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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시간 112.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

# 월급 사실주의 동인_남궁인 외_문학동네

by 벼리바라기
인성에 비해_사진.PNG

제목을 보고 언제 꼭 한번 읽어야지 다짐했던 책이었다. 읽을 때는 시간이 조금 많이 걸렸지만, 다 읽고 나서는 가슴을 꽉 누르는 어떤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책이 출간 의도에 잘 맞춰 제작되었구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월급 사실주의’라는 문학 동인과 이 단행본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바는 있는데, 다른 참여 작가들도 그 생각들에 다 동의하는지 자신이 없다. 내가 대표로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표 같은 건 안 정했고 앞으로도 정하지 않으면 좋겠는데, 그 또한 내 개인 의견이다.

월급사실주의라는 이름은 다분히 1950~1960년대 영국의 싱크대 사실주의를 의식했다. 지난해 동인 참여를 제안하면서 작가 분들께 미리 말씀드린 문제의식과 규칙은 있다. 문제의식은 ‘평범한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사실적으로 그리는 한국소설이 드물다. 우리 시대 노동 현장을 담은 작품이 더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 기획의 말을 대신하여 중, 장강명


책의 맨 뒤에 실려있는 ‘기획의 말을 대신하여’ 부분을 읽고 나니, 이 책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우리 시대 노동 현장을 담은 작품들이 더 나와야 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은 무게감이 있다. 그래서 아프게 다가온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삶의 모습을 소설 속 인물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동인’, 1920년대와 30년대의 문학사를 공부할 때 많이 들었던 ‘동인’, 그 동인이 지금도 있구나, 그런 마음에 재미있고 좋았다. 게다가 ‘월급 사실주의’라니. 이렇게 매력적인 이름이 있다니, 감탄했다.


처음 제목을 보았을 때는 사실 반감도 들었다.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들’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내게는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사는 일이란 밥벌이를 위한 것이란 생각과 함께 다양한 직군의 저마다의 모습에서 한 번쯤 만나는 되는 인간 유형을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반성하게 되는 순간도 많기에, 이 소설이 지향하는 바를 향한 공감이 더 커진 것도 사실이다.


1. 나의 사회적 가면.


그렇게 말할 때 진영의 마음이 텅 비어 있다는 걸 눈치채는 사람은 없었다. 어떤 이들은 가족의 호의에 기대고, 서로에게 필요한 조언들을 하며 단단하게 얽힌다는 걸 진영도 머리로는 이해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자신이 속했던 세계의 풍경만을 떠올릴 수 있을 뿐이었다. 그 세계엔 마트에서 캐셔로 일하는 어머니와 주물 공장에서 공장장이라는 허울 좋은 직함을 달았으나 봉급이 오르지 않는 아버지가 있다. 진영은 그들을 보는 동안 삶이란 성장의 축적이 아니라 그저 그때그때 문제를 안고 육박하는 것일 뿐이며, 어떤 삶은 개선되지 않고 줄곧 서툰 채로 흘러만 간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는 그 세계를 실감할 때 진저리 쳤다. <중략>

그거 재미있다는 듯이, 다른 부서원들은 무슨 말인지 제대로 듣지 못한 채로 따라 웃었다. 진영은 웃지 않았다. 웃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잘 웃을 것, 그냥 웃을 것, 그래야 인성 좋아 보여. 일도 잘 풀리고. 순오가 해 줬던 조언이었다. 진영은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연습 삼아 미소를 지어보곤 했다. 젊은 분이 짠하잖아요. 노트에 적힌 멘트들을 연습하면서였다. 테이블 끝에서 순오가 옆자리 직원을 붙들고 무슨 농담을 주고받았는지 깔깔거렸다. 아주 잠시 동안, 진영은 그곳에서 아무 표정도 없는 사람이었다.

-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_임현석


며칠 동안 정말 많이 웃었다. 웃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회식, 술자리. 술을 잘 마시지 않고 사실 왜 마시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마시고 싶은 순간들이 있긴 하다. 참 좋은 사람들이랑 오래 이야기를 하고 싶은 순간들. 하지만 이번엔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업무의 연장, 나에게 회식은 그런 의미가 강하다. 그럴 땐 웃고 싶지 않아도 웃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 굳이 말을 하지 않고 웃는 것만으로 많은 것을 대신할 수 있다. 그게 직장인의 처세술이다.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은 편의점 본사에서 일하는 청년의 이야기이다. 편의점을 관리하면서 편의점 점주를 대하는 방법과 태도를 상사로부터 배운다. 영혼 없는 호응. 잘 웃을 것, 그냥 웃을 것, 그래야 인성이 좋아 보인다는 것.

하지만 진영 삶의 바탕은 자신이 속했던 세계의 풍경 안에서 형성되었다. 어떤 삶이란 성장의 축적이 아니라 그저 그때의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는 것, 줄곧 서툰 채로 흘러갈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편의점을 꾸려가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직시하고도, 그저 웃음으로 무장한 위로만 할 뿐이다. 진심이 아닌. 마음은 텅 비어 있는 채로.


