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시간 164. 마음의 장소

# 나희덕 시인_달 출판사

by 벼리바라기


다시 학기가 시작되었다. 부서를 옮겨 새로운 업무를 한다는 두려움이 커서 마음이 많이 힘들었는데, 일주일의 시간이 지나자 마음이 자리를 잡아가는 느낌이 든다. 물론 업무가 줄었다거나 수업 시수가 많이 줄었다거나 그런 외적인 어떤 변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보다는 나의 마음, 그 마음이 다시 일할 준비를 받아들인 기분이다. 그래서인지 이번 주말은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한갓지고 여유롭다. 좋다.

이 책을 만난 곳은 학교 근처의 작은 서점에서였다. 섬마을 책방이라는 이름의 작은 공간, 독립서점에 가게 되면 꼭 책을 한 권씩 사서 돌아와야지 마음을 먹었더랬다. ‘섬마을 책방’의 아늑하고 따뜻한 감성이 내 시선을 이 책에 머물게 했나 보다. 그래서 읽게 된 책, 사놓고 학기가 시작될 때까지는 열어보지도 못했다. 이제야 마음이 여유를 찾아 책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는 단숨에 읽었다. 워낙 나희덕 작가님을 좋아하기도 하고, 짧은 글들의 호흡이 내게 맞아 책이 술술 넘어갔다. 봄날의 따뜻함을 가지고 있는 책이다.

1. 구부러진 손가락들

물건을 골라 계산대 위에 놓으면 그의 손가락은 이내 음악에서 풀려나 컴퓨터 자판의 숫자들을 누르기 시작했다. 뒤틀리는 손으로 천천히 숫자 버튼을 눌러도 말을 잘 듣지 않는 손가락들은 자주 에러를 냈다. 그러면 친절한 그의 동료가 달려와 문제를 해결해주곤 했다. 물건을 사려고 기다리는 고객들 중에 그로 인해 시간이 지체되는 것에 짜증을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내민 지폐를 받아 놓고, 그는 심하게 떨리는 손으로 거스름돈을 건넸다. 크고 작은 동전들이 그의 오그라든 손가락들에 세서 금방이라도 빠져나올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흔들리는 물통 속의 물처럼 찰랑거리는 동전들, 나는 그 소리가 무슨 노래라도 되는 것 같아서 동전을 지갑에 던져 넣지 못했다. 동전을 손에 꼭 쥐고 걸으며 그가 들려준 음악의 여운을 좀 더 느끼고 싶어서. (18쪽)

작가가 초청되어 방문한 여러 국가에서 만난 풍경들에 대한 이야기를 책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부분은 심장병 어린이를 돕기 위한 런던의 자선가게에서 만난 지체장애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구부러진 손가락으로 비틀린 몸의 허벅지를 음악에 맞춰 두드리던 직원이 작가님이 물건 값을 지불하자 위태롭게 동전을 건네는 모습, 그 동전을 받아 들고 차마 지갑에 다시 넣지 못하고 손에 꼭 쥔 채 장애인이 들려준 동전소리를 떠올리는 작가님의 모습이 그대로 그려졌다. 마치 한 편의 시처럼.

특수학급이 있는 우리 학교는 새 학기가 시작되면 일주일정도 특수학급의 학생들이 일반학급에서 비장애 친구들과 함께 공부를 한다. 그 일주일의 적응시간이 끝나면 장애의 정도가 심한 학생들은 특수학급에서 수업을 하고 장애의 정도가 덜한 친구들은 일반학급과 특수학급을 오가면서 수업에 참여한다. 첫날 수업에는 없었던 친구들이 다음날 수업시간에 가니 자리에 앉아있었다. 미리 받은 학생 정보를 보고 장애를 가진 학생들임을 알 수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국어선생님이라고, 일 년 동안 잘 지내자고, 이름을 불러주면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교무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며칠 뒤 일반학급의 학생 부모님께서 학교에 민원을 넣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장애학생이 수업시간에 소리를 많이 질러 일반학생이 수업시간 집중할 수 없고 피해를 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상황이 충분히 짐작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길지 않은 일주일의 시간조차 이해할 만한 마음의 여유와 안정이 우리에겐 없구나, 그런 마음도 들었다. 예전에 담임을 할 때 학급에서 진행된 장애인식교육 수업이 생각났다. 특수 학생이 있는 일반학급을 대상으로 특수반 선생님께서 진행해 주신 장애인식교육 이후 장애인 친구를 도와줄 비장애인 봉사활동 학생을 선발하고 학급의 학생들에게 장애학생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 대한 교육, 지금도 분명 그 교육은 이루어지고 있겠지만 못내 학급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마음이 아프다.

