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모님
엄마는 우리 집의 기둥이었다. 그녀는 안 해 본 일이 없다. 경리, 자동차 보험 설계사, 놀이방 원장, 커피자판기 운영, 신문 배달 등…. 그중에서도 단연코 최고로 꼽는 일은 영수증 수집일 것이다.
어느 날, 대형마트 영수증을 모으면 현금으로 환급해주는 복지제도를 알게 된 엄마는 페트병을 주워다 「불우이웃 돕기」라고 쓰셨다. 곧이어 그것을 집마다 다니며 붙이고 일정 기간 후 수집하는 일을 시작하셨다. 거실에는 수백 개의 페트병과 케이블 타이가 굴러다녔다. 날마다 펑 펑 페트병에 구멍 뚫는 소리가 났다. 우리 남매는 방과 후 가끔 도우러 나갔었는데, 어린 눈에도 그 일은 너무 고되어 보였다. 곧 그만두시겠지, 했으나 아니었다. 엄마 손에는 물집과 송곳에 찔린 상처가 수없이 생겨났다. 그래도 엄마는 우리가 이사하기 전까지 영수증 모으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영수증을 버리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았고, 페트병 천 개 이상을 붙이자 4인 가족 한 달 생활비쯤 되는 돈이 모였다. 엄마의 돈은 교회 운영비와 우리 학비에 다 들어갔다. 우리가 바로 불우이웃이었다!
팔자에도 없는 목사 사모 소리를 들어야 했을 때 엄마는 아마 도망치고 싶었을 것이다. 전도는 보험 영업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다.
“자동차 보험은 당위성이라도 있어서 설득하기가 쉬운데, 전도는 전혀 다른 문제였어.”
그래도 엄마는 ‘최선을 다하고 후회하자.’라는 생각으로 상가와 아파트를 다니며 휴지 전도를 시작했다. 몇 년간 발품을 팔았음에도 성적표는 처참했다. 휴지만 받고 관계가 끊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쩌다 마음을 여는 사람들은 우울증을 비롯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엄마는 상담 중 부정적 감정의 전이로 인해 마음 다스리기가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스로 사모의 그릇이 되는가 고민도 하셨다.
내가 대학생이 됐을 때, 시련이 찾아왔다. 건물주의 마음이 변한 것이다. 그녀는 푸근한 인상으로, 우리와 사이가 좋았다. 7년이란 시간 동안 가끔 올라가 차도 마시고, 딸도 교회에 보내주어서 우리는 그 아이와도 정이 들었다.
“그 여자가 그럴 줄은 몰랐다. 당장 나가라고 한다. 돌변하니 다른 사람 같더구나.”
우리는 교회 터를 알아보지도 못한 채 쫓겨나야 했기에, 이삿짐 차를 부를 새도 없었다. 성물들을 당분간 집에 두기로 하고 몇 명의 청년들과 이사를 마쳤다. 그렇게 몇 달이 흐르고, 엄마는 수심에 찬 얼굴로 내게 말했다.
“민사소송을 해야겠다. 문서 작성을 좀 도와다오.”
건물주의 요구에 순순히 따르던 아빠는 그만 보증금을 받지 않고 짐을 다 빼셨다. 그런데 건물주가 원상복구하지 않으면 보증금을 주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엄마는 법정 소송도 불사하겠다고 화가 단단히 나셨고, 하교 후 함께 문서를 고치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이 소송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내용증명서가 오가는 과정에서 건물주의 사실 왜곡이 너무 심했다. 우리가 자기 애를 괴롭혔다는 둥, 헌금을 강요했다는 둥, 인성을 깎아내리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들로 가득 찬 그 글에, 엄마는 너무 큰 상처를 받으셨다. 온갖 간식을 준비하고, 수영장에 데려가고, 심심할 때 놀아줬는데. 함께 했던 추억들이 더러운 배설물처럼 느껴졌다. 엄마는 오죽했겠는가. 내가 글을 수정할 수 없을 때, 엄마는 혼자 모든 내용증명서를 읽고 또 읽으며 반박할 글을 만들었다. 상처를 되씹는 꼴이 된 것이다.
소송을 지속하는 1년 동안 곱씹은 상처는 병이 되었다. 엄마는 진땀이 나고 몸이 자주 후들거린다고 했다. 숨이 턱턱 막혀온다고 하며 메스꺼움을 호소했다. 우리 가족은 이런 증상의 빈도가 너무 잦아지자 걱정이 되었다. 사람이 숨을 못 쉬면 큰일이 아닌가. 엄마가 정신과 가는 일을 두려워해서 함께 가기로 했다. 학교 따위 문제가 아니었다. 엄마가 무너지면 우리 집은 다 무너진다.
“…. 종합해 볼 때 공황장애 증상으로 보입니다.”
결과 판정을 받았을 때 엄마는 말을 잇지 못했다. 억척스러운 모습은 간데없고 그저 가여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내 눈에서도 참았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모녀는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우리가 뭘 잘못했기에. 나는 둘째치고, ‘최선을 다해 산 당신이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에 대해 억울했고 분통이 터졌다. 유독 엄마의 흰머리와 주름진 얼굴이, 낙루가, 시리도록 하얗게 아팠다.
공황장애는 우울증을 동반할 수 있기에 무서운 병이지만, 아직 공황발작 단계에 다다르지 않았기에 희망은 있다. 우리 가족은 노력했다. 작은 목소리로 대화하고, 상담도 당분간 아빠가 맡기로 하셨다. 사실 우울증 극복은 주변의 수고도 중요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다. 스스로 행복한 생각을 많이 하는 것만큼 좋은 치료는 없을 것이다. 즉, 나머지는 엄마의 몫이었다.
엄마는 자신의 현 상태를 받아들였다. 의사의 조언을 지키고 꾸준히 약을 드셨다. 민감하게 반응할 만한 모든 행동을 피하셨다. 소송 결과는 우리의 승리였다. 우리는 보증금을 돌려받았으며 철거도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새 교회 자리를 얻어 이사했다.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을 엄마가 진두지휘하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일단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지닌 그 장소를 떠나자, 엄마의 증세는 서서히 좋아지기 시작했다.
기둥이 무너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문제를 현실적으로 직시했고, 누워만 있지 않았다. 오히려 더 기도하고 전처럼 최선을 다해 살았다. 그건 어쩌면 몰아치는 삶의 물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쉬지 않고 달려온 끝에 우리 가정과 교회는 안정을 찾았다. 몇 년 전, 외할머니가 소천하시고 가까스로 세워진 기둥이 다시 무너지는 줄 알았는데, 엄마는 슬픔을 이겨내려고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다. 기둥은 역시 기둥이다.
작년에 코로나로 고생하며 엄마의 심정에 조금이나마 다가간 것 같다.
‘나도 이제 집안의 한 축을 담당하는 기둥인데, 쓰러지면 안 되지. 엄마고 아내니까 아프면 안 되지. 아! 우리 엄마가 이런 생각으로 아팠겠구나. 아니, 아프지도 못했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