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헬의 짐)
이렇게 무거울 수가. 가늠하기 어려운 삶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려다 멈춘다. 가방의 짓눌림이 어깨와 온 몸을 저리게 하기에. 별로 필요하지 않은 것은 덜어내기 위해 가방 속을 살핀다. 노트북, 메모장, 읽을 책, 핸드폰, 꼭 필요한 것들이지만 정말 많기도 하다. 찬찬히 그리고 세심히 살펴본다. 허나 덜어낼 것이 단 한 가지도 없다. 난감해한 몇 분의 시간을 지워버리고 다시 가방을 등에 멘다. 괜한 시간낭비였다고 툴툴대며.
결혼 후 사십 여년을 대부분 이렇게 살아왔다. 무거운 짐을 덜어내려고 망설이던 시간까지 아까워하며. 그 결과 몸과 마음 어느 한곳 성 한데가 없다. 영혼이 피폐해 지는 것조차 감수해야 했으니까. 그렇게 어떤 상황 에서도 멈추지 않고 굽이굽이 그 먼 길을 돌아 지금이다. 그러나 결코 후회 같은 것은 안한다. 살면서 무겁다고 덜어낼 수 없는 것들이었을 테니까. 더하여 그것들은 내가 감당할만한 것들이었기에 기꺼이 짊어졌을 테니.
아프리카의 원주민은 강을 건널 때 등에 큰 돌덩이를 진다고 한다. 급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내 등의 무거운 짐 또한 내가 살아가기 위한 그 어떤 이유였을 테다. 그랬기에, 그 무거움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아닐는지. 등에 진 짐이 너무 무거워 내려놓고 싶지만 내려놓을 수조차 없었던 시간들. 그리고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내려놓을 수 없는 책임감과 의무감이 지금의 나로 있게 한 것일 테니까
욕심, 집착, 배신도 모자라 외로움까지 잔뜩 들어있는 짐 덩어리. 그러나 두 아들을 향한 사랑과 꿈도 들어있었기에 급류의 험한 강도 무사히 건넜음에 틀림없을 터. 그래서 이제 그 무거운 짐 덩어리를 뭉뚱그려 선물이라 불러야겠다고 감히 마음먹는다. 그 짐이 선물이었음을 몰랐던 시간들. 무거운 짐을 덜어내느라 피 나는 노력은 얼마나 많이 했었던가. 또한 힘이 부쳐 무작정 주저앉은 어느 한날, 다만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며 등을 토닥이며 소리 없이 흘린 눈물은 또 얼마나 많았었는지. 그런 날에는 나 자신이 부담스럽고 존재조차 부정하고 싶었다. ‘왜 날 낳으셨나요.’라고 부모님까지 원망하면서.
결혼 후 사십 여년 내내, 내 등의 짐을 원망 하며 죽지 못해 살아왔다고 하면 엄살이 너무 지나친가. 하지만 그 짐의 존재 때문에 늘 조심하며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 왔을지도. 그러니 나를 바르게 살도록 해준 그것이 귀한 선물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더하여 겸손함과 소박함에 대한 당부까지 알게 해준 내 등의 짐. 그것은 세상이 나에게 준 가장 값진 선물임이 당연할 테다.
오늘 이순간이 가장 중요한 순간임을 말해 무엇 하랴. 욕심 내지 말고 곱게 살아가며 봄날의 꽃 같은 삶을 살아보는 희망도 꿈꾸어본다. 그러나 이제껏 나와 같이한 짐을 내려놓치는 않을 테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이니 전보다 더욱 귀히 여기며 아껴야 하지 않겠는가.
어릴 적 내 아비가 누비처네로 나를 업고 간절한 마음으로 새벽산길을 올라갔듯이 나도 그래야 할 테다. 짧다는 자식의 명줄을 늘리기 위한 아비의 최선의 선택은 절 공양(供養)이었다. 첫새벽 불공드리기 위해 아차산 꼭대기 절을 향해 수 천 만보의 발걸음을 내디뎠던 초로의 아비. 그 덕에 이제껏 내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 아비가 나를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듯이 나도 선물인 등에 진 짐을 위해 기도하며 발자국을 뛸 테다. 남은 여정을 등에 진 짐과 따듯한 손 마주잡고 함께 어깨동무하며. 이제껏 등에 졌던 짐, 그 속에 감사와 고마움을 듬뿍 보탠다. 나는 지금, 선물인 짐을 등에 지고, 가슴에 안고 나만의 꽃길을 걸어갈 꿈에 부풀어있다. ‘돌아보니 내 인생 모두가 선물이고 봄날 이었네’라고 흥얼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