나의 사회적 가면은 ‘웃음’과 ‘친철’이다. 인성 좋아 보이는 웃음, 그리고 부드러운 말투, 친절함. 하지만 나는 안다. 정말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내가 보이는 진짜 웃음과 필요한 순간이어서 짓는 가짜 웃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짜 웃음을 많이 지을 필요가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정말 감사하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 또 한 번 고민하고 생각했다.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가면들을 쓰면서 살아가는 건, 어쩌면 직장인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려고 노력하고,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 타인의 슬픔과 아픔에 위로보다 공감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2. 쓸모 있는 삶


그는 이런저런 안부를 묻더니, 재밌는 제안이 들어왔는데 나를 추천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영국 방송국 일이고 통역 이외에 제반 사항까지 커버해 주길 원하는데, 머리도 좀 식힐 겸 알바나 할 의향이 있냐는 거였다. 통역하는 김에 가이드도 좀 하면 된다고. 어차피 우리 일에 정해진 규칙이 없으니 그 정도쯤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겠냐고. 마지막 말에 나는 기분이 상했다. 내 일의 쓸모를 멋대로 재단하는 듯한 말투 때문이었다.

다만 그들과의 작업 후에, 나는 내게 맞는 일이 통역뿐임을 깊이 깨달았다. 문장 안에서 나는 평온함을 느꼈다. 반대로 문장의 울타리 밖으로 나가야 할 때 민감해졌다. 앞으로는 어쩌다 실수로 그런 걸 맡아도 내 의견 따위를 밖으로 꺼내는 과오는 저지르지 말자고, 내 일이 문장 안에 갇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 쓸모 있는 삶_최유안


아침에 갑자기 모든 것이 지루해졌다. 차를 끌고 학교에 가는 길, 새벽 6시의 출근 풍경, 막힌 도로, 서서히 밝아오는 빛, 늘 참 좋고 새로웠던 그 길이 이상하게 오늘따라 지루하고 재미 없어졌다. 단순한 삶의 반복, 지겨움. 서서히 무기력해졌다. 그렇다고 놀고 싶은 것도 아닌데 일상의 지루함. 뭐 그런 느낌.

막상 학교에 도착하니 할 일이 많았다. 보고해야 할 문서를 작성하는 일, 월중 계획에 따라 업무를 진행하는 일, 수업 시간, 그러다 까마득하게 잊었다. 일상의 지루함을. 그런 일과 마음을 친한 선생님에게 이야기하니 결국 사람은 지속적이고 일상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완전 공감이 되었다.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어서 완전 애를 썼던 시간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지지 않던 시간도 있었다. 모든 마음을 다 내려놓았을 때, 기회가 주어졌다. 일을 하면서 학교라는 공간과 그 시간이 너무 좋아 아침 발걸음이 가벼웠고, 아이들과 함께하는 수업 시간이 참 좋아 밤늦게까지 자료를 만들기도 하고 머릿속으로 여러 번 수업의 장면을 구현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십여 년. 그런 소중한 시간을 내가 잊고 살았나 보다. 나의 쓸모가 학교에서 발현되고, 아이들을 통해 실현되며, 결국 나를 만들어 가는 일이라는 것을.



3. 정리.


도지윤은 느릿느릿 짐을 쌓다가 이따금 들려오는 독촉 방송에 서둘러 달음질하길 반복하면서 깨달았다. 이 초단순 노동은 그저 시간과 돈을 상호 교환하는 작업이며, 고통은 행동하는 육신이 아니라 지루함을 견디는 정신의 몫이었다. ‘하기 싫다’라는 생각을 글자로 새겼다면 족히 팔만대장경 절반은 채웠을 즘, 마침내 퇴근 알림 방송이 흘러나왔다. 코인 대박으로 흥청망정 지냈던 한 달보다 월등히 길었던 여섯 시간이었다.

- 빌런_천현우


‘월급 사실주의 문학 동인’ 매력적이다. 월급을 받는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그렇게 월급을 받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며, 삶의 모습이 제 각기라 할지라도, 나는 월급 받는 삶이 필요한 사람이다. 좀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생계를 유지하며, 더 나은 휴식을 누리기 위해 나는 일을 하고 있다. 그것이 참 좋다.

노동의 현실이 사람마다 다르고 그 고단함의 깊이를 채 가늠하지 못할 때도 많지만 현재의 나는 일을 하고 있음이 참 좋다. 그 감사함을 조금은 오래 누리고 싶다.


[이야기 나눠 보기]

1) 혹시 사회적으로 보이는 어떤 모습이 있다면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그런 사회적 가면을 쓰는 이유는 무엇이며, 왜 필요한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봅시다.

2) 나의 ‘쓸모 있는 삶’은 무엇인지, 나는 어떤 일을 가치롭게 여기는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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