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 꽃이>
전 진식
신은 없을 것이다
허리춤을 조르며
보리고개가 높았던 봄날,
아버지는 독일에서 땅굴을 팠고 형은 월남의 정글을 파헤치고 총알을 피해 다녔다 고속도로에는 화물차만 다녔고 서울행 완행열차는 숨가쁘게 기적을 울렸다 구로 공단의 굴뚝에는 연기가 피어 오르고
나는 무궁화 꽃씨를 들고 들판을 뛰어 다녔다
태평양을 건너 온 미니스커트를 보면서 사내들의 심장이 강하게 뛰었고 구멍 난 청바지가 거리를 활보하며 불야성의 네온이 축배를 든다 웃음소리가 골목골목을 뛰어다닌다 고층 빌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솟아 올랐고 한강을 건너는 기적소리가 깃발을 흔들고 있다
무궁화 꽃이 피고 있었다
숨바꼭질하는 아이들의 등 뒤에 숨어 한 사내가 옥상에 올라 팔짱을 끼고 있다
발아래는 안개가 피고 구름밭이다 오색 무지개가 일고 무지개를 잡으려고 하늘을 본다 서유기의 책장을 넘기면서 손오공의 도움을 청하고 펼쳐진 구름 바다에 도술을 주문한다 혹한에 눈보라가 휘몰아 치고 천둥 번개가 친다 피뢰침은 부러져 있고
무궁화 꽃은 시들고 있었다
신(神)은 없을 것이다
호킹 박사는 외계인을 찿아 손을 내밀고
신은 있었다
혼돈으로 땅이 갈라지고 바벨탑이 무너진다 파편들이 골리앗의 이마로 돌진하고 먼지 구덩이 속으로 경적이 끊어졌다 사람들은 말을 잃었고 언어가 파손된 땅에는 거대한 크레인이 해체되어 땅바닥에 갈라진다
무궁화 꽃은 지고 있는데 아무도 겨울을 보지 않는다
부두에는 떠나가는 배들이 보이고
나는 손을 흔든다
내 아들은 늙은 아비를 살리자고 멀리 타국으로 갈 것이다
그리운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이 축음기의 바늘에 끼여 끽끽거린다
무궁화 꽃씨를 찾아 꽃집을 기웃거린다