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詩 어느 나라 말이지요
난해(難解) 한 시를 쓰다
전 진 식
詩를 쓴다
詩는 내가 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고개를 끄떡여 줄 때 詩가 된다
동냥하는 거지꼴로 거리를 간다
양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신사를 만나서
詩를 보여주니
위 아래를 한참 쳐다보다면서
정신병자 취급을 한다
예쁜 여학생은 낙엽 뒹구는 얼굴로
까르르 웃기만 하고
할아버지는 안경을 몇 번이나 닦고도
글씨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초등학생 앞에서는
차라리 말이 통했다
"아저씨 이거 어느 나라말이예요?"
그림:네이브에서
문학적평론ㅡAi
전진식 시인의 〈난해한 시를 쓰다〉는 단순한 자조나 풍자가 아니라,
시의 난해함’ 자체를 문제 삼는 메타시(詩中詩)**로 읽을 수 있습니다.
즉, 이 시는 난해한 시를 비판하는 동시에,
‘왜 시가 독자에게서 멀어졌는가’라는 문학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그 의도를 반영해 문학 평론식으로 다시 정리해 보면
전진식, 〈난해(難解)한 시를 쓰다〉 — 시와 독자 사이의 거리, 혹은 소통의 윤리
1. 서론: ‘난해한 시’에 대한 시인의 반문
전진식의 〈난해한 시를 쓰다〉는 시의 언어와 독자의 관계를 정면으로 묻는 작품이다.
이 시는 난해함을 미학적 가치로 치켜세우는 현대시의 경향에 대해,
“그 난해함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즉, 시인이 시의 예술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독자와의 소통을 잃어버린 현실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시이다.
2. 본론
①: 시의 존재 조건 — “詩는 내가 쓰는 것이 아니라 / 누군가 고개를 끄떡여 줄 때 詩가 된다”
시의 첫머리는 이 작품의 핵심 진술이다.
여기서 시인은 시의 자율성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 완성의 조건을 ‘타자의 수용’에 두고 있다.
즉, 시는 쓰는 자의 자의식 속에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공감과 이해라는 독자의 반응 속에서 시가 된다는 것이다.
이 인식은 곧 시의 사회적 책임과 소통의 필요성을 내포한다.
그런 점에서 전진식의 시는 예술의 자기반성적 성격을 띠며,
‘시란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한다.
3. 본론
②: 현실 속의 시인 — “동냥하는 거지꼴로 거리를 간다”
이 장면은 난해한 시를 쓰는 시인 자신의 풍자적 자화상이다.
‘동냥하는 거지’는 독자의 반응을 구걸하는 시인의 초상이다.
이는 ‘시가 이해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자조이자,
대중과 단절된 시의 무력함을 드러낸다.
전진식의 어조는 비극적이라기보다 냉소적이고 해학적이다.
그는 스스로를 비하하면서도, 그 속에
‘너무 어려운 시를 쓰는 시인들’에 대한 은근한 비판을 숨긴다.
즉, 자신의 시가 독자에게 닿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실패한 언어라는 메시지다.
4. 본론
③: 소통의 단절을 보여주는 세 인물들
‘신사’, ‘여학생’, ‘할아버지’라는 세 인물은 각기 다른 독자층을 대표한다.
• **‘신사’**는 합리적이고 세속적인 현대인이다. 그에게 시는 “정신병자의 언어”로 인식된다.
• **‘여학생’**은 감성은 있으나 진지한 이해의 태도는 없다. 시는 ‘웃음거리’가 된다.
• **‘할아버지’**는 세대적 단절의 상징으로, 시를 읽으려는 의지는 있으나 감각이 닳아 있다.
이 세 인물의 반응은 공통적으로 ‘시의 실패’를 보여주지만,
그 책임이 전적으로 독자에게 있지 않다는 점이 중요하다.
시인은 **‘시가 왜 이렇게 멀어졌는가’**를 자문하면서,
난해함의 미학을 추구한 시인들—즉, 대중적 감각을 상실한 문단의 흐름—을 은근히 비판한다.
5. 본론
④: 아이의 질문 — “아저씨 이거 어느 나라말이예요?”
이 마지막 구절은 시 전편을 정리하는 역설적 통찰로 작용한다.
아이의 천진한 물음은 단순한 ‘무지’의 표현이 아니라,
시의 언어가 이미 현실의 언어와 단절된 외국어가 되어버렸음을 드러낸다.
즉, 아이의 순수한 시선은 시인에게 거울처럼 작용하며,
그를 ‘자신의 언어가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돌려세운다.
결국 시인은 이 장면을 통해 소통 부재의 현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동시에, 그 회복을 요청하고 있다.
6. 결론: 시의 책임, 혹은 난해함의 윤리
〈난해한 시를 쓰다〉는 시를 쓰는 행위에 대한 풍자이자 반성이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난해한 시’라는 미학적 자폐를 경계한다.
예술이 고결함을 지향할수록, 그 언어는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기 쉽다.
전진식의 시는 그 간극을 뼈아프게 인식하고,
시란 결국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 때 비로소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환기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단순한 자조가 아닌,
**“시와 독자의 관계를 다시 세우려는 윤리적 선언문”**으로 읽을 수 있다.
시를 ‘어렵게 쓰는 시인들’에 대한 비판이자,
동시에 ‘쉬운 언어로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시인의 각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