작가님이 구부러진 손가락으로 위태롭게 동전을 건네던 장애인의 모습에서 음악을 발견했던 그 마음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전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전히 타인을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조금은 긍정의 마음으로 사람을 볼 수 있는 마음이 지금 우리에겐 필요하다.

2. 연애소설 읽는 노인

특히 그가 좋아했던 연애소설들은 죽은 아내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인간의 야만성을 잊게 해 주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물론 이 작품은 연애소설을 읽는 평화보다는 아마존의 평화를 깨뜨리는 개발의 폭군들과 그에 저항한 싸움을 주로 그리고 있다. 밀렵꾼에게 새끼와 수컷을 잃은 암살쾡이 이와의 혈투 끝에 그가 돌아온 곳은 연애소설이 있는 오두막이었다. 낡은 군청색 양복을 입고 책일 읽는 노인은 어떤 싸움에서 돌아와 여기 앉아 있는 것일까, 왠지 그는 매일 그 장소에서 책을 읽어왔을 것 같다. 아일랜드의 외딴 바닷가에서도 그는 책을 통해 런던에도 가고 파리에도 가고 아마존에도 다녀왔을 것이다. 어떤 문장은 여러 번 소리 내 읽었을 것이다. 밀려오는 파도에게 들려주기라도 하듯이. (54쪽)

작가님이 아일랜드 바닷가 마을에서 마주친 책 읽는 노인에 대한 상념을 적은 부분이다. 노인이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는 몰라도 작가님은 노인의 모습에서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이라는 루이스 세풀베다의 소설을 떠올렸다. 소설 속 주인공이 연애 소설을 읽는 이유는 죽은 아내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인간의 야만성을 잊게 해 주는 삶의 위안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생에 지친 발걸음을 이끌고 연애소설이 있는 오두막으로 걸어 들어오는 노인의 모습이 책을 읽는 내내 떠올랐다.

나는 세상 모든 연애 이야기를 좋아한다. 인간의 야만성을 잊게 해 준다는 그 문장이 마음에 콕 와닿았다. 나도 그런 건지도 모른다. 지금은 설렘보다는 편안함이, 안정이 더 큰 자리를 차지하지만 처음 연애를 시작할 때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반짝이는 눈과 목소리와 그리고 여운을 발견하는 것을 나는 좋아한다. 그리고는 상상한다. 그 시작의 설렘과 그를 향한 생생한 감정의 움직임, 나는 그런 이야기에서 생생함을 발견하는 것 같다.

그래서 책에 실린 이 부분이 참 좋았다. 바닷가의 파도소리를 들으면 책을 읽고 있는 노인,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것 같았고 들리지 않아도 들리는 것 같았다. 마음이 사뿐 내려앉고 온몸이 느긋하게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구나, 그런 생각도 밀려왔다. 기분 좋은 일요일이다.

3. 정리

자라투스트라는 산비탈의 나무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나무가 바람에 굽은 것처럼, 인간 역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단련되기 마련이다. 그 보이지 않는 손은 신일 수도 있고 운명일 수도 있다. 고통이 주어졌다는 것은 신이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다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그 보이지 않는 손이 삶을 강하게 구부릴 때, 당신은 어떻게 하는지? 더 낮게, 더 낮게 엎드리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 바람이 지나갈 때까지 뿌리는 흙을 향해 더 맹렬하게 파고드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엎드렸던 흔적들을 나무도 사람도 지니고 있다. (30쪽)

보이지 않는 손이 삶을 강하게 구부릴 때 더 낮게, 더 낮게 엎드리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오랜만에 맑고 쾌청한 날씨에 브런치 글을 쓰기 위해서 카페로 향하면서 아직 겨울을 지나고 있는 나무들과 봄을 향해 가고 있는 하늘을 보았다. 조금씩 이 나무들에게도 새순이 돋겠지, 그리고 상상하지 못할 푸르름을 지니겠지, 그런 마음에 나무들의 시간이 경이로워 보였다. 때때로 시간은 비와 바람과 추위와 눈으로 그렇게 삶을 강하게 구부리겠지만 나무가 뿌리내리고 있는 동안 나무는 또 견디겠구나, 그런 마음도 들었다. 내 삶도 흙을 향해 더 맹렬하게 파고들어 흔들림을 견디는 뿌리를 내리고 싶다.

[이야기 나눠 보기] 1)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최근 발견한 아름다운 풍경이나 사람, 또는 환경에 대하여 천천히 묘사해 봅시다. 2) 연애 소설을 좋아한다면, 왜 그런지 이유를 나눠 봅시다. 혹시 연애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떤 장르의 소설을 좋아하는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