. 섬에서의 일상. 가지를 구워 먹고, 새송이 버섯도 구워 먹고 토마토도 구워 먹는 하루.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곤했던 어떤 마음이 넉넉함으로 채워지는 기분. 다시 빈곤해진다 할지라도 그렇게 채워지는 순간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을까? 


  나에게는 그런 장소가 있나, 곰곰이 생각해 본다.      

  교사에게는 방학이라는 시간이 있다. 교사가 아닌 남편이 보기에 나의 방학은 그냥 온전히 ‘좋겠다. 부럽다’ 정도이다. 하지만 나에게 방학이란 정말 몸과 마음이 회복되는 시간이다. 방학이 다가올수록 몸이 피폐해짐을 느낀다. 계속되는 두통, 업무의 과중, 그리고 목소리도 잘 안 나오고, 발걸음도 느려지며, 일과 삶의 균형이 완전히 깨져 일에 매몰되는 경우가 많은 시기. 학기말에 해야 할 업무들이 많기는 하다. 그러면서도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에 대한 계획과 준비도 필요하고. 그래서 7월이면 ‘아, 몸이 방학을 원하는구나’ 이렇게 알게 된다. 참 감사한 일이다. 여름의 무더위와 겨울의 추위, 학교 교육과정의 구성으로 인해 방학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렇게 맞이한 방학 동안 2학기 수업 준비도 하고, 교육청 공문 관련 업무처리도 하고,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여행도 다녀온다. 마음에 뭔가 꽉꽉 채워 넣어야, 하나하나 꺼내가며 다시 2학기를 살아낼 수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십여 년. 지내왔다. 


  작가에게 ‘청산도’가 회복의 시간을 가져오는 장소였다면, 나는 방학이 회복의 시간인 것이다. 아직 마음에 품은 그런 장소는 없다. 책을 읽으면서 나에게도 그런 장소가 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제 만들어 보아야겠다. 마음에 품을 섬 하나를.      


2. 지금 힘들구나, 깨닫는 순간


  그런데 그날은, 느슨해진 동공으로 무표정하게 차창을 응시하는 내 모습을 확인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생각이 멈추고, 마음도 멈추고, 오직 음악만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공간에 갇힌 것 같은 외딴 기분. 의도적으로 현실과 거리를 두는 자의적 멍 때리기가 아닌, 갑자기 퓨즈가 나간 느낌이랄까.

  이런 순간이 찾아올 때 비로소 나는 내가 지금 힘들구나, 깨닫는다. 스스로의 노력이나 힘듦을 대체로 부정하고 축소시키는 편이지만 이때만큼은 백기를 든다. 인정. 그래, 나 너무 힘들어. 이리저리 플레이리스트를 바꿔가며 기분을 띄울 기력도 없이 버스나 지하철 좌석에 몸을 맡긴다. 눈을 감으면 언덕에서 빠르게 굴러가는 빈 깡통이 그려진다. (63쪽)


  윤혜은 작가의 일기이다. 작가는 지금의 시기를 ‘엉망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시기라고 정의하고 있다. 막상 뿌듯하거나 보람된 마음 없이 지금보다 더 애써야 할 것 같은 피로하고 막막한 기분으로 열심을 증명하는 시간, 자신을 돌보는 것은 소홀하면서도 일상은 평탄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런 시간들을 살아내는 것을 작가는 엉망으로 열심히 살아간다고 표현한다.


 ‘엉망으로 열심히’ 

  나도 지금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과 삶의 균형을 찾고 싶다, 생각한 것도 사실 몇 년 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열심’으로 나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했던 시간도 있었고 해야 할 것들에 치여,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던 시간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도 잊은 채 살았다. 하지만 일과 삶의 균형을 가치로 삼고 노력하면서 나는 지금. 지금의 나의 시간이 참 감사하고 좋다. 아직 일이 많을 때에는 주말에도 일을 가져와 집에서 하긴 하지만, 그래도 학교 일은 학교에서 끝내겠다는 마음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은 참 중요하다. 매번 그리 느낀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며, 어떤 일 앞에서 망설이고, 어떤 일에 먼저 나서는지, 어떤 말을 들었을 때 상처를 받고 언제 기뻐하는지, 좋아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 사람인지, 끝끝내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은 무엇이며, 친한 사람들과 있을 때의 표정과 말투, 그렇지 않은 순간에서의 자세 이런 것들까지. 자신을 알아가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자신의 상태, 즉 힘들구나, 그렇게 깨닫는 순간은 바로 음악이 들리지 않을 때였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친한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나는 이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스스로 언제 힘들구나 아는 것, 중요한 것 같아요. 근데 나는 사실 잘 모르겠어요.”

  이 말을 들은 선생님께서 “혹시 책이 읽히지 않을 때 아닐까요?”라고 말씀하셨다. 곰곰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다. 책을 못 읽은 날, 일기를 쓰지 못한 날, 그런 날이 나에게는 결국은 일에 치여 일상을 살아내고 있지만 나를 돌보지 못하는 날이구나, 그런 마음.      


3. 정리     


  재미있게 읽었다. 일기나 편지를 읽는 일은 내밀한 어떤 친밀감을 느끼게 만든다. 특히 책을 읽으면서 천선란 작가의 작품에서 느꼈던 어떤 갈등을 대하는 담담함, 그것이 작가의 생각과 맞닿아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젊은 작가의 용기 있는 움직임들이 멋져 보이기도 했다.      


  그 시기에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어요. 물론 너무 급할 필요는 없지만, 조금 미성숙할 때 도전해서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는 일들이 있는 것 같거든요. 그리고 제가 오랫동안 타오르지 않을 것도 알고요. 분명 어느 순간 나의 모든 불을 잠시 끄고 딱 하나의 불씨만 키워둘 거라는 사실을 인지하면 조금 더 대범해지는 것 같아요.(182쪽)


  그 시기에만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용기. 타오르는 불꽃들이 오래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자각, 그리고 결국은 딱 하나의 불씨만 키워둘 거라는 사실. 

  나의 삶도 그런 길들을 향해 걸어왔고, 또 꺼질 어떤 불씨들에 마음을 다스리는 일상을 살고 있으며, 여전히 타오를 하나의 불씨를 찾으며 때로는 도전의 길을 걷는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삶을 사랑할 수 있다. 오늘은 감사한 마음이 온전히 드러나게 일기를 쓰고 자야겠다. 


[이야기 나눠 보기]

1) 마음에 품고 사는 섬이 있습니까? 지친 몸을 이끌고 갈 수 있는 자신만의 여행지가 있다면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2) 지금 힘들구나, 그런 깨달음의 순간이 있습니까? 그때는 언제이며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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